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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번 산 고양이 ㅣ 비룡소의 그림동화 83
사노 요코 글 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2002년 10월
평점 :
표지에 그려져 있는 이 녀석 얼굴표정이 만만치 않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나 말고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한 교만하고 차가운 초록 눈동자에 마치 죄수복 같은 얼룩무늬. 그 죄수복 느낌의 얼룩무늬는 이 고양이를 주눅들어 보이게 하기는 커녕 무지하게 반항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아, 심상찮다, 심상찮어!
아니나 다를까, 이 녀석, 백만번이나 죽어봤다지 않은가. 그러니 두려울 게 무에랴. 새삼스레 중요한 것, 애착이 가는 것이 있을 리 없다. "난 백만 번이나 죽어 봤다고. 새삼스럽게 이런 게 다 뭐야!" 이 고양이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 뿐이며 사랑하는 것도 자기 자신 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일까? 이 세상 모든 일이 심드렁하며, 자신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모든 이가 다 마음에 들지 않고(물론 그들도 이 고양이를 제대로 사랑했던 건 아니었다), 새삼스러울 게 아무 것도 없는 삶을 자신에게 선사한다는 게 과연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가 할 일이던가? 그래서 그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고양이로 다시 태어났는지 모른다. 뭔가가 불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그를 자각시켜 준 한 존재가 있었으니 새하얗고 예쁜 한마리 암코양이였다. 그 고양이는 "그래"라는 무심한 한 마디로 네가 백만번을 죽었든 살았든 그 삶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얼룩고양이에게 가르쳐 주었다. 자신을 내려놓는 것, 타인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말이다. 그걸 깨닫고 행복한 한 생을 보낸 얼룩 고양이는 이제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다. 다 이룬 것이다.
아, 어찌 30쪽 밖에 안 되는 그림책이 이렇게 심오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 또한 이 얼룩고양이처럼 자기자신만을 움켜쥐고 살고 있으나 그걸 내려놓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어서 오히려 고개 빳빳이 들고 "사랑, 그까짓 거. 친구, 그까짓 거. 가족, 그까짓 거" 이러면서 내 안에 나를 가두고 있으니 나도 앞으로 백만번은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