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을 읽을 때 무척 우울했다. 엄마가 한창 아프실 땐 수술, 항암, 입원, 각종 검사 등으로 정신이 없었는데 막상 엄마가 항암까지 다 마치고 나니 허무했다.

   나는 남들보다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혼자서도 잘 지내고 오히려 내 곁에 있으려는 사람이 걸리적거리고 불편할 때도 많았다. 이런 기질을 타고난 나는 평생 너무 별 볼일 없어 남들 보기에 딱한 사람으로 충실히 늙어 결국 고독사하여 죽은 지 한 달 넘은 썩은 시체로 발견되리라 생각했다. 자기 연민이 너무 과해서 지금 생각하면 추할 지경이지만, 어쨌든 그 시간도 지나왔다. 
   당시 뇌가 고장 난 거 마냥 만사 다 비관적이었던 내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바로 '더블린 사람들' 이었다. 그런데 작년 2019년에도 윌리엄 트레버 단편선 속의 보잘것 없고 용기 없는 사람들을 보며 어려운 시간을 견뎠다. 내 곁에는 '더블린 사람들'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사랑하는 남편이 생겼고 비록 많이 아프지만 여전한 엄마도 있고 또 세명 남짓의 친한 친구들도 있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절망을 극복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을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나에겐 거의 유일하게 책만이 위로가 된다. 책을 엄청 많이 읽지도 않으면서 왜 날 위로할 수 있는 건 책뿐인지....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신나는 일 하나 없이 세월을 보내고 또 아무도 그 사실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외롭고 쓸쓸한 윌리엄 트레버 단편소설 속의 인물들.
윌리엄 트레버는 그래도 이 세상에서 딱 한 명은 이런 사람들한테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냐고 말하며 그들을 다독거려 주는 듯하다.

다음은 각 소설별 단상. (오래되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최대한 적어보련다)

 

1. 욜의 추억 - 첫 소설부터 반했다.
2. 탁자 - 가구가 나와서 그런지 로알드 달의 '목사의 기쁨' 이 좀 생각났다.
3. 펜트하우스 - 읽으면서 너무 화가 났다. 사람들은 짓밟아도 별 탈 없는 사람을 마음껏 짓밟는다. 더 슬픈 건 대부분의 경우 밟힌 사람은 정말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다는 거다. 대학시절 혼자 자취하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집에 남자기 있는 척하고, 친척과 같이 산다고 거짓말을 하곤 했던 기억이 떠올라 읽는 내내 화가 났다. 역시 사람 사는 건 영국이건, 한국이건 비슷한 건가.
4. 탄생을 지켜보다 - 난임병원을 1년 남짓 다니며 시험관 시술을 해보니 왜 이 소설 속 부부가 미쳐버렸는지 이해할 것 같기도 하고.
5. 호텔 게으른 달 - 다시 말한다. 이 세상의 인간들은 짓밟아도 별 탈 없는 사람을 마음껏 짓밟는다. 힘도 없고 늙은 부부가 속수무책으로 재산을 빼앗기는 이야기.
6. 마흔일곱 번째 토요일 - 음... 난 이런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소설 속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유일한 이유가 뭔가. 그냥 젊은 여자랑 주기적으로 자고 싶어서 아닌가. 현실에 이런 남자가 엄청 많을 거라는 거 안다. 그런데 난 소설로까지 이런 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다. 여자한테 너무 감정이입을 하며 봐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7. 학교에서의 즐거운 하루 - 엘리너가 잘못 될까 봐 조마조마하며 봤다. 엘리너야 잘했어. 다행이야.
8. 로맨스 무도장 - 책에 실린 단편 소설 중 어떤 소설이 제일 좋았을까 많이 고민했고 후보가 많았지만 난 '로맨스 무도장'을 최종 1위로 선정하였다. (아무도 안 알아줌 ㅋㅋ) 결국 브리디는 죽을 때까지 다리 없는 아빠를 돌보며 쓸쓸하게 살겠지. 정해진 결말에 맞춰 살 수밖에 없는 가엾은 브리디 생각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
9. 오, 뽀얀 뚱보 여인이여 - "남편이 좀 이상한 거 같으십니까. 참고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어서 도망치세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참고 살다가 맞이한 파국. 그리고 너무나 안일했던 뚱보 여인 때문에 희생된 불쌍한 아이... 기숙 학원에서 공부하다 과로로 끝내 죽는 아이가 불쌍한 한편으론, 영국 놈들 한국 고3들이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하는 얘기 들으면 기절하겠단 생각했다. (실제로 예전에 영어학원 다닐 때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된 영어 선생님한테 나 고3 때 아침 7시까지 학교 도착해서 밤 10시반까지 공부했다고 하니 정말이냐고 몇 번을 물으며 엄청 놀라더라)   
10. 이스파한에서 - 이 소설도 1위 후보 중 하나였다.난 불쌍하고 처량한 남자 이야기가 좋더라. 당신이 끝내 여자를 거절한 마음도 난 이해한다우. 
11. 페기 미한의 죽음 - 난 어린이들의 외로움에 많이 약한 거 같다. 왜 눈물이 나는지도 모르고 눈물이 났던 소설.
12. 복잡한 성격 - 정말 뻔뻔한 불륜 커플. 애트리지가 다 뒤집어쓰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13. 오후의 무도 - 1위 후보 중 하나였다. 난 이 소설 속 인물들처럼 끝내 용기 내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들한테 연민과 동질감을 느낀다. 대부분은 그렇잖아. 다 버리고, 즉흥적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 거의 없잖아..
14.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 - 이 소설집에서 가장 직접적 메시지를 가진 소설. 윌리엄 트레버의 조국이 아일랜드임을 환기시킴.
15. 결손가정 - 세 번째로 말한다. 이 세상의 인간들은 짓밟아도 별 탈 없는 사람을 마음껏 짓밟는다. 조용히 남한테 폐 끼치지 않고 사는 사람을 제발 좀 그냥 내버려 둬. 등쳐먹을 생각하지 말고. 여든일곱의 죽을 날 머잖은 할머니한테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16. 토리지 - 영국의 사립 남자 고등학교는 왜 다 그 모양이냐는. 소설과 영화 다 통틀어봐도 도대체가 긍정적으로 묘사된 적이 없다.
17. 예루살렘의 죽음 - 너무 오랫동안 시골에 처박혀 자기를 희생해가며 살면 결국 주인공인 프랜시스처럼 사고하게 되겠지. 안됐다.. 안됐어.
18. 그 시절의 연인들 - 나는 의외로(?)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불륜 이야기가 모든 소설과 영화의 영원한 주제임은 인정하지만, 나는 정말 웬만한 불륜 이야기에는 큰 흥미를 못 느낀다. 물론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를 읽으면서는 미친 여자처럼 눈물을 펑펑 흘렸지만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불륜, 싫어하는 불륜에 어떤 기준이 있는진 나도 모르오....
   애석하게도 난 현대문학이 표제작으로 꼽은 소설 '그 시절의 연인들'에도 큰 감동을 받지 못했다. 난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에 거부감이 좀 심한데 결국 이 감정의 장벽을 끝끝내 넘어서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10대부터 30대인 지금까지 쭉 늙은 남자에게 단 한 번도 이성적 사랑 혹은 호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제레미 아이언스급 노인이라고 해도 젊고 잘생긴 남자에 비하겠나.)
  내 취향 얘기는 그만하고 또 이 소설에 큰 감동을 못 받은 두 번째 이유는 결말 때문이다. 늙은 남자는 20대의 젊은 여자와의 사랑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하며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만, 결국 그는 후진 집에서 부대끼면서 살기 싫어서 전처랑 재결합하지 않나. 이런 이유로 난 이 소설이 아름답다는 생각보단 누군가를 사랑해도 현실적 조건이 우선 아니겠냐는 결론에 도달해버렸다. 그리고 그 젊은 여자도 늙은 여자를 그리워할까? 난 아닐 거라 생각한다.
19. 멀비힐의 기념물 - 이 책에서 재미로만 따지면 제일 재미있고 흥미진진했던 소설.
20. 육체적 비밀 - 의기투합한 두 사람이 별 불만 없다면야... 서로 윈윈이지만. 근데 꼭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나요 부인? 난 잘 모르겠소.....
21. 또 다른 두 건달 - 제임스 조이스 얘기 나와서 반가웠다.
22. 산피에트로의 안개 나무 - 1위 후보 중 하나였다. 이 소설을 내가 엄청 좋게 읽은 걸 보면 불륜 소설이라고 해서 무조건 싫어하는 건 아닌 거 같다. 기준은 정말 모르겠는데 일단 늙은 남자 젊은 여자 조합이 싫은 건 확실하다. 아련하고 아름다운 소설.
23. 삼인조 - 이 소설의 '삼촌' 보며 전 회사 사장님 생각났다. 만인한테 친절하고 인자하지만 기본 전제는 '너는 내 밑이고 나를 대접해야만 한다'인 사람이었는데, 은행 같은데 가서도 직원들한테 항상 공손히 인사하고 친절하셨다. 그런데 딱 한 번 은행 직원들이 일어나서 자기를 모시러 오지 않는다고 주거래 은행을 바꿔버렸다. 여기 소설에 나오는 삼인조들도 강압적이고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삼촌의 호위 따위 다 무시하고 스스로 독립하고 거듭나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