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지기 사정으로 일요일 저녁에서야 시골에 내려갔다.
이미 전이며 만두며 일거리가 파장한 뒤라 착한 동서들이 지청구를 안 해도 좌불안석이었다.
하여 설 당일에는 차례만 지나면 일어나도 된다는 애정남의 권고와 상관없이
저녁까지 다 먹고 치우고 한밤이 되어서야 출발했고 집에 오니 자정이 좀 넘은 시간이었는데...
물이 안 나왔다.
찬 물도... 더운 물도...
아뿔사... 동파구나...
얼른 관리실에 전화하니 자다 깬 당직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내일 아침에 교체해주겠단다.
할 수 없이 씻지도 못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부터 집밖이 어수선했다.
천근만근같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현관문을 빼꼼히 열어보니 집밖이 물바다이고,
8층까지 물이 흘렀다는 신고를 받고 경비아저씨가 계량기 물을 잠그고
그새 얼어버린 복도를 청소하고 계셨다.
옆지기는 옷을 껴입고 나와 복도청소를 도왔고, 나는 관리실에 전화해 이 사실을 알렸다.
어제의 당직자는 이미 퇴근하고 없고 연휴에 출근한 다른 당직자는 전화기로 잔소리했다.
보온처리를 제대로 안 해놔 동파 된 거다, 동파됐으면 바로 밸브를 잠궈야 한다 등등.
한참이나 반말 섞어가며 싫은 소리를 늘어놓더니 부품 챙겨 올라오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30분이 더 지나 직원이 올라오는데 많이 봐야 20대 후반? 솔직히 얼굴 보고 좀 울컥했다.
그런데 경비아저씨가 물을 잠그느라 빼놓은 헌 옷가지 꾸러미를 보고도 아무 소리 안 하고,
전기보온커버 해놓은 거 보고도 아무 소리 안 하는 거다.
전기보온커버는 개인선택사항이라 희망자만 사비 내고 관리실에 신청하면
관리실에서 공사를 한 뒤 공사한 사람만 정기점검 해주는 항목이다.
알고 보니 설 전에 정기점검을 했어야 하는데 관리실에서 이를 빼먹었고,
하필 운이 없게 우리집 전기보온커버 전원 부분이 그새 고장났다는 얘기.
이쯤되면 아까의 비아냥에 대해 슬쩍 미안한 내색을 할 법도 한데 아무 소리 안 하는 게 얄미워,
내가 한 말은 '어제 당직자가 밸브 잠궈야 한다는 걸 알려줬으면 했을 거에요.
일단 그냥 놔두고 내일 아침에 다시 전화하라는 소리 밖에 안 하셨어요.'하는 게 고작.
10층부터 8층까지 청소하며 이웃주민들에게 미안하다 계속 사과하고,
이유야 어쨌건 계량기며 보온커버 값까지 우리가 다 물어야 했고,
생뚱맞게 고생한 경비아저씨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수고비를 드리려고 보니
애들 받은 새뱃돈까지 슬쩍 써야 하는 지경이었다.
연신 내가 뚱해있자 옆지기는 정초부터 좋은 일에 기부한 셈 치고 잊자 달래주니
나는 정초 액땜으로 치고 알라딘에 궁싯거리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