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기다렸어요
헬렌 런 지음, 안나 피그나타로 그림, 서희주 옮김 / 크레용하우스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마로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해람이를 개인탁아 대신 어린이집에 맡기면서부터, 퇴근시간은 그야말로 일분일초를 다투는 전쟁이 되었다. 마로가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는 건 7시~7시 10분 사이. 해람이를 그전에 찾으려면 늦어도 6시 50분에는 어린이집에 가야 하고, 그러려면 아무리 늦어도 6시 40분에는 이미 집에 가는 버스를 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개 회사원이 제 뜻대로 퇴근시간을 조절할 수 있으랴. 집 앞에서 마로를 만나 같이 해람이를 데리러 가는 게 일반인데, 그나마도 못 맞춰 집 앞에서 울고 있는 마로를 발견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히 고마운 이웃이 있어 내가 늦을 때면 마로를 챙겨주곤 하지만, 신세 지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번번히 고개 조아리며 감사할 때마다 민망해진다. 더군다나 그 이웃이 저녁 외출이라도 하면 마로 신세가 정말 처량해진다.

결국 큰 맘을 먹고 마로에게 현관문 열쇠 여는 법을 가르쳐줬고, 비밀장소에 열쇠를 숨기고 비밀의 중요성을 신신당부했다. 이제는 내가 늦을 때면 저 혼자 문 열고 들어와 책을 보거나, 가방만 내려놓고 이웃집에 놀러가거나 하는데, 뒤늦게 헐레벌떡 내가 나타나면 마로가 늘 하는 말, "아이 참, 엄마, 오늘도 걱정했잖아."

마로도 책 속의 아이처럼 뚱뚱한 걱정, 삐쩍 마른 걱정, 조그만 걱정, 키가 큰 걱정, 게다가 그 가운데 있는 불안에까지 시달린게다. 약속한 시간에 안 나타나는 엄마를 기다리며 걱정과 불안에 휩싸이지만, 엄마를 위해, 자신을 위해, 열심히 열심히 걱정과 불안에 맞서 싸우는 아이의 모습을 너무나 환상적으로,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책. 덕분에 책을 읽어주며 무지하게 가슴 아프고 무지하게 반성도 했지만. "아이 참, 엄마, 오늘도 걱정했잖아"라는 말이 아이 입에서 다시는 안 나오게 하겠다고 장담할 수 없어 슬프다. 젠장, 젠장할, 슬프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코죠 2007-10-16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엄마가 일 하러 나가면 빈 방에서 혼자 책을 보며 놀았는데요. 파티쿠커 옆에 참라면 한 개가 나의 저녁이었는데요. 문제는 밤이 되어도 형광등 줄은 저 높이 있어 키 작은 나는 불을 켤 수 없었던 거예요. 점점 방 안이 컴컴해지면 나는 무서워서 이불 속에 들어가 쿨쿨 울곤 했어요.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들려올 때까지 소리죽여 흐느꼈어요.

결국 엄마가 돌아오면 너무나 미안해 하며 나를 꽉 안아줬어요. 사실 울 엄마는 애정 표현에 박하고 별로 사랑스런 말이나 행동을 안 해주는 쌀쌀맞은 엄마였는데 그때만큼은 날 무척 귀해하는 것 같았지요. 그래서 비밀 한 가지. 사실 줄이 손에 닿을 정도로 키가 컸을 때에도 나는 불을 켜지 않고 어두운 방에서 뒹굴렀답니다.

이 리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어쩌면 엄마는 내 비밀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역시 모른 척 해주었는지도 모른다고.

사실은 그렇습니다.
엄마가 나를 걱정하며 달려오는 동안
나도 엄마를 걱정하고 있었답니다.

조선인 2007-10-16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즈마님, 엄마와 딸은 정말 근사한 사이죠? 먼훗날 마로가 오즈마님처럼 기억해주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하늘바람 2007-10-16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 마로랑함께 울것같네요. 참ㅠㅠ. 조선인님 많이 속상하시죠. 마로가 안됐고 조선인님도 남의일같지 않아 안타까워요. 집이 가까우면 제가 다 챙겨주고파요. 저도 태은이가 크면서 회사를 다녀야할텐데 생각하는데 가끔 조선인님 이렇게 올라오는 페이퍼 읽으면 자꾸 망설여집니다. 또 태은이가 낯을 심하게 가려서 아무한테도 안가서 불가능도 하겠지만.

2007-10-16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07-10-16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오즈마님의 댓글은 정말 멋지네요. 마로는 훨씬 더 멋지게 엄마를 기억할거예요

조선인 2007-10-16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낯가림이 심한 아이일수록 자주 데리고 마실을 다녀야 해요. 아시죠?
속닥님, 님의 충고 깊이 안겠습니다.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사랑해주고. 네, 그러겠습니다.
하늘바람님, 히히 댓글에도 추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니깐요. 그죠?

프레이야 2007-10-20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짠해져요. 그래도 충분히 넉넉하게 잘 자라고 있는 중이라고 믿습니다.
마로도 해람이도요. 엄마의 그런 마음이 어떻게든 아이에게 전달되기 마련이거든요.
문득, 이태준의 '엄마마중'이 생각나요. 아이의 고 발그레한 두 볼이요.^^

조선인 2007-11-01 0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그 그림책도 참 짠하죠. 흑.

플라스틱 트리 2007-12-17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랬나봐요.
저도 마음이 짠했습니다.
다늙어서 아이들 동화를 다시 보게 되었네요. 하지만 아이들 동화가 그 어떤 이야기보다 솔직하다는 것을 요즘 새삼 느낌니다.

조선인 2007-12-1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뵙네요. 플라스틱 트리님.
아, 동명이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