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그가 쓴 소설들의 문학적 가치와 작품의 수준 이런 거 다 떠나서 일단 그의 소설은 너무 재미있다. 이 유명한 소설 '죄와 벌'을 미천한 내가 이제서야 제대로 완독을 하였는데, 세상에 역시 너무 재밌었다. 이렇게 긴 소설이 어떻게 한 시도 빠짐없이 재밌을 수 있는지.
내가 제일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은 절친 라주미힌이 라스콜니코프가 살인을 저질렀음을 예감하는 장면인데, e-book이라 찾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읽어보려고 어렵게 찾아서 적어둔다.
라스콜니코프는 복도 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뛰어나올 줄 알았어." 그가 말했다. "저들에게로 돌아가. 저들과 함께 있어 줘...... 내일도 저들 곁예 있어 주고...... 항상 그래 줘. 나는 ...... 올지도 모르겠군...... 그럴 수만 있다면. 잘 있어!"
그러고는 손도 내밀지 않고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대체 어딜가? 왜 이래? 아니 무슨 일이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안이 벙벙해진 라주미힌이 중얼거렸다.
라스콜니코프는 한 번 더 걸음을 멈추었다.
"이걸로 영영 끝이야. 나에게 절대 아무것도 묻지 마. 대답해 줄 것이 전혀 없어...... 나한테 오지도 마. 내가 이리로 올 테니까...... 나를 좀 내버려 두고, 저들은...... 내버려 두지마. 내 말 알아듣겠어?"
복도는 어두웠다. 그들은 램프 옆에 서 있었다. 잠깐 동안 그들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라주미힌은 평생을 두고 그 순간을 기억했다. 라스콜니코프의 불타오르는 듯 집요한 시선이 순간순간 강렬해지는가 싶더니 그의 영혼을 의식을 꿰뚫어 버렸다. 라주미힌은 갑자기 몸서리를 쳤다. 뭔가 이상한 것이 그들 사이를 지나간 것 같았다...... 어떤 생각이 암시처럼 스쳐 갔다. 뭔가 끔찍하고 흉악한 것이, 갑자기 둘 다 이해할 수 있을 법한 것이...... 라주미힌의 얼굴이 망자처럼 창백해졌다.
소냐갸 돌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걸어 나오는 나사로가 등장하는 성경 구절을 읽어주며 라스콜니코프에게 광장 바닥에 입을 맞추고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라고 말하는 장면을 읽으면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인 것 같다.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왜 작가는 나사로가 걸어나오는 장면을 인용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아마도 소냐는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면 주님이 그를 용서해줄 것이고, 한번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이 라스콜니코프도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하고 혼자 이해했다. 너무 단순한 해석일 수 있지만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을 발표할 당시 일개 소설가 주제에 감히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했다고 러시아 기독교 관계자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고 하는데, 작가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하긴, 소설 속에서 소냐가 성경을 안 읽었다면 감동은 엄청 반감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시 기독교 관계자들도 너무 웃긴 게, 도스토예프스키만큼 독실하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는데 그거 조금 인용했다고 공격을 하다니. 참내.
소설과 전혀 상관없지만, '죄와 벌'을 읽고 내 소설 인물 중 이상형 1위가 '전망 좋은 방'의 조지에서 라주미힌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라스콜니코프를 도와주려고 의욕도 없는 사람한테 자꾸 번역하라고 일감을 주고,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노상 활달한 라주미힌이 참 피곤했는데 읽다 보니 그가 너무 착하고 귀엽고 진심으로 여자를 위하고 사랑할 줄 아는 남자라서 좋아졌다.
라스콜니코프의 여동생 아브도치야를 보고 첫눈에 반한 라주미힌이 아브도치야의 목에 걸려 있는 비싼 목걸이를 보며, 저것은 그 부자 약혼자라는 사람이 준 것이겠지...라는 생각에 의기소침하다가, 가정 교사로 있던 귀족 집안의 부인이 준 것이라는 걸 알고는 속으로 기뻐하는 장면이나 길을 걷다가 아브도치야 생각이 나자 갑자기 골목을 막 내달리는 장면을 보며 사랑에 빠진 젊은이의 심정을 별 거 아닌걸로 어쩜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을까 싶었다.
또 한 가지, 집안 사정 때문에 거리의 창녀가 된 소냐에 대해 작가가 전혀 불순한 의도를 갖지 않은 점이 참 신기했다. 가끔 남자 작가들 책 속 여자 주인공을 보면서 화가 날 때가 많은데, 적어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여자 인물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너무 길기 때문에 쉽게 손이 가진 않아도 일단 읽기 시작하면 역시... 라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작가. 그의 소설 중 안 읽은 게 더 많으니 내가 그의 팬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하여튼 난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참으로 즐겁다.
'죄와 벌' 읽으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보고 싶단 생각을 했지만, 2014년 독일 왕복 이후로 내 인생 다신 장거리 비행은 없다 결심했기 때문에 아마도 평생 못 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