바빴다. 3월 내내, 바빴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전.평.>을 완독했기 때문이다. 인생의 시즌별로. 맨 처음은 십대, 고등학교 때. 박형규 번역, 사전판형(?)으로 읽었다. 이번에 새롭게 나왔으나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싶다.
두번째, 이십대, 대학 시절, 한학기 동안 톨스토이 수업 들으면서 다시 읽었다. 범우사판이었는데, 이 역시 박형규 번역이었나 보다.(이철 번역인 줄 알았네 -_-;;)
세번째, 삼십대, 귀국 하고 수업 준비하면서. 역시 같은 번역. 하지만 이제는 학생이 아니라 선생으로서 읽었는데, 그때문에 더더욱 고생했다. 학생은 수업 준비를 안 할 수 있지만 선생은 그럴 수 없다. 문자 그대로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수업을 한 번 휴강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한편으론, 그만큼 완독과 정독을 향한 의지가 강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사십대 중반, 네 번째 완독이자 정독이다. 그 간의 세월을 증명하듯, 새 번역이 나왔다. 워낙 중요한 작품이기에 새 번역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고, 또 그랬기에 아쉬움도 좀 크긴 하다. 역자가 70년대생인데, 아, 이 나이도 이제는 중년이다 ㅠ.ㅠ 사실 이쪽, 저쪽에서 다 번역 의뢰를 받았던 작품인데, 선뜻 손대지 못했고 결과적으론 잘 했다고 생각한다. 완독을 하는 것도 힘든 작품을, 번역까지 어찌 하랴. 인생이 너무 짧다, '도리' 차원에서 논문 한 편 쓰고 나도 빨리 소설 써야지^^;
이번에 새삼 놀랐다. 나는 내가 <전쟁과 평화>를 아주 속속들이 안다고 자부했는데, 헐, 새로워 보이는 장면이 왜 이리 많나. 등장인물이 워낙에 많기도 하지만, 이번에 새로 알게 된(-_-;;) 인물도 있다. 그러게 겸손해져야지. 다른 한편으론, 이제 와서 뭘 어떡하랴. 기왕지사 알던 놈들이나 잘 건사해야지. 그럼 슬슬 원본을 훑어보기로 하자. 분량 앞에서 좀처럼 주눅들지 않는 나도 흔들린다, 후덜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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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이 된 아이가 학교를 잘 다니고 있다. 수학도 잘 하고 알림장도 잘 쓰고 국어 발표도 잘한다. 음, 그런데 이건 담임 선생님 생각이시고(^^;;) 엄마인 나는 공개 수업 갔다 와서 무척 속이 상했다. 수학만 풀었지, 국어 교과서가 완전히 새 책이고, 작문을 전혀 하지 못하고 바보 짓- 과잉 행동- 많이 하고 분위기 파악 못하고 바보 같이 웃고 지시 수행 잘 안 되고 굼뜨고 등등.
그런 엄마의 욕심에 철퇴를 가하듯, 지난 금요일 새벽 2시 26분부터 시작, 10시간 동안 총 3번의 경련을 했다. 119를 불렀으나 경련이 멎고 의식도 돌아와서(말을 해서)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두 번째 경련에서(아침 8시 58분) 응급실 갔다. 응급실에 있는 동안 한 번 더 해서 총 세 번. 1번 경련은 자다가 한 것인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겠다. 열도 없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2번 경기 이후(이빨이 빠졌는데ㅠ.ㅠ 다행히 유치였다) 병원 도착 하니 38도, 3번 경기 직후 40도 넘어서 결국 '바이러스 감염으로 열성 경련'으로 진단되었다. 마른 경기가 아니라니 천만다행이었다..ㅠ.ㅠ 그럼에도, 이제는 열성 경련도 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는데 계속하다니, 역시 '아픈 아이'였던 것이다..ㅠ.ㅠ
해열제가 잘 듣지 않아 입원실로 올라갔다. 당일 밤에, 그래도 열은 잡히는 양상을 보였다. 아침, 밥을 먹는다. 앗, 집에 가야지! 오줌 누겠다고 화장실도 자주 간다. 부축을 해줘야 하지만 상태가 좋다. 아싸, 다 나았다! 하지만 이건 엄마 생각이고, 완전 쫄아버린 아빠와 젊은 주치의의 생각은 또 달랐다. 실랑이 하다가 반나절 다 보내고 오후 늦게야 퇴원, 도착하자마자 잠 드는 아이를 보며 역시 집이 편하구나, 실감했다.
기념 삼아 사진을 올려둔다. 아이가 많이 자라서 한 침대에 같이 자기가 힘들 정도였다. '전쟁과 평화'. 전쟁 이후에 찾아오는 평화의 소중함! 혹은 전쟁과 전쟁 사이에 끼어 있는 평화는 커피우유 속 바닐라시럽처럼 달달하다. 아이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등교했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인 오늘, 금요일, 감기에 걸려 좀 누워 있었으나 심하게 앓을 것 같지는 않다. 이 평화를 만끽하도록 하자, 조심조심.
<전쟁과 평화>의 마지막 장면, 나타샤-베주호프 부부, 마리야-니콜라이 부부가 모두 한자리에 있다. 여기에 동참한 니콜라이 볼콘스키 소공작(15세가 되었다!)의 상념이, 역사 관련 잡설을 빼면, 사실상 소설의 마지막이다. 이 역시, 이번에 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혹은 새삼 깨달은 것이다. 역시, '아이'에 대한 대작가의 배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이야기-역사'(history)는 없다. 음, 나도, 그래도, 하나는 낳았는데(^^;) 솔직히 키우기 너무 힘들어서 정말 남한테 미루고 싶은 일이다 -_-;; 이제 남은 인생은 공부를 좀 하고 싶은데, 흑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