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처음 가는 청년회 자체 모임이라죠.
발제를 해야 하는데 잘 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입니다.
배부른 나를 위해 사람들이 휠체어를 대여하겠다는데,
혹시 내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휠체어 타고 다니는 임산부를 보시면 저인줄 아세요. ㅋㅋㅋ
아래는 발제를 위해 모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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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빗살무늬토기,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 유적, 신석기시대, 높이 90.0cm, 국보
1994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한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 유적 89호 집자리에서 출토되었다. 간결한 V자 모양에 바닥을 제외한 그릇 전면에 가로로 된 생선뼈무늬(橫走魚骨文)를 새긴 이른바 ‘금탄리Ⅱ식 토기’이다. 바탕흙에는 굵은 모래가 섞여 있다. 무늬는 아가리 바로 아래부터 빼곡히 새겨져 있다. 그릇의 크기는 높이가 90cm 이상으로, 저장용 그릇인 ‘독’으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대형이다.
신석기시대 후기가 되면 유적에서 출토되는 농기구의 수와 종류가 증가하고 또한 조, 피 등의 탄화된 곡물도 함께 나온다. 이와 더불어 대형 독의 양도 증가한다. 이러한 유물상의 변화는 생업경제에 있어 농경의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평양시 삼선구역 호남리 표대 유적은 10년에 걸쳐 발굴작업이 이루어질 정도로 대표적, 대규모 신석기 유적이다. 2003년에는 질그릇을 구워 내던 가마터가 실물 그대로 발굴된 바 있고, 지난해에는 125㎡ 면적의 대형 ‘집자리’(집터)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특히 가마터는 연소실과 불고래,소성실이 나란히 놓인 지하밀페식평지가마로서 천정부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이 그대로 잘 남아 있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있는 가마터중 가장 오랜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삼국시대초기의 가마터보다 무려 4,000여년이나 앞서 존재한 것으로, 신석기 시대의 가마터 유적은 세계적으로도 발견된 실례가 매우 드문 희귀한 것이다.
2. 뼈피리, 함경북도 선봉군 서포항유적, 청동기시대, 길이 17.2, 지름 1.4cm, 준국보
조류의 다리뼈를 잘라서 만든 피리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최고(最古)의 악기이다. 세장한 원통형으로, 가운데가 완전히 관통되어 있고 동체면에 한 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13개의 구멍이 뚫려져 있다. 구멍 사이의 간격은 대체로 1cm 내외다. 양끝의 한쪽은 제대로 남아 있고, 다른 한쪽은 좀 파손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함경북도 선봉군(舊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동에서 1961년 발굴되었다. 서포항유적은 1960부터 1964년까지 5차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의 2개 문화층과 신석기시대의 5개 문화층,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2개의 문화층 등 시기를 달리하는 9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이곳을 발굴함으로써 구석기유적을 찾게 되었으며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에 대한 종래의 관점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궁산유적과 지탑리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의 뾰족밑빗살무늬토기문화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르다고 보아왔으나 동북지방의 납작밑토기문화는 BC 5000년대에 해당되므로 더 앞서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뼈피리는 1호 무덤에서 북쪽으로 3m지점의 청동기시대 제1기층에서 출토되었다. 대체로 기원전 2000년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3. 거울 거푸집, 傳 평안남도 맹산군, 청동기시대, 지름 20.0cm, 준국보
평안남도 맹산군 봉인면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며, 1930년 평양부립박물관을 거쳐 현재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청동을 부어 청동기를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거푸집인데, 거푸집의 발견은 청동기의 제작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증거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청동기의 아름다움은 어떤 거푸집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래서 기술자들은 보다 섬세하고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제품을 얻기 위해 밀랍거푸집(꿀 찌꺼기에 송진을 섞어 만듦, 현대의 Roast-wax법)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또한 거푸집은 쓰임새에 따라 외쪽 양쪽 거푸집으로, 재질에 따라 흙 거푸집, 밀랍 거푸집, 돌 거푸집으로 나뉘는데 특히, 활석(滑石)으로 만든 거푸집을 많이 썼다.
중국은 주로 진흙 거푸집을 쓰고, 일본은 대다수가 사암으로 만든 거푸집을 썼다. 그러나 진흙 거푸집은 통풍성이 좋지 않기 때문에 주입구와 함께 가스가 빠지는 구멍을 반드시 만들어 주어야 하는 불편과 한번 밖에 쓰지 못하는 단점이 있으며, 사암 거푸집은 견고하지 못해 여러 번 사용하기 어렵고 미세한 부분은 자주 보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발견되고 있는 거푸집은 대부분이 활석제인데, 돌이 무르기 때문에 조각하기 쉽고, 열전도율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진흙이나 사암 거푸집과는 달리 가스구멍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고, 매우 단단하여 주조할 때 터지지 않아 반영구적이며, 표면이 매끄러워 주조된 청동기 표면의 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양쪽 거푸집을 쓸 때에는 전후좌우가 어긋나지 않고 꼭 맞게 하기 위해 거푸집 옆에 가로와 세로선을 그어 놓은 세심한 정성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 거푸집의 경우 앞·뒷면에 각기 다른 형태의 거친무늬 거울의 주형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 새겨진 거울은 지름이 17.15cm인데, 2개의 꼭지가 있으며 꼭지 사이에는 구멍을 뚫기 위한 연결부가 잘 남아 있다. 거울의 테두리는 반원형이며 꼭지 반대편에 용액을 주입하는 탕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뒷면에 새겨진 거울 주형은 지름이 12.8cm인데, 역시 주형의 한쪽에 치우쳐 2개의 꼭지가 있고 주입구는 역시 그 반대편에 위치하며 테두리도 반원형을 띠고 있다.
4. 좁은쇠단검·칼집,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기원전 1세기, 길이 47.1cm, 너비 13cm
칼날인 검신(劍身), 손잡이인 검파(劍把), 칼집인 검초(劍?)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먼저 검신은 철제인데, 부식이 심한 상태이다. 칼 손잡이는 목제이며 손잡이 끝에 청동제 검파두식이 결합되어 있고, 반부(盤部)는 결실되었다. 칼집은 기본적으로 옻칠을 입힌 나무 칼집이며, 상·하단과 결입부에 모두 5개의 청동금구로 연결시켜 검파형(劍把形)을 이루고 있다. 청동금구에는 이등변삼각형이 연속된 거치문이 투조되어 있으며, 특히 최하단금구[珌]의 아래 마구리에는 거치문이 반투조상태로 새겨져 있다.이처럼 한국식동검문화 단계에서 보이는 독특한 칼집은 고조선 후기부터 서북한 지역에서 유행하였으며, 한반도 남부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창원 다호리유적, 대구 평리동 유적 등 여러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유물은 청동비파형단검과 좁은놋단검을 거쳐 전통적으로 발전해온 고대의 단검 발전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5. 신성동 출토 일괄유물, 고조선, 평양 신성동, 동검 길이 28.5cm
2003년 5월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이 평양시 순안구역 신성동에 위치한 돌널무덤에서 발굴조사한 최신 자료이다. 고조선 시기의 돌곽무덤들은 대체로 기단석 위에 돌을 채워 마감한것이었지만 이 무덤은 기단석 위에 흙만 채워 마감한 새로운 특징이 있다. 한편 평양시 순안구역의 오산리와 구서리에서도 고조선 시기 것으로 보이는 석곽묘가 발견된 바 있다.
유적은 요령식 동검문화에서 한국식 동검문화로 이행하는 고조선 중기의 중요 유적이다. 비파형단검은 비파형단검으로부터 좁은놋단검의 문화로 넘어가던 시기 유적으로서 비파형단검과 좁은놋단검의 특징을 내포하고있다. 잔줄무늬거울, 토기 등.
6. 베개 마구리 장식, 평양시 역포구역 진파리 7호무덤 출토, 고구려 4∼5세기,
길이 22.8㎝, 너비 13㎝, 국보
고구려의 대표적인 금속공예품이다. 전체적으로 복숭아를 절반으로 잘라 옆으로 약간 눕힌 형태를 하고 있는데, 외곽 테와 내부 문양 사이에는 뒷면에서 두드려 볼록하게 만든 원형 장식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중앙에 2겹의 둥근 테두리 속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를 표현하였고, 그 위쪽에는 봉황을, 양 옆으로는 2마리의 용을 표현하였다. 이 장식품은 당초 피장자의 머리부분에서 한 쌍이 출토되어 금동관의 일부로 보기도 하였지만, 최근에는 피장자의 베개(頭枕) 마구리에 장식하였던 금동판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진파리 고분군은 평양직할시 역포구역(力浦區域) 무진리(戊辰里)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고분유적. 고분은 모두 봉토돌방무덤 [封土石室墓(봉토석실묘)]으로서 그 가운데 2기만이 두방무덤[二室墓(이실묘)] 이고 나머지는 외방무덤[單室墓(단실묘)]이다. 5세기 후반∼6세기 후반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동명왕릉(東明王陵)을 중심으로 20기의 고분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이중 보존 상태가 좋은 15기 고분은 2004년 7월 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구려 고분군에 포함된다.
7. 치미,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상경용천부 제9절터, 발해 10세기,
높이 91㎝, 너비 91.5㎝, 두께 36㎝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내에 있는 제9절터에서 출토된 치미이다. 발해의 절터에서 치미가 출토된 예는 다수가 있지만, 이 중 완전히 복원되는 것은 상경성 제1절터와 제9절터에서 출토된 것뿐이다.
치미란 용마루 좌우 끝에 장식하던 상상의 날짐승 꼬리 모양의 고대 장식 기와. 이것은 삼국 시대·통일 신라 시대·고려 시대 중기까지 성행되다가 취두가 도입되면서부터 점차 쇠퇴하여 조선시대의 지붕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취두 : 독수리 모양의 머리를 가진 큰 새로서 모든 잡귀와 화마를 제어하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상징된다.
이 치미는 진한 녹색의 유약을 바른 것으로, 두 날개에는 각각 17개의 돋을 선을 새겨 새의 깃을 표현하였다. 날개와 몸통 사이에 7개의 구멍을 뚫고, 거기에 머리가 꽃모양으로 생긴 장식을 맞추어 넣었는데, 가운데 꽃술 부분이 둥그스름하게 도드라졌고, 그 둘레에는 다수의 꽃잎을 새겨져 있다. 몸체의 등 부분에는 작은 구멍들이 줄을 맞추어 가면서 수십 개나 뚫려있다. 보기 좋은 곡선을 그리면서 펼친 두 날개 사이로 주둥이를 쑥 내민 형상에 녹색유약이 잘 조화되어 전반적으로 힘이 있고 세련된 느낌이다. 제1절터에서 출토된 치미는 형태가 약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양식이다. 안학궁에서 이와 동일한 대형의 치미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적 계승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8. 고려 태조 왕건 청동상, 개성시 해선리 현릉, 고려 10세기말-11세기초,
높이 143.5m, 국보
1992년 고려 태조 왕건릉인 현릉顯陵의 보수 공사 중, 봉분 북쪽 약 5m 지점에서 출토되었다. 발견 초기에는 ‘청동불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연구 결과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임이 밝혀졌다. 이는 1429년(세종 11년) 태조 왕건의 주상鑄像을 능 옆에 묻었다는 『세종실록』등의 조선시대의 기록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왕건(877~943)은 918년 고려를 세운 후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최초의 임금으로, 951년경 동상을 만들어 개성의 봉은사奉恩寺에 모셨다. 광종 2년(951) 쯤에 제작돼 태조 왕건의 원찰(願刹)인 봉은사(奉恩寺)에 모셔졌던 이 상(像)은 고려 전시기에 걸쳐 왕실의 가장신성한 상징물로서 연등회 등 국가 의례에서 중심적인 숭배의 대상이 됐다. 몽고 침입기에 임시 수도였던 강화도로 옮겨지는 등 고려 왕실과 운명을 같이했던 이 상은 조선세종 11년(1429) 왕건의 영정들과 함께 현릉 옆에 매장됐다.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된 관을 쓰고 의자에 앉은 자세의나체상으로 주조된 이 상에는 943년 67세로 사망한 왕건의 말년 모습이 아니라 힘차고 풍채 좋은 장년기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발굴 당시 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금도금을 한 청동조각과 얇은 비단 천들이 붙어 있었는데, 이는 당초에는 몸에 도금(鍍金)을 하였으며, 비단으로 만든 옷을 걸쳤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 상과 관련, 이번 전시의 자문위원인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왕건 동상이 쓰고 있는 관은 태자나 제후 등이 착용하는 원유관(遠遊冠)과는 다른 천자가 쓰는 통천관(通天冠)이며 이는 10세기 전반부터 13세기 중반까지 고려 군주가 자체적으로 황제(천자)를 칭한 역사적 배경과 연결된다”는 주장을 제기해 관심을 끌고 있다.
노 교수는 12일 개막식에 맞춰 출간된 전시도록에 기고한 ‘고려태조 왕건 동상의 황제관복과 조형상징'이란 글에서 내관에 양(梁·관의 전면에서 솟아올라 뒤로 꺾여 관의 후면에 연결되는폭이 좁은 띠 모양 위의 융기된 선)이 24개나 표현돼 있는 것에주목했다.
중국 당나라 무덕(武德) 4년(621) 거복령(車服令)에 원유관은양이 3개인 반면, 천자의 통천관은 양이 24개(‘24량 통천관')로 제도화돼 있다는 것이다. 다만, 왕건 동상의 관에 붙은 해와달을 상징하는 8개의 원형 판은 중국의 통천관과는 구별되는 독창적인 면모다.
노 교수는 또 정밀조사 결과 관만 금도금이 돼 있고 얼굴 등의부위는 채색된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특히 체격이 성인남성의실물 크기에 가까우면서도 남근의 길이가 2㎝에 불과한 것은 출가자인 부처와 재가자인 전륜성왕의 신체적 특징을 묘사한 32가지 대인상 중 전생에 자신의 몸을 삼가 색욕을 멀리함으로써 성취한 ‘마음장상(馬陰藏相·남근이 말의 생식기처럼 오므라들어 몸안에 숨어 있는 형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노 교수는 설명했다.
9. 관음사 관음보살, 고려, 개성시 산성리 관음사, 높이 113.0cm, 국보
이 보살상은 원통형의 보관에 화불을 새겨 놓고 온몸을 장신구로 매우 화려하게 꾸몄다. 오른쪽 다리를 의자 아래로 내린 자세(유희좌, 遊戱坐)와 원통형의 높은 보관은 고려시대 말에 유행한 관음보살상의 모습 중 하나이다. 원나라 라마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아 대리석으로 조각됐음에도 불구하고 표현이 섬세하고 영락장식이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10. 공양탑, 개성시 판문군 선죽리 불일사 5층 석탑 내, 고려,
높이 26cm(대), 높이 18.5cm(중), 높이 11.5cm(소), 국보
1960년 개성시 판문군 선죽리 불일사 절터에 있던 5층 석탑의 탑신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석탑 내부에서는 금동탑, 석제 소탑 등 20여점과 청자 사리합, 불경 등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금동 9층탑, 금동 5층탑, 금동 3층탑 등 3점이 이번 전시에 출품되었는데, 탑신과 기단부가 별도로 제작되어 조립되도록 되어 있다.
금동 9층탑은 전체 높이가 37cm, 기단 부분의 길이는 13.8cm로 옥신과 옥개석으로 구성돼 있는 단아한 모양으로, 기단 4면에 걸쳐 8개 문을 달았고, 각 층마다 창문을 냈으며, 밋밋한 처마마다 기와를 아름답게 조각한 거의 완벽한 형태의 목탑 양식 금동탑이다. 특히 계단과 문과 창문의 정교함은 실제 목탑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표현이 사실적으로, 고려초 4대왕 광종시대 유물로서 고려시대는물론 통일신라 시대 목탑 양식 연구에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며, 특히 황룡사 목탑 재현에 참고할 만하다.
금동 5층탑에는 옥개석에 매달린 풍경이 7점 현존하고 있으며, 상륜부의 장식도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모방한 금동 3층탑의 경우 도금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불일사는 광종대인 951년 지은 절로, 광종이 어머니 유씨(신명순성왕태후)를 위해 세운 절로, 광종의 누이 낙랑공주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혼인하였다. 불일사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5층석탑은 현재 개성시 고려박물관에 이전 복원되어 있다.
11. ‘전(方角頁 )’자가 새겨진 활자, 개성시 만월대, 고려, 길이1.3cm, 너비 1cm, 준국보
1958년 개성시 만월대 신봉문 터로부터 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서 발굴되었다. ‘이마 전 方角頁 '자가 새겨진 이 활자는 활자의 생김새, 글자의 모양, 출토지점 등을 고려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활자로 판단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복 山+復’자가 새겨진 활자 역시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며 고려시대 활자로 알려져 있는데, 글자의 느낌 역시 ‘전’자가 새겨진 활자와 비슷하다.
동활자의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각각 10mm이다. 현존하는 금속활자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이고 활자의 주성분은 동, 주석, 연이며 부성분은 규소, 철, 알루미늄 등이다.
고려시대에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가 시작되었으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현재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1377년에 인쇄되었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상정예문詳定禮文》을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직지심체요절》이전에 이미 금속활자를 사용한 출판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활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복자가 새겨진 활자’와 함께 고려시대 금속활자 기술의 선진성과 우수성을 보여 주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12. 신계사 향로,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신계사, 고려 1352년,
높이 45cm, 지름 44.5cm, 국보
사찰의 불단 앞에 놓여 향을 피우는 데 쓰였던 고려시대 고배형 은입사 향완의 하나로서 몸체와 대부, 전 등을 돌아가며 화려한 문양이 가득 장식되었다. 향완의 몸체에는 여의두문으로 두른 범자문을 4군데에 번갈아 가며 시문하였고, 그 외곽에도 연당초문을 빽빽이 돌아가며 시문하였다. 직선으로 뻗은 몸체 아래에는 굵고 든든한 대부가 달려 있는데, 바로 아래쪽에는 각이 진 방형의 연판(蓮瓣)을 굵은 은입사로 배치하고, 그 내부에는 중첩된 연판문과 꽃술을 장식하여 조금 번잡하게 꾸몄다. 대부 전면을 돌아가며 화려한 연당초문을 은입사 하였으며, 퍼진 짧은 다리에는 노부(爐部)와 동일한 연당초문(蓮唐草文)을 입사하였으나, 옆으로 굴곡을 이루며 전개되어 나갔고 그 크기도 조금 커졌다. 다시 하단부의 몰딩을 이룬 대부 받침에는 역시 노부 하부에 시문된 운문과 동일한 형태의 운문을 둥글게 돌아가며 은입사를 하였다. 향완의 받침 외연을 돌아가며 ‘ 至正十二年壬辰潤三月日’ 로 시작되는 발원문이 은입사로 기록되었다. 그 제작년대는 고려 1352년으로서, 일본 김용두 씨 소장의 1357년 (恭愍王 6년) 향완과 함께 고려 후기의 귀중한 편년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 은입사 : 청동이나 철, 구리 등 금속 그릇에 은실을 이용하여 문양을 넣는 세공 기법. 예리한 끌을 사용하여 그릇 표면에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으로 홈을 내고, 은실을 얇게 꼬거나 넓게 펴서 문양에 대고 두들기는 기법으로 완성되며 섬세한 끌질을 필수 요건으로 하므로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13. 선녀도, 김홍도(金弘道, 1745- ?), 18세기말-19세기초, 비단에 먹·담채(絹本墨筆淡彩), 19×13.2cm, 국보
이 작품은 김홍도만의 활달하고 거침없는 필치가 절제된 묵법 및 담채와 잘 어울려 감칠 맛 나는 회화미를 보여주는 득의작(得意作)이라고 할 수 있다. 화면 오른편 하단에 ‘단원’이라는 묵서와 ‘사능’이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있다. 선녀를 다룬 유사한 소재로는 〈생황을 부는 꼬마 신선仙童吹笙圖〉과 〈밤 피리 부는 신선仙人夜笛圖〉 등이 소개되었지만,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화경(畵境)은 그것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김홍도의 50대 이후 후기 양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화면의 인물은 영지선녀이다. 선녀는 오른편 어깨에 괭이를 맨 채 고개를 돌려 왼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등에 진 바구니에 벌써 영지가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영지를 다 캐고 내려오는 길의 한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후덕한 얼굴에 띄워진 부드러운 미소와 자애로운 눈길은 과연 신선만의 영지를 인간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던 선녀의 고운 마음씨가 그대로 드러나는 듯 하며, 얼굴에 바려진 미묘한 색조의 담채에는 인간을 사랑한 선녀의 애틋한 감정이 묻어나는 듯 하다.
14.붉은 매화, 양기훈(楊基薰, 1843~?), 19세기, 종이에 먹-담채(紙本墨筆淡彩), 134×289.5cm, 국보
석연(石然) 양기훈은 오원 장승업이 서울화단을 주도하던 시기에 평양화단을 이끌었는데, 묵매(墨梅)와 묵란(墨蘭)·영모(翎毛) 등을 잘 그렸으며, 특히 노안(蘆雁)을 많이 그렸는데, 병풍의 대작을 많이 남기고 있다. 이 작품은 10폭 병풍의 대작으로서 제8폭과 9폭에 제화시(題畵詩)와 자신의 관지(款識)가 있어서 양기훈이 그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깊은 밤 은은한 달빛을 맞으며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매화나무 위에서 졸고 있는 새 두 마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양기훈은 조희룡의 장육매화도(丈六梅花圖: 5m가까운 대형매화) 전통에서 비롯된 화려한 장식성과 조선 중기 이래의 ‘나무에서 조는 새(宿鳥圖)’ 전통에서 보이는 고요한 시적 운치를 절충하여 또 다른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빠르고 거친 필치에도 불구하고 단붓질[沒骨]과 붓날림[飛白]은 전혀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어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10폭 병풍의 장대한 화면에서 보이는 장식성과 서정성의 절묘한 결합은 당대 평양화단을 대표하는 양기훈의 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으로 생각된다.
* 민영환의 혈죽도 현장 기록화로 구국 투쟁을 촉구한 양기훈과 안중식. 을사조약의 파기를 고종 황제에게 항소하다가 최후의 항거로써 자결한 민영환. 반년 후 그의 거처에서 충절의 넋이 발현하듯이 푸른 대나무 네 줄기가 신비하게 솟아오른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명성 높던 화가 양기훈과 안중식이 그 혈죽 현장에 직접 가서 <민충정공 혈죽도>를 그린 사실이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 보도되었다. 두 화가의 혈죽도는 화가가 그림으로 기록함으로써 외세 침략과 망국의 위기를 고발하고 국민들에게 구국 투쟁을 촉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화가의 혈죽도는 전해지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