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제발 거짓말이었으면 하는 글을 각종 자극적 가십거리가 올라오는 모 게시판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내용은 자기와 정말 친한 친구가 집안 좋고 돈 잘벌 고 심지어 인물까지 좋은 남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에 너무 셈이 나서,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친구가 고등학생 때 강간당한 얘기를 했고, 결국 그 결혼이 깨지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결혼까지 결심할 만큼 사랑하는 여자가 강간을 당했다면 너무 안타깝고 가여워서 앞으로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할망정, 파혼을 하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크게 충격을 받았지만, 그 기분 나쁜 글 때문에 크게 깨달은 바도 있다.이 세상엔 감옥에 가지는 않지만, 감옥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것. 친구의 비밀을 폭로한 글쓴이는 감옥에 가진 않았다. 하지만, 그 여자는 얼마나 비열하고 나쁜 사람인가. 막말로 회사에서 1억원을 공금횡령을 해서 감옥에서 징역을 살고 있는 사람이 나쁜가, 아니면 위 글을 쓴 여자가 더 나쁜가. 나에게 묻는다면, 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가 더 나쁘다고 말할 것이다.
뜬금없이 이런 기분 나쁜 글을 줄줄이 쓴 이유는 위화의 '가랑비 속의 외침'에는 비록 죗값을 받고 감옥에 갈 만큼 큰 죄는 아니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칠만한 악행을 수도 없이 저지르는 사람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중 최고봉은 극의 화자 '쑨광린'의 아버지 '쑨광차이' 인데, 문화적 유사점 때문일까? 나도 '쑨광차이'에 버금갈 만큼 나쁜 후레자식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왔다. 글을 쓰는 현재도 대한민국 곳곳에서 쑨광차이 같은 되먹지 못한 놈에게 고통받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겠지.
그렇다고 이 소설 속의 고통받는 이들이 마냥 착하고 순진하고 고통받기만 하느냐. 그렇지 않다. 다들 적당히 악하고,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아니면 본인이 하는 짓이 나쁜 짓이라는 자각이 없기 때문에, 주변의 누군가에게 고통을 준다. 그것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그런데 이 소설 참 이상하다. 등장하는 이들 전부가 삶의 무게에 몸부림치고 그야말로 악다구니 쓰며 살아가는데 이상하게 모든 인물들이 생명력이 넘치고 어떻게든 살아내고자, 또 버텨보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 같은 게 느껴진다. 난 불행하기 그지없는 이 소설의 인물들을 통해 삶의 존엄성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꼈다.
위화의 글은 몇 년 전 한국에 나온 에세이집으로 처음 접했는데, 자기가 철없을 시절 삼촌뻘 되는 농부를 피투성이 되도록 팼다는 글을 읽으며, 참 솔직하고 용기 있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에게는 일말의 자기 미화 욕구가 있는 법이고, 더군다나 위화만큼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가, 자기의 과오를 그리도 생생하게 쓰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위화의 첫 소설이라는데, 문장이 그야말로 군더더기가 없고, "와.... 어떻게 이런 문장을? 이런 묘사를?" 이라고 나도 모르게 읊조리며 또 감탄하며 읽은 문장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말년의 할아버지는 마치 버려진 낡은 의자가 아무 소리도 없이 불태워질 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살았다.' 같은 문장들. 전자책이라 페이지 찾기가 힘들어 더 쓰진 않겠지만, 현재 소설가 '위화'의 명성이 절대 허투루 높아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정말 잘 썼고, 간결하면서 딱 필요한 만큼만 썼는데 그게 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아마도 올해의 책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