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봄, 새내기인 나에게 대학은 아직 낯설었다.
난 OT때 이미 선배들에게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꼴통으로 찍혔고,
개학하자 과동아리중 '사회과학학회'에 들어갔는데, 선배들은 괴롭겠다며 뒤로 혀를 찼다 했다.
'스스로를 비둘기라고 믿는 까치에게'나 '역사란 무엇인가'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권의 신탁 반탁 논쟁에서 그야말로 제대로 충돌했다.
책도, 선배들도 못 믿겠다고 선언한 나는 그 후 학회에 나가는 대신
도서관에 살며, 각종 관련 도서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 때의 난 좀 외롭고, 약간 두렵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때 딱히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지 못했던 난,
성년의 초입에서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게 그저 어색하고 버거웠다.
그리고 그 무렵 본 영화가 '젊은 날의 초상'이었다.
이문열의 소설을 읽은 뒤라 줄거리야 빤했지만, 책보다도 영화가 더 깊게 다가왔다.
눈밭을 헤매는 정보석의 절망에 난 마냥 몰입했고,
정보석을 따라다니며 어색한 연애수작과 밑바닥의 인간애를 보여줬던 배종옥에게 열광했다.
내가 이 영화를 통해 배종옥을 좋아하게 된 건 진짜 굉장한 사건이다.
난 지금도 연기 못 하는 배우 못지 않게 목소리 나쁜 배우를 싫어하고,
배종옥의 목소리는 지금도 내가 정말 싫어하는 목소리다.
게다가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난 배종옥이 못 생기기까지 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배우 배종옥이 좋아졌다는 건 그녀가 정말 특별한 여배우라는 거고,
그만큼 '젊은 날의 초상'이 내 아픈 곳을 두드려준 영화라는 거다.
그렇게 곽지균 감독의 청춘영화와 함께 나의 스물을 시작했건만,
그의 후속영화는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이제서야 그게 참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