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에서는? (창34:32-33)
“에서는, 마흔 살이 되는 해에, 헷 사람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사람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았다. 이 두 여자가 나중에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거리가 된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을 풀어가면서 다음과 같은 영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1) 왜 에서는 마흔 살이 되어서야 결혼을 했을까?
오늘날로 따져도 혼기가 지난 나이일 뿐더러, 옛날에는 훨씬 더 어릴 때 결혼했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로 의문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더 의문스러운 것은 에서의 아버지 이삭도 마흔 살에 결혼했다는 점이다(창25:20). 왜 그들은 통념을 깨고 마흔이 되어서야 결혼을 했을까?
그 의문은 창 24장에서 밝혀진다.
“나는 네가,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두고서 맹세하기를 바란다. 너는 나의 아들의 아내가 될 여인을,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가나안 사람의 딸들에게서 찾지 말고, 나의 고향, 나의 친척이 사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나의 아들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찾겠다고 나에게 맹세하여라.” 창24:3-4.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이 혼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기를 원치 않았다. 물론 영적 순결을 지키기 원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마흔 살이 되어서야 결혼을 했던 이삭도, 자기 자식들이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에서 역시 혼기를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 순결을 지키고자 했던 아버지의 뜻을 좇았던 아버지 이삭과 달리, 에서는 대의명분을 버리고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을 한다.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릴 정도로 영적 계보를 잇는 일의 중요성을 간과했던 에서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신약성경은 이런 에서를 ‘속된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또 음행하는 자나, 음식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에서와 같은 속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히12:16.
2) 왜 에서는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을 했을까?
기다릴 수 없어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보다 “그것이 더 쉬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으로 영적 계보를 이어야 할 여인을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데 믿음만 가지고 기다린다는 것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장 쉬운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무엇인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을 본 적도 없고, 천국을 본 적도 없고, 심지어 십자가를 본 적도 없지만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약속해 주셨기에 믿고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영적 혈통에 관한 약속을 주셨고, 그 후손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해주셨다. 그 약속을 에서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당장 쉬운 길을 택해버린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마 7:13-14.
결국 삶은 선택이다. 어떤 선택을 하며 사는지가 그 사람의 영성과 인격을 반증한다. 우리 앞에는 항상 좁은 문과 넓은 문이 놓여 있다. 좁은 문이 바른 길이라면, 넓은 문은 쉬운 길이다. 우리는 항상 쉬운 길, 남아 다 가는 길을 선택하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바른 길, 남아 가지 않아도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3) 왜 에서는 일부다처제를 했을까?
“라멕은 두 아내와 함께 살았다.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이고, 또 한 아내의 이름은 씰라이다.” 창4:19.
하나님을 반역한 가인의 후손 라멕은 최초의 일부다처제를 시행했다. 분명한 죄였고, 하나님을 떠난 역사의 시작이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 창4:23-24.
이 구절은 라멕이 어떤 사람인지 명백히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반역의 문화의 선구자였다. 일부다처제와 살인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가인을 빗대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신을 높이는 교만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이다.
문제는 라멕의 만행이 하나님을 모르는 가나인인들의 문화의 주류가 되었다는 점이다. 가나안인들은 일부다처제와 복수와 약탈과 살인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속된 사람이었던 에서 역시 이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속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았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달리 에서는 자연스럽게 그 문화에 동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훗날 또 다른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자그만치 세 사람의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았던 것을 생각하면 에서가 가나안 문화에 얼마나 동화되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창28:9).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속된 세상에서 살지만 그 안에서 분명한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역사 속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싸움을 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산 사람보다, 적당히 타협하며 산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오늘날도 너무 많은 에서가 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롬12:2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약1:27.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이 시대의 풍조(trend)를 본받지 말라, 이 속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에서가 되어버리는가? 얼마나 쉽게 세속과 타협해 버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