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려움과 걱정이 몰려올 때(창32:7-13)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날 일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선물과 함께 전령을 보내 형을 달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전령들은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자신을 치러 온다는 무시무시한 소식을 전하였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공포와 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성경은 야곱이 너무나 두렵고 걱정이 되었다고 보고한다(7).

이렇게 두려움과 걱정이 몰려올 때 야곱은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이미 여러 굴곡을 넘어 견고한 신앙을 얻은 야곱은 예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우선 야곱은 비상조치를 취한다(7-8). 자기의 무리를 두 떼로 나눈 것이다.

그 후 전쟁준비를 하거나, 원군을 요청하거나, 전략을 짜기에 앞서 기도를 드렸다(9). 특히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한다. 은혜를 베풀기로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한다(9-12). 아마도 밤을 세워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린 듯하다(13).

비상조치와 기도가 끝나자 야곱은 전략을 세운다(13-21). 자기의 무리를 몇 떼로 나누고 선물을 준비하여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형의 분노가 풀리면 만나고자 자신의 무리는 최후방에 배치하였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장정들을 뽑아서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시오.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산꼭대기에 서 있겠소." 출17:9


야곱의 반응은 아말렉 군대와의 전투를 준비하던 모세의 자세와 비슷하다. 모세는 전쟁을 준비하는 일과,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는 일을 병행했던 것이다.

전쟁에 맞닥뜨릴 때, 두려움과 걱정이 몰려올 때, 비상조치와 기도와 전략 모두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도 싫어하시지만, 기도만 하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도 싫어하신다. 기도하고 믿고 생각하고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여야 한다.


2. 제자를 부르신 이유(막3:14-19)

주님께서는 밤새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을 뽑으셨다(눅6:12-16). 그분께는 제자들을 뽑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명명하셨다. “너희는 내가 보낸 자들이다”라는 의미를 담아 주신 것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또한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막3:14-15.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권능을 가지게 하시려고 부르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배우고, 닮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것의 삶의 목적이자 꿈이며 존재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권능의 사람(powerful man)이 되어야 한다. 죄와 사탄과 악한 문화와 부조리에 맞서야 한다. 아울러 영성과 인격과 실력에 있어 능력을 날마다 배양해야 한다. 끊임없이 성장해가야 한다.


3. 덧붙여주신 이름(막3:16-17)

예수님이 시몬에게는 ‘반석’이라는 의미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천둥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덧붙여 주셨다. 아마도 베드로에게서 미래의 교회의 반석이 될 장래성을 보고 비전을 주기 위해 그 이름을 주셨을 것이고, 야고보와 요한은 워낙 다혈질이고 폭발적이기에 그 이름을 주셨을 것이다. 주님이 덧붙여주신 이름처럼 시몬 베드로는 반석 같은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한 때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지만 최초의 설교자가 되어 삼천 명을 제자로 삼고, 최초의 교회를 주도적으로 세워 나갔으며, 훗날에는 장로가 되어 교회와 형제자매들을 돌보고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하기도 했다. 야고보와 요한 역시 주님이 덧붙여주신 이름처럼 성질이 급하고 폭발적이었고 다혈질적이었다(눅9:54-56). 그러나 급하고 불같은 성격은 방향만 잘 잡으면 엄청난 열정으로 바뀔 수 있었다. 야고보는 이 불같은 성격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으로 승화시켰고, 가장 눈에 띄는 전도자가 되어 헤롯을 불편케 한 듯하다. 결국 야고보는 사도들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행12:2). 열정을 불태우고 간 것이다.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와 열혈당원 시몬과, 예수를 넘겨준 가룟 유다이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나에게 주님은 어떤 이름을 덧붙여주실까? 아니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어떤 이름이 덧붙여질 수 있을까? 반석과 열정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덧붙일 수 있을까? 아니면 시몬이나 가룟 유다처럼 열혈당원이나, 예수를 넘겨준 사람이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이 덧붙여질 수 있을까? 내 남은 삶이 덧붙여질 이름을 결정할 것이다.


4. 소문(막3:8-10, 21-22)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병들고 약하고 가난한 민중들은 예수를 만나면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다(8-10).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같은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소문을 냈다(21-22).

예수님은 치유자, 다윗의 후손, 이스라엘의 해방자라는 소문도 들었고, 미친 사람, 귀신 들린 사람, 반역자라는 소문도 들어야했다. 어느 쪽이 맞는가?

소문은 진실이 아니다. 소문은 어떤 형태로든 퍼져나갈 수 있다. 소문에 민감해서는 신실한 사역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면, 기대이하의 소문과 평판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평가에도 그 평가에 흔들리거나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만일 높은 평가에 반응한다면 교만해질 위험이 있고, 낮은 평가에 반응한다면 자존감과 용기를 상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말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분의 귀를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듣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하십시오.”

위와 같은 찰스 스펄젼의 말을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다. 소문은 진짜 내가 아니다. 소문에 귀를 막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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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에서는? (창34:32-33)

 

“에서는, 마흔 살이 되는 해에, 헷 사람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사람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았다. 이 두 여자가 나중에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거리가 된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을 풀어가면서 다음과 같은 영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1) 왜 에서는 마흔 살이 되어서야 결혼을 했을까?

오늘날로 따져도 혼기가 지난 나이일 뿐더러, 옛날에는 훨씬 더 어릴 때 결혼했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로 의문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더 의문스러운 것은 에서의 아버지 이삭도 마흔 살에 결혼했다는 점이다(창25:20). 왜 그들은 통념을 깨고 마흔이 되어서야 결혼을 했을까?

그 의문은 창 24장에서 밝혀진다.


 “나는 네가,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두고서 맹세하기를 바란다. 너는 나의 아들의 아내가 될 여인을,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가나안 사람의 딸들에게서 찾지 말고, 나의 고향, 나의 친척이 사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나의 아들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찾겠다고 나에게 맹세하여라.” 창24:3-4.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이 혼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기를 원치 않았다. 물론 영적 순결을 지키기 원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마흔 살이 되어서야 결혼을 했던 이삭도, 자기 자식들이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에서 역시 혼기를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 순결을 지키고자 했던 아버지의 뜻을 좇았던 아버지 이삭과 달리, 에서는 대의명분을 버리고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을 한다.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릴 정도로 영적 계보를 잇는 일의 중요성을 간과했던 에서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신약성경은 이런 에서를 ‘속된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또 음행하는 자나, 음식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에서와 같은 속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히12:16.


2) 왜 에서는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을 했을까?

기다릴 수 없어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보다 “그것이 더 쉬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으로 영적 계보를 이어야 할 여인을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데 믿음만 가지고 기다린다는 것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장 쉬운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무엇인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을 본 적도 없고, 천국을 본 적도 없고, 심지어 십자가를 본 적도 없지만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약속해 주셨기에 믿고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영적 혈통에 관한 약속을 주셨고, 그 후손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해주셨다. 그 약속을 에서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당장 쉬운 길을 택해버린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마 7:13-14.

 

결국 삶은 선택이다. 어떤 선택을 하며 사는지가 그 사람의 영성과 인격을 반증한다. 우리 앞에는 항상 좁은 문과 넓은 문이 놓여 있다. 좁은 문이 바른 길이라면, 넓은 문은 쉬운 길이다. 우리는 항상 쉬운 길, 남아 다 가는 길을 선택하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바른 길, 남아 가지 않아도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3) 왜 에서는 일부다처제를 했을까?

“라멕은 두 아내와 함께 살았다.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이고, 또 한 아내의 이름은 씰라이다.” 창4:19.

 

하나님을 반역한 가인의 후손 라멕은 최초의 일부다처제를 시행했다. 분명한 죄였고, 하나님을 떠난 역사의 시작이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 창4:23-24.


이 구절은 라멕이 어떤 사람인지 명백히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반역의 문화의 선구자였다. 일부다처제와 살인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가인을 빗대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신을 높이는 교만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이다.

문제는 라멕의 만행이 하나님을 모르는 가나인인들의 문화의 주류가 되었다는 점이다. 가나안인들은 일부다처제와 복수와 약탈과 살인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속된 사람이었던 에서 역시 이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속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았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달리 에서는 자연스럽게 그 문화에 동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훗날 또 다른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자그만치 세 사람의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았던 것을 생각하면 에서가 가나안 문화에 얼마나 동화되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창28:9).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속된 세상에서 살지만 그 안에서 분명한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역사 속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싸움을 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산 사람보다, 적당히 타협하며 산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오늘날도 너무 많은 에서가 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롬12:2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약1:27.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이 시대의 풍조(trend)를 본받지 말라, 이 속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에서가 되어버리는가? 얼마나 쉽게 세속과 타협해 버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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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 후에 주어지는 비전(창26:24-25; 창13:14-18)

 

  이삭이 그랄 땅에서 부자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기 시작하였다(26:14). 그리하여 이삭의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워버렸다. 분통이 터질 일이지만 이삭은 그 곳을 떠나 그랄 평원에 장막을 치고 새로운 우물을 팠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블레셋인들은 우물을 파는 족족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온다. 그 때마다 이삭은 우물을 양보하고 다시 새로운 우물을 판다. 이삭은 그야말로‘우물 파는자-양보하는 자’였다. 그가 엄청난 이권을 가진 우물을 계속 양보하고 다시 새로운 우물을 팔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에 다투지 않고 계속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날 밤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나의 종 아브라함을 보아서, 너에게 복을 주고, 너의 자손의 수를 불어나게 하겠다."” 창26:24


이삭이 우물을 양보한 후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다. 하나님은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비전(약속)을 주신다.


아브라함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재산이 늘어나자 조카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그 때 성숙한 아브라함은 롯을 불러 어떻게든 다툼을 피해야 할 것을 부탁하며, 땅의 선택권을 양보한다(13:8-9). 결국 롯은 좋은 땅인 요단 평지를 택하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머무르게 된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런 양보를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더군다나 이방인들이 보고 있는데 서로 다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행동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창13:14-15.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간 뒤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비전(약속)을 주신다.


이삭이 우물을 양보한 후에, 아브라함이 땅의 선택권을 양보한 후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위로와 격려와 비전(약속)을 주신다. 믿음을 지키고, 말씀에 순종하고, 다투지 않고, 양보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비전을 주신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결정대로 움직여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낼 수가 없다. 미성숙의 특징은 활동적(active)이라는 것이다. 도무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못하고, 양보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판단과 정의감과 경험에 의거해서 활동해버리는 것이다. 우물을 막는 자를 대적하는 것, 위계대로 조카를 밀어내고 자신이 선택권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생각지 않고,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만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이삭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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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 - 다시 읽는 막심 고리키
막심 고리키 지음, 안의정 옮김 / 맑은소리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선생에 관하여

  " 선생이란 작자들은 하나같이 그 모양이라니까. 우리보고는 늘 적게 먹으라고 가르치면서 저희들은 하루에도 열 번씩 쳐먹어 대거든 ".

 

  여자에 관하여

  " 입으로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자네를 사랑하다고 종알거리지. 그러나 자네가 바늘 끝으로 여자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녀는 자네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 버릴거야 ".

 

   아름다움에 관하여

  " 랏다에 대해선 뭐라고 이루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구만. 혹 바이얼린을 제 영혼처럼 잘 아는 이가 있다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연주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귀족에 대하여

  " 키우던 돼지새끼에서부터 자기 양심까지 닥치는 대로 팔아먹는 건 당신네 귀족들이나 하는 짓이지! "

 

  노인에 대하여

  " 그는 늙었으나 여전히 억세고 강인한 힘을 자랑하는 한 그루의 떡갈나무처럼 보였다 ".

 

  대중에 대하여

  " 어련하겠나? 러시아 사람들이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늙은이가 다 되어 태어나는걸. 하나같이 악마처럼 음험하지......"

 

  거짓말-혀에 대하여

  " 무얼 그리 툴툴거렸을까? 그들이 하도 거짓말을 잘 하니까, 신이 그렇게 고약한 혀를 내려 준 모양이야 ".

 

  삶에 대하여

  " 요즘 사람들은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삶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야. 나는 흉내를 내는 데 한평생을 써 버리고 마는 사람들을 숱하게 보아 왔지. 흉내나 내면서 하루하루를 허송하다가,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은 팔자를 원망하기 시작하지 ".

 

  행함에 대하여

  " 생각만으로는 길가의 돌멩이 하나 움직이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

 

  노동에 대하여

  " 모든 건 흙이란다. 그리고 흙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죽어가게 마련이지.......그러므로 사람은 노동과 겸손으로 살아가야 하는거야 ".

 

  간절함에 대하여

  " 도와주십시오, 나리들!

  그것은 망가진 바이얼린의 제일 굵은 현에서부터 가는 현까지를 손바닥으로 긁어내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

 

  빗소리에 관하여

  " 굵은 빗방울이 대지에 떨어지는 소리는 무언가를 예언하듯 신비롭게 들렸다 ".

 

 

  고리키의 단편소설집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읽고 오랫동안 가슴에 울림이 남아 발췌해 보았습니다. 고리키가 성취해 낸 수일한 이미지들과 도저한 언어의 배열은 두고 두고 영감을 줄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곱씹어 읽어보면 폐부에 와 닿을 것 같은 보편성이 있기에 설명 없이 올려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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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여는 힘 - 두드리면 열린다
로버트 슐러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잠언의 말씀처럼 묵시가 없으면 방자히 행할 수밖에 없다.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은 현재를 신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수 없다. 로버트 슐러 목사의 견해대로라면 인생은 가능성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특히 그리스도인인 젊은이는 긍정적 사고를 넘어 가능성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중학교 다닐 때  로버트 슐러의 책을 처음 읽었던 듯 하다. 그 때의 느낌이 가물가물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가슴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난다.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의 글을 읽었다. 아직도 그에게 그런 열정이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하다. 여전히 그의 주장은 간결하고 힘이 있다. 그가 겪어온 많은 경험과, 그가 만나고 알아왔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아 있어 그의 주장은 한결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책을 쓴 것 같지는 않다.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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