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를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라는 것 외에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영화를 보러 갔다. 워낙에 세계적인 감독의 작품이니 기대를 많이 하고 갔고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는 뭔가가 찜찜했다.
1. 마음에 드는 것
소피 - 마법으로 할머니가 된 후에 경악과 분노가 이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 나의 뒤통수를 때려 버렸다. 아주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고민(관절이 우두둑거린다, 이 모습으로 여기서 살 수는 없다)과 단호한 대처방식. 소피는 보통 소녀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누군지, 무엇인지에 대해 영화는 끝까지 얘기해 주지 않는다. (내가 알아서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18살의 그녀보다 90살의 그녀가 더 활발하고 의욕적이다. 늙는다는 것은 나쁜 일만은 아니다.
무대가리 - <오즈>의 허수아비와 <크리스마스 악몽>에 나오는 해골소년(이름 또 잊어버렸다)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이 녀석은 괜히 마음에 드는 캐릭터다.
움직이는 성 - 센과 치히로에서도 치히로가 가게 된 '불가사의한 마을'의 묘사가 참 좋았었다. 이 감독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생각이 든다. 판타지의 필요조건이다.
2. 찜찜한 이유
나이가 들면서 화가 나는게 이야기를 이야기 자체로, 그 상상력을 맘껏 즐길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든 이제 나에겐 그게 텍스트가 되고 해석을 하기 시작한다. 의미를 따지고. 그래서 어린 시절에 보았던 판타지와 요즘 들어 본 것과는 그 감동의 깊이가 다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오즈의 마법사>에서 느낀 황홀감을, 이제는 느낄 수가 없다. 슬프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계속했다. 이건 원작이 있는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야기가 이렇게 설명도 없이 비약이 될 수는 없지. 도대체 왜 소피는 할머니가 되었다가 소녀가 되었다가 왔다갔다 하며(황야의 마녀가 분명 아주 풀기 어려운 주문이라고 했단 말이다!) 황야의 마녀는 왜 갑자기 축 처진 할머니가 되고 소피는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 해결사가 되는가. 이 얘기의 등장인물 중 마법사나 마녀가 아닌 건 소피 뿐인 것 같은데 스토리가 진행되다 보면 소피가 가장 강력한 마법사다. 그건 좋다. 근데, 그 복선은 어디 있는 건가? 소피가 알고보니 뭐뭐뭐였다든가,소피의 무엇이 혹은 무슨 행동이 주문을 푸는 열쇠였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나는 너무도 뻔한 헐리우드식 스토리를 원하는 건지도 모른다. 미야자키식 문법에 내가 서투른 것일까?) 하여간 모든 이야기들이 너무 뜬금없고 필연성 없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두가지 짐작을 하게 만들었다.
첫째, 원작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많은 것이 생략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둘째. 러닝타임 두시간에 맞추려고 제작사에서 필름을 잘랐다.
첫째 짐작은 맞았고(책이 나와 있다. 사 보아야겠군), 둘째는 모르겠다.
또 하나, 일본인들이 전쟁을 언급할 때 아주 모호하고 막연하게 '전쟁은 나쁘고 슬픈것'이라는 수준에서 주절거리는 것을 많이 보아왔는데 이 영화에서도 약간 그런 풍이 느껴졌다. 가해자이면서 원폭 피해자인 그들의 입장에서 전쟁은 비극적인 것이면서도 그 근원을 파헤져 잘잘못을 따지기는 망설여지는 그 무엇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전쟁은 도대체 누구와 누구가 벌이는 것인지, 하울은 누구편인지, 누가 잘못한 것인지 언급하지 않은채 갑작스럽게 해피엔딩이 주어진다. 그래서 나는 위와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건 나의 오버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