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울 1
월터 왕게린 지음, 김학도 옮김 / 살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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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책의 가치를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말았다. 900쪽에 달하는 책을 읽는 데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했다. 책의 내용이 워낙 훌륭해 끝까지 견디며 읽을 수 있었지만, 번역의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신학자들이 문학을 번역하는 것은 반칙이며, 폭력이다.

소설이지만 성경의 배경과 인물이 너무 생생하게 재생되어 있어서 성경을 보는 눈이 많이 열릴 수 있을 듯하다. 특히 율법에서 해방된 바울의 자유 분방함이 인상적이었다. 성경에서 느껴지는 진지함과 열정을 넘어 바울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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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
레기네 슈나이더 지음, 조원규 옮김 / 여성신문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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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새로운 소박함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던 구판을 가지고 독서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흥미있게 읽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많이 얻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정신 없이 살다보니 '소박함의 가치'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버린 듯하다. 다행히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 별 노력하지 않아도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참에 아내에게도 이 책을 읽힐겸 다시 구입하여 읽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느낌은 변함이 없다. 소비를 억제하고 신중하게 돈을 쓴다고 해서 생활의 질이 떨어지는것은 아니다.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벌고, 과시하기 위해 소비하는 악순환은 지성인의 삶이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소비는 인격의 표현이다. 신분과시를 위해 소비를 쉬지 않는 어리석음보다, 내면의 가치, 즉 가족의 가치, 휴식의 가치, 우정과 사랑의 가치 등에 더 무게를 두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 저자가 가르쳐주는 단순함, 적은 것에 대한 선호, 순수함을 즐길 수 있을 때 삶의 질은 훨씬 더 향상될 것이다. 물질지향적 삶보다 가치지향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문화가 침체되는것은 사회의 심장에 피로가 쌓였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소비, 무분별한 섹스, 너무나 많은 새로운 것들, 엽기적인 사건들이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소박함이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스스로 선을 긋는 능력이다. 한계에 도달한 경쟁사회에서 마치 수레바퀴 속의 햄스터처럼 기능하는 대신에 자신의 삶과 소비에 의식적으로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해내는 것이다. 지금 이것들을 사들인다고 정말 행복해질 것인가 하고 자문해보는 것이다. 그 대가로 주어지는 것은 내적인 자유, 홀가분함, 근심과 생활에 대한 불안으로부터의 해방, 어쩌면 행복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저자의 말에 동의하는가? 이제 용기가 발휘되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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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들
김영현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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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장편소설을 이렇게 한 번에 다 읽어버리기는 오랜만의 일이다. 그만큼 줄거리 전개가 흥미진진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슬펐다. 결국 이 책은 재미있게 슬픈 책이 되고 말았다.

이야기는 추리소설처럼 긴장과 호기심 유발로 시작되지만, 사랑을 갈구하며 파괴되어가는 인간성의  절규로  마무리된다. 가족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서로는 서로에게 너무 낯선 사람들이었고, 서로를 향한 증오는 극한에 달해 있었다. 결국 살인과 누명과 고통의 몸부림으로 서로를 해하게 되지만, 그 증오의 발단은 사랑의 갈구였다.

나는 김영현을 참여문학을 하는 진보적 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을 이해하는, 특히 아픔을 이해하는 깊이가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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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행복이 커지는 가족의 심리학 토니 험프리스 박사의 심리학 시리즈 1
토니 험프리스 지음, 윤영삼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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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모는 자기 아이를 사랑한다.

모든 아이는 자기 부모를 사랑한다.                                                                                                                             

하지만, 모든 가족이 행복하지는 않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한다. 이 책은 그 답을 찾아가는 출발점에 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한계는 대부분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가족의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자신이 자란 환경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무엇보다 심리적 각성이 필요한데, 일단 건강한 가족을 만드는 조건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변화될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심리적 각성을 위한 책이다. 건강한 가족을 만드는 조건이  무엇인지 쉽고 자세하게 안내해준다. 무엇보다 내가 얻은 큰 수확은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멈추어서 '나와 내 가족'을 생각했다. 때로는 두려웠고, 때로는 슬펐고, 때로는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 외에도 건강한 가족을 이루어가기 위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 역시 큰 수확이다. 가족이 존재하는 목적은 가족 개개인이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도록 비옥한 토양이 되어주는 것이며, 가족이라는 관계의 토양 위에서 자아, 독립성, 생산성을 분명히 자각할 수있도록 일깨워주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십분 동의한다.

"이 책은 가족에 대해 말하자면, 가족의 건축가인 부모에 우선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굳이 부모가 아니라도 가족역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특히 결혼을 앞둔 이들,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가족을 형성하는 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깊은 통찰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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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8, 눅 1:39-80, 욥14, 고전2장을 읽다.


1. 하나님이 주어인 인생

(창 39:2)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길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 요셉은 그 주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창 39:9) 『이 집안에서는, 나의 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의 주인께서 나의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마님입니다. 마님은 주인 어른의 부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런 나쁜 일을 저질러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창 40: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가 꿈을 꾸었는데, 해몽할 사람이 없어서 그러네."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해몽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나에게 말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창 41: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기뻐하실 대답은, 하나님이 해주실 것입니다."』


(창 41:28) 『이제, 제가 임금님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임금님께서 앞으로 하셔야 할 일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창 41:51-52) 『[51] 요셉은 "하나님이 나의 온갖 고난과 아버지 집 생각을 다 잊어버리게 하셨다" 하면서, 맏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다. / ㉢'잊게 하다' [52] 둘째는 "내가 고생하던 이 땅에서, 하나님이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셨다" 하면서, 그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지었다. / ㉣'갑절로 열매를 맺다'』


(창 45:5-8) 『[5]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6] 이 땅에 흉년이 든 지 이태가 됩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합니다. [7]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8]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창 48:9) 『요셉이 자기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이 아이들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자식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말하였다. "아이들을 나에게로 가까이 데리고 오너라. 내가 아이들에게 축복하겠다."』


인생을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내 인생의 주어는 누구일까? 나 아니면 하나님? 만일 다른 사람이 주어라면 더 비참할 것이다.

내가 주어인 사람은 자기가 판단하고 계획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책임지기 힘들 때는 낙담할 것이고, 뭔가 잘 된다고 생각할 때는 교만해질 것이다.

남이 주어인 사람은 남에게 이끌려 다니는 인생을 살다가 허탈감으로 시달릴 것이다. 부모에게, 실연당한 애인에게, 친구에게 이끌려 다니는 인생은 얼마나 허무하고 허탈한가.

반면에 하나님이 주어인 사람은 겸손하게 자기를 인정할 줄 알고, 일이 잘 되어도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어려움이 닥쳐와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

요셉의 인생은 철저히 하나님이 주어였다. 그의 모든 고백을 들어보라. 자기를 노예로, 죄수로, 총리로 삼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꿈을 해몽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분도 하나님이시고, 명예와 돈과 자식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다. 그러기에 어떤 현실이든 받아들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죄를 짓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생의 주어로 삼은 사람을 사용하신다.

요셉은 어떻게 이토록 강한 확신으로 일평생 하나님을 인생의 주어로 삼을 수 있었을까?


첫째, 그는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한 경험이 있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고 노예로 팔려왔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구덩이 감옥에 갇혔다(40:15). 억울함과 배신감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외로움과 막막함으로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나 그는 이 고통스런 시간을 믿음으로 극복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어였기 때문에 모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모든 상황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구덩이에 빠져 본 경험이 큰 사람을 만든다. 슬픔과 고통과 단절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키울 수 있다. 더 큰 시야와 더 깊은 판단력을 가질 수 있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보다 들판에서 자란 잡초가 더 강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고난의 경험은 훗날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로 리더십을 발휘하는 초석이 된다. 그는 모든 고통의 순간에고 하나님을 믿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자기 일에 임했다. 그 결과 보디발에게 인정받고, 감옥 간수장에게 인정받고, 시종장들에게 인정받고, 급기야는 바로에게 인정을 받아 등용된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


둘째, 그는 믿음으로 유혹을 극복한 경험이 있었다.

요셉의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사탄이 그것을 노렸다. 보디발의 아내가 먼저 접근했고, 요셉을 유혹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고 요셉은 자기의 외로움을 달래줄 아름다운 여자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 믿음을 발휘해 그 유혹을 뿌리친다. 자기 인생의 주어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한 神前信仰의 소유자였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이는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이 의회원들을 주목하고 말하였다. "㉠동포 여러분, 나는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행 23:1.


유혹에 번번이 넘어지는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다. 예전엔 감당할 수 없었던 유혹도 시간이 갈수록 수월하게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예전처럼 문제를 해결하고 유혹에 굴복하기를 반복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다가도 유혹이 닥치면 유혹을 따라가고 만다. 문제는 그 유혹이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혹을 따라가는 것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결국 영적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 그러나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좁은 문을 택하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마6:33).


세째, 그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지속적으로 경험했다.

(창 39:2,5,23) 『[2]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길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 요셉은 그 주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안 일과 그 모든 재산을 맡겨서 관리하게 한 그 때부터, 주님께서 요셉을 보시고,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복이, 주인의 집 안에 있는 것이든지, 밭에 있는 것이든지, 그 주인이 가진 모든 것에 미쳤다. [23] 간수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것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 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극심한 외로움과 고통과 유혹 속에서도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었다. 배신과 증오와 억울함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의 신앙이었다.


(창 40:14-15) 『[14] 시종장께서 잘 되시는 날에, 나를 기억하여 주시고, 나를 따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나의 사정을 말씀드려서, 나도 이 감옥에서 풀려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15] 나는 히브리 사람이 사는 땅에서 강제로 끌려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내가 이런 구덩이 감옥에 들어올 만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창 40:23) 『그러나 술잔을 올리는 시종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는 요셉을 잊고 있었다.』


(창 41:1) 『그로부터 만 이 년이 지나서, 바로가 꿈을 꾸었다. 그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창 41:9) 『그 때에 술잔을 올리는 시종장이 바로에게 말하였다. "제가 꼭 했어야 할 일을 못한 것이 오늘에야 생각납니다.』


(창 45:5-8) 『[5]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6] 이 땅에 흉년이 든 지 이태가 됩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합니다. [7]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8]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하필 그 때 시종장들이 함께 옥살이를 하게 된다. 시종장들의 꿈을 해몽해주고, 술잔을 올리는 시종장은 복권이 되었다. 요셉은 그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선처를 부탁했지만 그는 요셉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2년이 지난 후에 바로가 꿈을 꾸었고, 그 때 시종장은 요셉을 기억해낸다.

요셉은 자신이 팔려온 것이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형들에게 나눈다.

이처럼 요셉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자신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수없이 경험했다. 자신을 돌보시고 앞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대로, 닥치는 대로, 정신없이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매사에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이 경험이 쌓여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가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믿음을 믿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난을 극복하면서, 유혹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면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살아계신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을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인생의 주어로 모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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