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택혼의 유례를 읽다 보니 이속이란 사람이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져 서핑을 해 자료를 짜집어보니...

연안 이씨 태자첨사공파 중 조선 초기의 대표 인물로는 계은 이귀령이 있다. 그는 이성계와 친교가 두터워 그의 건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올랐다. 뒤에 길주군 안무사, 동북면 병마절도사를 거쳐 태종 때 병조판서를 지내고 검교좌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이귀산은 경상,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귀산의 아들 이속은 태종이 잠저에 있을 때 가까운 친구였는데, 성격이 강직하여 태종이 그의 아들을 부마로 삼으려고 매파를 보내어 아들의 사주를 묻자 "짚신은 짚 날이 좋으니라(藁鞋藁經好和也- 고혜고경호화야)"고 거절하였는데, 그로 말미암아 화를 입기도 했다. 이속의 사양은 불공(不恭)-불충(不忠)-대역죄(大逆罪)-반역(叛逆)-횡역(橫逆)으로 발전하여 결국 그 아들 이근건과 함께 지방 관청 관노로 전락 되고, 전 가산을 적몰 당하였다. 집안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부자의 시신도 찾지 못하여 묘소도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그의 손자 인문이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억울함을 상소하여 설원 하였으나, 1981년에야 판교에 있는 증손 이곤의 정국공신(靖國功臣) 사패지에 부자의 단소를 설치하였다. 

대략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거 같다. 이속의 큰아버지랑 태조가 친구 사이고, 이속의 아버지도 태조의 녹을 먹었고, 이속이랑 태종은 친구 사이. 그런데 2차례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이 집권한 뒤 태종은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졌다. 태종은 자기의 지지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아버지와 막역한 집안의 제 친구를 포섭하고 싶었고, 이를 위해 후궁의 딸을 내세워 정략결혼을 하고자 했으나, 친구에게 팽 당해버린 것이다. 태종이 삐질만한 상황이기도 하고, 태종을 도와 난을 일으킨 사람들은 태조편을 드는 이속에게 본떼를 보여줘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을만 하다. 그런데 부자만 노비가 되어, 손자는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다는 게 재미있다. 그래도 조선조는 과거를 잘 보면 출세길이 열리는 사회였던 것일까, 아니면 태종이 친구를 벌하는 게 가슴이 아파 빠져나갈 구멍을 예비해둔 것일까.

한편 태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간택제도를 만들게 되고, 정략결혼에 유용하게 이용하였다. 태종은 외척의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후궁을 11명이나 두었고, 자녀가 12남 17녀, 즉 29명이나 되었으니 권력기반 다지기에 꽤나 좋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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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12-08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는 다 망가지지만 조선 초에는 아마 교육과 인사가 그래도 개방적이었던가 봐요. 공교육 기관인 서울의 사부학당과 지방의 향교에 양반뿐 아니라 평민의 자녀들도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하니까요.

진주 2005-12-08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2005-12-08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05-12-08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택혼이라 너무 싫을 것같아요

2005-12-09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