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베토벤 : 교향곡 9번 - 푸르트뱅글러 - Great Recordings Of The Century
횡엔 (Elisabeth Hongen) 노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 / 이엠아이(EMI) / 1998년 10월
평점 :
절판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때론 靈感이라 불리는 기묘한 감정상태를 경험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74살의 늙은 괴테가 고열을 심하게 앓고 난 후 울리케 폰 레베초프라는 19살의 젊은 처녀를 보고 첫눈에 사랑을 느낀 후 그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의 상실감을 <마리엔바트 시가>에 싣거나 방랑의 길에 올라야 했던 루소가 한 들판의 나무아래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영감에 빠져 위대한 저작 에밀을 탄생하게 했던 그런 영감에는 도저히 못 미칠지라도 어느날 새벽 알 수 없는 영감에 사로잡혀 여자친구에게 어처구니 없는 연애 편지를 쓴다거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시를 끄적인다는 등의 그런 황당한 감정의 과잉상태에 빠져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거라 믿는다.(아님 나만 그런건가? 그런거야?)

나에게 그런 영감으로 다가온 음악이 있었다.

 

어느 따분한 일요일 오후였다. 읽고 있던 소설은 지겹기 짝이 없었고(앙드레 말로의 왕도로 가는 길이었다) TV나 볼까 하고 채널을 여기저기 틀어보니 드라마 재탕만 부지기수였다.

갑자기 너무 심심해진 난 음악이나 듣자 며 오디오에 CD를 걸었다. 아주 오래 전 산 CD였지만 한동안 JAZZ만 듣고 있던 터라 꽤나 묵혀두어서 꼬장꼬장한 몰골을 띄고 있었다.

 

Furtwangler의 베토벤의 교향곡 제 9번 이었다.

한동안 듣고 있던 난 어느새 CD플레이어가 지익하는 소리와 함께 조용히 멈추자 작은 손박수를 치고 있었고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었다. 순간 누군가 방문을 열어 나의 이 꼬락서니를 지켜 본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고 난 황급히 이불을 뒤집어 썼다. 뒤집어 쓴 이불 속에서도 감동은 멈추지 않았고 난 빨리 내 감정을 추스려야 겠다는 일념 뿐이었다.

그게 나와 Furtwangler의 첫만남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 믿는다.

에이 또 베토벤이야 게다가 또 푸르트벵글러냐? 그렇다 또 베토벤이고 게다가 또 푸르트벵글러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나에게 1951년 바이로이트 실황앨범은 이다.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바이로이트 실황은 역사적 배경만을 빼고 보자면 결점투성이의 엉터리 연주라고,, 3악장의 간간히 내비치는 금관의 실수는 접어두고서라도 어처구니 없을 만큼의 느린 템포설정에 4악장 Finale의 Chorus가 한 템포 늦게 들어오는데다가 오버한 Schwarzkopf의 내지르는 괴성소리라니..

맞다. 모두 다 맞는 사실이다. 바이로이트 실황은 연주 자체로 보자면 전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곳에는 완벽함을 뛰어넘은 위대한 영감이 존재한다.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을 작곡할 당시에는 매우 힘든 상황에 놓여있었다. 1812년 교향곡 7,8번을 연이어 발표한 이후로 그는 조카의 교육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수많은 여인들과 사랑에 빠졌지만 결국 가정을 이루는데는 실패했고, 또 자식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조카에의 집착은 유별난 것이었고, 심지어 조카의 친 엄마를 상대로 그녀의 좋지 못한 행실을 빌미 삼아 조카의 양육권 분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결국 그의 조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조카의 자살미수로 이어졌고 이는 그에게 커다란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또한 그의 고질적인 귓병은 더욱 악화되어 남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필기장이 필요했고, 폐렴,황달,눈병,위장장애가 거듭되어 나타나면서 그를 더욱 괴롭혔으며 경제적으로도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또한 당시 로시니의 오페라가 크나큰 성공을 거두면서 베토벤의 창작열은 이제 끝이 난게 아닌가하는 세간의 비판도 자부심 높던 그를 더욱 힘든 상황으로 몰아갔다.

1824년 2월 베토벤은 이런 고통과 절망감을 딛고 서양음악사 사상 불멸의 저작 <합창교향곡>을 완성했던 것이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어떤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 기꺼이 나치당원이 된 카라얀과는 달리 순수 아리안계의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치 Goebbels의 주도하에 벌어진 나치의 선전전술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모든 음악인들이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독일을 빠져나가는 상황에서도 나치 휘하의 독일보다 더 절실하게 베토벤이 필요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라며 기꺼이 사랑하는 조국의 옆에 머물렀다. 패전 후 그 이유로 비 나치 심리재판에까지 올라야만 했고 1947년에 이르러서야 그는 나치 동조 혐의에서 벗어나 연주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51년 연합국의 폭격으로 부서진 바이로이트가 처음으로 다시 개관하는 날 그는 기꺼이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선택했다.

 

소프라노였던 슈바르츠코프가 회상하듯이 그 날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은 신경쇠약에 걸리기 일보직전의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바그너의 링 사이클이 주로 나치의 주요 선전물이었고(바그너는 인종주의자였고 지독한 반유태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로인해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또한 연합국의 좋지 못한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게다가 패전 이후 처음 갖는 바그너의 성지에서의 독일인의 위대한 영혼 베토벤이 연주 된다는 것! 세상의 시선은 바이로이트에 집중되었다.

 

장엄한 폭풍과도 같았던 1,2악장이 끝나고, 지난 전쟁의 참화를 암시하는 듯한 너무나도 슬픈 3악장의 아다지오가 끝이 났다, 그리고 4악장!

Edellmann이 쉴러의 환희에 부침을 엄숙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O Freunde, nicht diese Tone!

Sondern lasst uns and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

(오, 벗이여, 이 노래가 아닌 더 기분 좋은, 더 환희에 넘친 노래를 함께 부르자꾸나)

그리고 이어 터지는 4명의 독창자들에 의한 변주, 그리고 이은 대규모 합창!

Ja, wer auch nur eine Seele

Sein nunnt auf dem Erdunrund!

Und wers nie gekonnt der stehel

Weinend sich aus diesem Bund

(옳거니 다만 한 사람의 영혼일지라도 지상의 벗으로 부를 사람을 가진다면! 그러나 그것 마저도 가질 수 없는 자는 눈물을 흘리며 살며시 떠나는 것이 좋다.)

.

그리고 코다, 마지막 프레티시모!

 

우리 손을 잡자, 억만의 사람들이여 이 입맞춤을 온 세계에 주자꾸나!

형제여, 별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버지가 계시나니

엎드려 기도할까? 억만의 창생들이여

창조주를 느끼는가? 세상 백성들이여

별하늘 저편에서 주를 찾아보자꾸나!

별들 위에 주님은 계시나니!

 

푸르트벵글러의 이 휘몰아치는 코다가 쉴러의 환희에 부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단 말인가?

난 이 4악장을 들었을 때 합창교향곡이 빈의 케르트나토아 극장에서 처음 초연될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귀를 먹은 베토벤의 심취한 지휘 모습이! 베토벤 자신은 귀를 먹었기에 연주자체는 또 다른 지휘자였던 Umlauf의 지휘를 따랐다. 4악장의 장엄한 코다가 끝이 났을 때 청중은 이 위대한 작곡자에게 열렬한 박수로 하염없는 존경심을 표현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마냥 등을 돌리고 서있던 베토벤에게 앨토 가수였던 Frau Unger 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청중쪽으로 돌려 세웠다. 그리고 떨리는 몸짓으로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베토벤!( 영화 불멸의 연인을 보면 베토벤의 이런 모습이 잘 표현되었다.)

 

1951년 바이로이트!

전쟁은 독일과 연합국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전쟁은 그것이 가해자였건 피해자였건 모두 소중한 사람들을 잃게 만들었고 서로의 불타오르는 증오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지금 바이로이트에서 베토벤은 말한다. 이제 우리 그만 이런 증오의 노래는 그만 부르고 환희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 슬픔이 넘쳐흐르는 3악장의 아다지오에서 전쟁을 겪은 사람이라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호른을 맡고 있던 연주자가 격정에 빠져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슈바르츠코프가 이 위대한 영감에 취해 오버하며 괴성(?)을 지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 그들에게 그것이 형편없는 연주라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음악(音樂)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음학(音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지 말고 분석하려 하지 말고 그냥 just listen하자!

푸르트벵글러의 마력에 한번쯤은 취해 보는 것! 이성을 마비시키고 푸르트벵글러의 흐느적거리는 지휘봉을 따라 지나친 감정의 과잉상태에 빠져보는 것!

그것이 음악을 진정 즐기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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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20세기를 어떻게 추억해야 할까? 아마 20세기 처럼 많은 전쟁과 비극이 일어난 100년은 아마 없을 터이다. 1차 세계대전에 이은 스페인 내전 발발,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 가까이는 걸프전에 이은 이라크 전 까지 수세기 동안 수많은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보다 이 100년 사이에 벌어진 참사들로 우린 더 많은 생명들을 잃었다.

20세기는 인류가 대지에 두 발로 선 이래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잔혹의 역사로 기억될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비극의 역사에도 유난히 빛을 발하는 4명의 사람이 있었다.

인류의 눈을 대지가 아닌 하늘로 돌린 아인쉬타인, 철학의 종언을 고했던 비트겐슈타인, 단 한사람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천상의 소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걸 들려준 클라라 하스킬!  난 20세기를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그 참혹했던 피의 역사보다는 이 4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1960년 12월 7일 브뤼셀의 한 역에서 등이 굽은 곱추 노파 한 사람이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숨졌다. 그녀의 외모는 추하기 이를때없는 한낱 곱추 노파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숭고한 영혼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녀의 이 어이없고 쓸쓸한 죽음은 그녀가 평생 등에 짊어지고 있었던 불행이라는 무거운 짐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또한 죽음은 그녀를 한평생 가혹하게 가두어 두었던 좁고 갑갑한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질병과 싸워 위대한 창작을 쏟아 놓은 예는 굳이 클라라 하스킬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많이 있다.  반신불수를 극복하고 메시아를 잉태한 헨델, 청력상실을 딛고 환희의 송가를 부른 베토벤, 고독과 함께 찾아온 매독의 고통 슈베르트,끊임없는 정신질환과 싸워야만 했던 반 고흐,..... 가까이는 오토 클렘페러와 자클린 뒤프레까지..

하지만 여타의 다른 예술가와는 달리 클라라 하스킬에게 불행은 너무나 급작스럽고 빨리 찾아왔다. 그녀가 겨우 18세 되던 1913년 세포 경화증(Sclerosis)이라는 당시에는 병명 조차 알려지지 않은  병이 그녀를 엄습했다. 이 병은 면역질환의 일종으로 세포끼리 붙어버려 뼈와 근육이 붙거나 경화되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질병이었다.  이 병은 그녀에게 모든 걸 앗아갔다.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청춘,사랑 그 모든 걸 강탈해버렸지만 그녀에게 유일하게 빼앗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음악이었다. 이 가혹한 天刑의 질병도 그녀에게 음악만은 가져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음악이 그녀가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다.

 

4년간 온 몸에 깁스를 한채 병상 침대에서 누워 있어야만 했던 클라라 하스킬은 드디어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동안의 긴 투병으로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었고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등은 어느새 추한 곱추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다라는 희망으로 병마를 잠시나마 이겨낼 수 있었고 다시 연주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닥친 불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이은 나치의 파리입성! 유태인이었던 클라라 하스킬은 다시 기나긴 도피생활을 준비해야만 했다. 일찍 부모를 여윈 하스킬은 단 혼자의 힘으로 성치 않은 자신의 육체를 이끌어 세워 암울한 도피 생활을 해야했고 그런 그녀의 유일한 대화상대로 남은건 그녀가 키우던 고양이 한마리였다. 도피생활로 인한 극심한 긴장과 공포는 결국 뇌졸증을 불러왔고 유리와도 같았던 그녀의 육체는 다시 깨어지고 말았다. 신의 시기심에서 출발한 이 가혹한 징벌에 자신도 죄책감을 느꼈는지 하스킬에게 구원의 손길을 잠시 내려주웠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었던 하스킬은 우연히 하스킬의 소식을 들은 유태인 의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다시 음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예전의 동지는 다시 적으로 돌아섰다. 동/서 진영으로 갈라져 보이지 않는 전쟁을 시작하였고 서로는 자신의 체제의 우월성을 끊임없이 선전하기 시작했다. 코간편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소련 피아니스트의 대모라 불리던 타티아나 니콜라예바가 처음으로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를 방문하게 되었다. 니콜라예바는 떠나기전 소련의 음악가들로부터 카라얀을 보고 오라는 밀명아닌 밀명을 받게 된다.(서방세계에는 제 2의 토스카니니라 불리는 카라얀이라는 젊은 지휘자가 있으니 그의 연주를 반드시 듣고 오라는 것이었다.) 마침 니콜라예바가 방문했던 시기에 카라얀의 모차르트 연주회가 잘츠부르크에서 열렸고 니콜라예바는 그 연주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클라라 하스킬이라는 보잘것없고 조그마한 외모의 곱추 노파를 만나게 된다. 그 연주회가 끝난후 그녀는 소련으로 돌아가 이렇게 토로했다.

 

“그녀의 몸은 뒤틀려 있었고, 잿빛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마치 마녀처럼 보였다. 그러나 막상 공연이 시작되자 카라얀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건반으로 손을 옮기자 곧 나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실로 내가 평생 동안 들은 최고의 모차르트 전문가였다. 그녀의 마력은 너무나 강력해 오케스트라의 총주가 다시 울려퍼질 땐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풍부하면서도 자연스런 음이 오케스트라로 전달되어 지휘자마저 마술에 걸려 있었다. 그녀 덕택에 그들 모두는 음악적 진실을 접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내가 경험한 최고의 콘서트가 되었다.”

 

오늘 우리는 모차르트가 직접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이 어땠는지 알지 못한다. (그가 죽은지 200년이 훨씬 지났고 음반하나 남겨 놓지 않았다 ^^) H.G. 웰즈가 쓴 소설의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은한 그의 연주가 어땠는지는 우린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군가 모차르트가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이 듣고 싶다고 강짜를 부린다면 클라라 하스킬의 음반을 손에 쥐어주어라. 그곳에 모차르트가 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의심할 바 없는 천재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클라라 하스킬 또한 그에 못지 않다. 모차르트가 5살때 처음으로 소곡을 작곡하여 그의 천재성을 증명하였다면 그녀는 6살때 처음 들은 모차르트 소나타를 악보도 보지 않고 그대로 쳐 냄으로써  그녀의 천재성을 입증했다. 이른바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 곡을 다른 조로 순식간에 편곡하여 다시 쳐냈다고 하니 이 정도 쯤 되면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가 없다.(이 외에도 그녀의 천재성에 대한 일화는 굉장히 많이 있다. 스위스에서 연주하기로 한 호로비츠가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자 안달이 난 지휘자 헤르만 세르헨이 그녀에게 대역을 부탁하자 그녀는 연주하기로 한 리스트 협주곡 제 1번의 악보를 하루만에 암기해 버렸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는 피아노 파트만 암기한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총보까지 모두 암기해 버려 세르헨을 경악시켰다) 

모차르트가 그의 치기어린 천진난만함과 순진함으로 명롱하고 청초한 음악을 창조해 내었다면 클라라 하스킬은 그 고된 불행과 고난 속에서도 결코 잃지않은 영혼의 순결성으로 모차르트가 만들어낸 천상의 음악이 실재한다는 것을 그 청명하고 순수한 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은 평생 그녀를 경외했다. 그건 그녀의 뛰어난 천재성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숭고한 인격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모든 청중이 갈채를 보내며 연주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직후에도 겸손함과 수줍음으로써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청소부나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청소하는 것 외엔 무엇 하나 몸에 익힌 게 없으니…”

얼마전 내가 쓴 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연주자는 청중으로부터 마땅히 존중 받아야할 존재이지만 존경 받아야할 존재는 아니라고 연주자로써의 존경은 청중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난 마땅히 클라라 하스킬을 존중이 아닌 존경으로 대한다. 아니 그건 경외라는 말이 더 적확한 표현이리라..

 

브뤼셀의 기차역!

꿈에 부푼 27살의 청년 바이올리니스트 코간은 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브뤼셀 역에 내렸고 조용하고 수줍음 많던 66살의 노파 하스킬은 새로운 공연을 위해 브뤼셀 역에 내렸다. 코간과 하스킬이 거쳐간 그 기차역은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가며 만남과 이별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PS> 전 기독교 신자는 아닙니다만 클라라 하스킬의 생애를 죽 지켜보면 성경의 욥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인지 욥기의 한 구절을 올립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

참조: 바람구두님의 문화망명지의 클라라 하스킬 편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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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라쟈르 기차역
어제 동생의 배웅을 위해 기차역에 나갔다. 

 

낯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고 각자의 만남과 이별을 준비하는 곳.. 기차역

동생을 보내고 돌아서는 내 발걸음은 매우 무거웠다. 떠나는 사람에게 기차역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곳이지만 남겨진 사람에겐 비로소 떠난 사람의 텅빈 공허감을 낯선 공기로 채워야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배웅을 하러 가는건 죽어도 싫다. 떠나는 사람의 등을 말없이 지켜봐야만 한다는 건 너무나 괴롭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 모두 그 기차여행이 그들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레오니드 코간과 클라라 하스킬!  동생을 보낸 그 기차역에서 난 두 사람을 보았고 그들의 마지막 기차여행에 잠시 동행해보았다.

 

레오니드 코간! 그처럼 서글픈 비브라토를 낼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또 있을까?

코간이 활동하던 시기는 미/소의 냉전이 극에 달해있을 때였다. 2차 세계대전이후 잠시간의 평온이 끝나고 미/소간의 보이지 않은 전쟁은 시작되었고 1961년 소련이 보스토크 1호를 쏘아올림으로써 우주 경쟁시대를 열었다. 우주 비행사였던 가가린이 "지구는 푸르렀다. 하지만 그곳에 신은 없었다!"라는 명언과 함께 무사귀환함으로써 그 보이지 않는 전쟁은 비로소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고 그 이후 세계는 민주주의(실제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국가 사회주의)라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 치열한 체제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체제를 선전하는 것으로 문화/예술 만한 것이 있을까? 그들은 자신의 체제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문화/예술을 선전물로 적극 도입하게 되었고 뛰어난 연주가들은 그들 선전의 훌룡한 도구로 자리 잡았다.

 

코간이 활동하던 시기에 소련이 자랑하던 바이올리니스트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였다. 소련이 서방세계의 선전물로 사용하는데는 오이스트라흐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했다. 선전물에 두 사람이 등장하기엔 그 자리가 너무 비좁기 때문이리라. 항상 화려한 전면에 나서는 것은 오이스트라흐였고 코간은 그의 커튼 뒤에 묻혀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그런 코간에게도 드디어 세상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브뤼셀에서부터 그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대상을 거머진 코간은 이후 열린 파리/런던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고  모든 성공한 소련 연주자들의 순례코스이기도 한 미국 공연에 올랐다.1958년 보스턴 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미국 청중으로부터 장장 20분간에 걸친 커튼 콜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 이후 소련이 자랑하는 피아니스트인 에밀 길레스의 누이와도 결혼하게 되었고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피아노의 에밀 길레스와 함께 TRIO를 결성하게 됨으로써 코간의 화려한 전성시대는 최고조에 올랐다.

 

그의 이러한 전성기도 예기치 못한 파국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들의 잦은 서방세계로의 화려한 연주여행은 KGB의 감시를 필연적으로 불러왔고 코간에게 그 감시 임무가 주어졌다. (코간은 소련내에서도 소수 그룹이었던 유태인이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이런 요구에 불복할 수 없었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스트로포비치의 KGB 감시문건이 우연찮게 로스토로포비치에게 알려지면서 그들의 우정은 산산히 금이 갔고 카잘스,티보, 코르토이후 최고로 평가받던 TRIO는 해체되었다. 그 이후 코간은 사과를 위해 수차례 로스트로포비치와의 면담을 요구했으나 단 한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이후 로스토로포비치는 서방으로 망명하여 화려한 그의 명성을 계속 이어갔다.

 

코간은 그 이후 모든 의욕을 잃고 후학 양성에만 힘을 쏟게 되었다. 화려한 조명을 벗어나 다시 그가 원래 살던 어둠의 커텐뒤로 찾아 들어간 것이다. 1982년 12월 빈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탄 새벽 기차는 원래 순환기 장애가 있던 코간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고 그 기차가 코간의 고향부근인 우크라이나의 한 역을 지날 무렵  기차 승무원이 텅빈 기차안에서 싸늘히 식어있는 코간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사람들은 흔히들 코간의 바이올린 음색을 서늘하다고 말한다. 하이페츠의 음색을 혹한의 한기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왜 코간의 음색은 그저 서늘하다고만 말할까? 혹시 그 대답이 코간이 하이페츠에 감히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난 편견을 버리고 그의 음반을 다시 들어보라라고 말해줄 수 밖에 없다.(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참고로 네이트 사전 검색에 나온 코간에 대한 설명을 들자면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 우크라이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출생. 모스크바음악원을 졸업하였고 1951년 엘리자베트국제콩쿠르 1 위 입상으로 서방측 여러 나라에 그 존재가 알려졌고 55년부터 활발한 국제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D.F. 오이스트라흐 이후의 거장(巨匠)으로서 대성(大成)이 기대되었으나 기교적으로는 탁월하면서도 표현에는 깊이를 갖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52년 이후 모스크바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많은 후진을 육성하였다.

 

난 하이페츠의 연주를 감히 싫어한다고 말하는 편이다.(니가 하이페츠에 대해 뭘 알아! 라고 대꾸하면 할 말은 없다) 그의 연주는 정말 기적적이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난 그의 연주가 기적적이고 대단히 특출나기는 하지만 그의 음악을 좋아할 수는 없다라고는 말할 수 있다. 그의 정확하고 현란한 기교에는 감히 언급할 수 없지만 그의 연주를 듣다보면 난 마치 나의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갈갈히 찢겨나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음악은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래서 난 그를 좋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코간은 하이페츠와는 다르다. 그의 음악 또한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고 고음역에서는 찢어질듯한 현의 비명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하이페츠의 혹한의 한기와는 다른 약간 쌀쌀한 11월의 차가움 정도랄까....  GUNS N'  ROSES가 노래한 이 그에게 딱 맞는 이미지라고 생각하면 적확한 표현이리라. 바로 그 느낌! 그게 코간이다.

 

심장마비로 죽어가던 코간의 동공에 새겨진,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영상은 무엇이었을까? 시대가 만들어낸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비애와  절친했던 그의 동료를 배신해야만 했던 슬픔, 또 그로 인해 깊이 각인되버린 고독의 상처 그 모두가 어우려져 녹아들아간듯한 고향 우크라이나의 황량한 겨울 풍경이 아니었을까?  어둡고 싸늘히 식어버린 차가운 새벽 기차안에서의 홀로 죽어간 코간!

정말 죽음마저도 코간 답다.

 

PS> 혼자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을때 반드시 코간의 CD를 챙겨가시길..

       그가 정말 도움이 될 겁니다. 여러분의 여행에 ...

       모네의 생 라쟈르 기차역 그림을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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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였나 낮에 낮잠을 조금 잔 관계로 밤에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난 이럴 경우 2가지 선택을 한다.

하나는 책을 꺼내 읽는 경우이고 또 하나의 경우는 음악을 듣거나 TV를 보는 것이다.

특히나 유난히 잠이 오지 않을때 읽는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은 나에게 있어선 최고의 수면 치료제이다. 읽는 도중 몇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느샌가 보면 난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하나의 해결책은 음악을 듣거나 TV를 보는 경우인데 이럴 경우는 책을 읽는 것 보다는 조금 귀찮아진다.

우선 음악을 듣는 경우는 CD를 꺼내기 위해 침대에서 어쩔수 없이 일어나야만 하고 한동안 뭘 들을까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하기 때문에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해야 한다. 또한 밤인 관계로 어쩔수 없이 헤드폰을 껴야 하는데 이 헤드폰이 문제다. 헤드폰을 끼게되면 몸을 뒤척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자면서 자주 몸을 뒤척이는 사람일 경우에는 절대 해서는 안될 행위이기도 하다(특히나 내 여자친구처럼 옆으로 누워자는 사람은 하고 싶어도 절대 못한다.또 은근히 소심한 면이 있는 나는 헤드폰을 자주 끼면 난청이 될 수 있다는 경고기사를 읽은 후로는 그걸 무시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헤드폰을 피하기도 한다.)

 

맨눈으로 밤을 지새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 때 나의 Best Choice는 언제나 푸르니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이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prelude를 감동에 떨며 듣다가도 3번의 sarabande 쯤 가면 난 어느새 잠들어 있다.(대체 난 언제쯤이나 가야 맨정신으로 무반주 첼로조곡 전부를 들을 수 있을 건지 원! )

 

잠이 오지 않아 TV를 어쩔수 없이 봐야할 경우 난 주로 홈쇼핑을 주로 본다. 난 원래가 홈쇼핑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여자친구가 홈쇼핑을 즐기는 관계로 자연히 그쪽 세계(?)를 알게 되었고 또 그게 은근히 감칠 맛을 준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 후론 심심할때면 홈쇼핑을 본다. 물건 팔아볼려고 온갖 미사여구로 무장된 호스트들을 지켜보는건 웃찼사나 개콘을 보는것 보다 나한텐 더 큰 재미를 가져다 준다.

 

홈쇼핑을 보다가 지겨워져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나에게 충격적인 영화로 다가온게 있었으니 그게 바로 <허공에의 질주>였다. 볼려고 하던 영화가 아닌지라 극 초중반부터 보게 되었는데 보는 도중 "아 물건이다. 그것도 제대로 된... 왜 이걸 이렇게 늦게 봤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예전에 리버 피닉스가 약물중독으로 요절했을때 그저 아이다호의 그 압도적으로 잘생긴 배우 정도로만 여겼는데 이 영화를 본 후 새삼 리버 피닉스의 영화들을 찾아 보게 될 정도로 강력한 영화로 다가왔다. 영화 자체로도 뛰어났지만 음악은 더 훌룡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특히나 리버가 줄리어드 오디션에서 친 모차르트의 Fantasy는 그가 그저 그런 배우라고 기억되기엔 너무 뛰어난 것이었다. 게다가 영화 전반에 흐르는 James Tylor의 의 멋진 가사와 함께 감동적인 엔딩은 영화의 주제를 실로 멋드러지게 압축해 보여주었다.

 

극 도중 리버(대니)가 음악 선생님인 필립스의 집에서 실내악 연주회가 열려 찾아가 볼려고 하자 리버의 아버지는 부르주아지의 속물근성이 판치는 곳이라며 가지말라고 강압적으로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1988년에 만들어진 영화임)에서도 이른바 Classics이 어느새 부르주아지의 음악으로 대변되어버린 현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게 다가왔다. 20세기 전반만 하더라도 고전음악(당시에는 아니었겠지만)을 듣는 청중은 자유로웠다. 음악을 듣는 내내 떠들어 대는 사람이 있었는가하면 먹을 것을 파는 사람도 있었고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무례해보이고 난잡해보인다.(아마 오늘날의 가수 콘서트장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진정한 음악의 역할이 아닐까한다.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것! 청중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음악을 이해시키는데는 그들이 그 음악을 진정으로 즐기고 있는가 하는데 있지 않을까?

 

토스카니니가 처음으로 자신의 연주회에서 무례하게 떠들거나 야유를 보내는 청중을 쫓아내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게 관행이 되어버려서 고전음악을 들으러 갈때는 격식을 차려야만 하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모든 사람의 음악을 소수의 사람의 음악으로 스스로 한정짓기 시작한  Classics은 정말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듣는 음악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영화에서 리버는 줄리어드의 오디션에 평범한 캐주얼 복장으로 참여한다. 다른 연주자들은 모두 격식을 차린 정장차림이지만 그는 그냥 면 Shirts에 청바지,겨우 보잘것 없는 작은 넥타이만 매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손끝에서 터지는 음악은 절대 Casual 하지 않았다. 오디션이 끝난 후에 심사위원이 말한다. "당신의 재능은 정말 뛰어난데 도대체 누구에게 사사받았냐고?" 사실 그는 누구에게도 사사받지 않았다. 그냥 그의 어머니에게 배웠을 뿐이고 스스로 재능을 닦아왔다. 그는 말한다. "이사를 자주 다녀서 여러사람에게 배웠다고...하지만 당신이 아는 유명한 누구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없다고."

 

얼마전 고클에서 양성식이라는 연주자가 이준호라는 청중이 올린 공연후기담으로 발끈해 한 적이 있다. 물론 연주자도 사람이기에 발끈해 하는건 결코 흠이 될 수 없다. 또한 이준호라는 군인이 올린 글 또한 다소 무례한 언사로 쓰여져 있는데다 오해의 소지도 충분히 줄 수 있는 글이었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의 글이 아닌 그 두 사람의 글 뒤에 올려져 있는 리플을 읽다 깜짝 놀랐다.

 

자신도 음악을 전공하고 있다는 한 여성분이 올린 글에는 <청중의 횡포>라는 말이 쓰여져 있었다. 언제부터 클래식이 아니 음악이 일방적으로 청중에게 주어지는 하사품이 되어 온 것인지.. 음악은 창조자와 청중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었던가? 위대한 작가였던 버지니아 울프의 우울증이 가장 심각해졌을 시기는 자신의 작품이 발표되고 독자의 반응을 기다린 때가 아니었던가?

 

요즘처럼 이렇게 청중이 철저히 무시되고 간과되어 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전문 평론가의 한 줄 기사에는 촉각을 곧두세우면서 가장 직접적인 교감을 나누어야 할 청중의 의견이나 반응은 마치 음악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무식한 자들의 헛 메아리처럼 치부해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아닌 우려가 내마음을 사로 잡았다. 양성식과 이준호의 논쟁의 핵심은 음악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다. 연주자는 자신들이 전문적으로 몇년에 걸쳐 스코어를 공부하고 연주해 왔기 때문에 그들이 더 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하다는 것이고, 청중은 이런저런 cd나 매체를 통해 다년간 그 음악을 들어왔기 때문에 청중들도 작곡가의 의도 쯤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두 사람 모두 틀렸다. 멘델스존의 의도는 그 자신 밖에 알지 못한다. 음악이든 책이든 일단 창작되어 공개되면 그것은 모두의 것이다. 실제로는 10정도의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다른 가치관과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창작을 무한대로 확대 재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핵심이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책에서는 네루다가 자신의 시를 연애편지에 무단 도용해 문제가 생기자 마리오에게 그 시는 내 것이니 함부로 여기 저기 쓰지 말라고 하자 마리오는 "아니오 선생님! 그 시는 그 시를 읽는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항변한다.)

 

그리고 연주자는 청중에게 존중받아야 할 존재지 존경받아야 할 존재는 아니다. 연주자로써의 존경은 청중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모든 연주자들이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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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키스

얼마전 신문기사에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전반에 불고 있는 말러 열풍에 대해 소개되었다. 이 신문기사에 의하면 오늘날의 말러 열풍은 전세계적이며 유수의 레코드 레이블, 지휘자, 오케스트라들에 의해 말러의 음악이 녹음되고, 연주되며, 공연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하고 부천 필하모니의 말러 사이클 연주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나또한 카페에서 감감님(deeew)의 엘리아후 인발의 공연후기담을 읽고 한동안 듣지 않았던 말러 CD를 꺼내 들었을 정도니까 새삼 말러 열풍에 대해 의심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오늘날의 세계는 말러를 듣고 연주하고 남기고 있다. 어떤 매체로든지 말이다.

신문에선 "오늘날 왜 말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사후 90년이 지나 100년 가까이 되어서야 비로소 말러의 음악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졌다라고 쓰고 있었다.

 

오늘날 왜 말러인가? 사람들이 베토벤과 모차르트만 듣다 이제 그만 질려 버린걸까? 아님 전세계의 언론/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는 유태 자본에 의해 유태인 작곡가에 대한 과잉된 홍보물의 결과일까?( 그동안 말러를 열심히 소개하고 연주한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레너드 번스타인 모두 유태인이다.) 그 모두 원인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만이 전부인건 아니다. 오늘날 불고 있는 말러 열풍의 본질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한다.

 

말러는 당대에 성공한 지휘자 겸 작곡가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 자신을 설명할 때 항상 자신은 고독하며 불행하다고 느꼈다.

말러 자신의 말을 잠시 빌려보자

 

"나는 고향이 없다. 세가지 의미에서 모두 그러하다. 즉 오스트리아에서는 보헤미안으로서 이방인이었으며,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서 이방인이었고, 유럽에서는 유태인으로서 이방인 이었다."

 

말러가 30세에 궁정 오페라단의 총감독으로 임명이 되자 당시 빈의 분위기는 당혹 그자체였다. 이 때의 분위기를 잘 설명한 자료가 슈테판 츠바이크(제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입니다.^^)의 <어제의 세계>라는 자서전에 잠시 나온다.

"어떻게 저렇게 젊은 사람에게 제일류 예술기관을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당시 빈의 당혹스런 분위기를 한마디로 대변해주고 있다. 그만큼 말러는 당시에 유명인사였고 성공한 예술가였다. 그런 그가 왜 자신을 항상 불행하다고 생각했을까?

말러의 정신분석을 담당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말러가 유년시절에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경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 고통이 그를 지배하고 있어서 때로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이어져 자살 충동까지 느낀다고 고백하고 있다. 부유했지만 고집스럽고 강직했던 아버지는 연약하기만 한 어머니를 매우 거칠게 다루었고 말러는 이를 보고 아버지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자신은 아무런 힘이 없는 아이였기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고는 짧은 가출이 고작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이런 유년시절의 경험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지나친 편애로 나타났고 또한 연이은 형제들의 죽음(14형제중 10명이 죽고 살아남은 남은 형제들도 불행했다.)으로 그의 마음속에는 씻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남았다.(이렇게 나만 행복하게 살아서는 안되지 않을까?하는 심정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이는 말러가 평생 좋아하던 작가가 쇼펜하우어,니체,도프토예프스키였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이란 책에 보면 도프토예프스키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인해 간질과 도박으로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죄책감에 대한 정신적 보상을 하려 했다는 재미난 정신분석이 나옵니다. 시간 되시면 읽어보시길)

 

말러의 음악을 한마디로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 난 슬픔이여 안녕이란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제목으로 표현하고 싶다.(물론 여기선 안녕이 Goodbye란 뜻이지만) 말러 음악의 특징은 온음계적 화성에 불협화음이 있는 화음을 집중적으로 사용하여 거기에서 선율을 만들어내는 선적 대위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불협화음의 요소로 인해  처음 말러를 듣는 사람은 웬지 거북하고 낯선 느낌을 자주 갖게 된다. 하지만 말러는 그런 불협화음안에 민속가극의 서정성을 부여함으로써 때론 매우 아름다운 선율을 창조해 내곤 한다. 특히나 제 5번 교향곡의 장송행진곡에 이은 아다지에토는 말러의 서정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즉 말러음악의 특징은 불협화음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절망감,고독,운명적인 비애를 강렬히 표출해 내지 않고 내면에서 조용하게 정화시켜버림으로써 슬픔을 인내하는 바로 그런 매력을 갖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인류가 대지에 두발로 선 이래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겪고 있지만 내면은 전혀 그러하지 못하다.

더이상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표현하고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모두들 민주주의라고 말하지만 그건 정치형태일뿐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건 고도로 조직화된 자본주의이다. 삶의 지배자가 봉건영주에서 거대자본으로 탈바꿈 했을뿐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살 수 없다. 단지 우린 거대 자본이라는 거대한 매커니즘속에 계속 자본을 확대 재생산해야하는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거대 자본에게 있다라는 것이 옳은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말러 자신은 외면적으로는 성공한 유명인사였고 예술가였지만 내면은 항상 고독하고 가난했다. 그래서 그는 의지할 상대가 필요했고 그것을 3명의 여인에게서 찾았다.

 

1. Marie Hermann ................  말러의 어머니

2. Alma Marie Schindler........  말러의 아내

3. Maria Anna......................  말러의 첫째 딸

 

주목할 점은 이 세 여인의 공통점이 Marie 라는 이름에 있다라는 것이다.즉 말러의 삶을 지배했던 이  세여성의 이름이 우연히 Marie 였다는 것은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해 버리기는 힘들다. 또한 단지 Mother 컴플렉스에 의한 보상심리에 불과했다고 해버리기엔 말러 자신이 주는 예술적 영감으로 볼 때 그렇게 치부해버리는 것 또한 받아들이기 힘들다.

말러 자신이 카톨릭 교도였기 때문에 이 마리아 라는 이름은 단순한 이름 이상의 의미가 분명히 있었다고 보는게 옳다. 영원히 방랑해야하는 운명을 가졌다고 믿었던 말러 자신의 마지막 영혼의 안식처가 바로 영원한 모성을 상징하는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러의 마지막 유언이 "모차르트! 모차르트!" 였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차르트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만의 Requiem을 창조해내었듯이 말러 자신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마리아 안나(첫째딸을 선홍열로 잃었다)를 잃은 후에 말러는 극심한 공황상태를 겪었고 건강도 차츰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대지의 노래를 교향곡 9번으로 하지 않았던 것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때문이었다. 이렇게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말러가 마지막으로 지휘한 곡은 부조니의 <나의 어머니의 무덤에서의 자장가>였다는 것은 그가 어느 정도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영혼의 안식처를 준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911년 말러는 빈에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마리아 안나의 옆에 묻혔다. 영원한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말러에게 열광하는 것은 우리 또한 영원히 방랑할 수 밖에 없는 보헤미안 신세가 되어버린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물질은 넘쳐나지만 세상 어디에도 우리의 작은 영혼을 의지할 만한 곳이 없게 되어버린 각박한 세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잃어버린 우리가 그나마 위안 받을 수 있는 곳이 말러의 음악밖에 남지 않은건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제가 추천하는 음반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 레너드 번스타인(뉴욕필)/ 카랴얀/클라우디오 아바도

말러 교향곡 5번: 카라얀(빈필)/바비롤리/레너드 번스타인

말러 교향곡 6번: 피에르 불레즈/번스타인(빈필)

말러 교향곡 8번: 게오르그 솔티/브루노 발터

말러 교향곡 9번: 카라얀(1982년 녹음)/번스타인(1988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말러와 개인적으로 친했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과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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