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라쟈르 기차역
어제 동생의 배웅을 위해 기차역에 나갔다.
낯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고 각자의 만남과 이별을 준비하는 곳.. 기차역
동생을 보내고 돌아서는 내 발걸음은 매우 무거웠다. 떠나는 사람에게 기차역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곳이지만 남겨진 사람에겐 비로소 떠난 사람의 텅빈 공허감을 낯선 공기로 채워야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배웅을 하러 가는건 죽어도 싫다. 떠나는 사람의 등을 말없이 지켜봐야만 한다는 건 너무나 괴롭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 모두 그 기차여행이 그들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레오니드 코간과 클라라 하스킬! 동생을 보낸 그 기차역에서 난 두 사람을 보았고 그들의 마지막 기차여행에 잠시 동행해보았다.
레오니드 코간! 그처럼 서글픈 비브라토를 낼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또 있을까?
코간이 활동하던 시기는 미/소의 냉전이 극에 달해있을 때였다. 2차 세계대전이후 잠시간의 평온이 끝나고 미/소간의 보이지 않은 전쟁은 시작되었고 1961년 소련이 보스토크 1호를 쏘아올림으로써 우주 경쟁시대를 열었다. 우주 비행사였던 가가린이 "지구는 푸르렀다. 하지만 그곳에 신은 없었다!"라는 명언과 함께 무사귀환함으로써 그 보이지 않는 전쟁은 비로소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고 그 이후 세계는 민주주의(실제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국가 사회주의)라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 치열한 체제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체제를 선전하는 것으로 문화/예술 만한 것이 있을까? 그들은 자신의 체제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문화/예술을 선전물로 적극 도입하게 되었고 뛰어난 연주가들은 그들 선전의 훌룡한 도구로 자리 잡았다.
코간이 활동하던 시기에 소련이 자랑하던 바이올리니스트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였다. 소련이 서방세계의 선전물로 사용하는데는 오이스트라흐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했다. 선전물에 두 사람이 등장하기엔 그 자리가 너무 비좁기 때문이리라. 항상 화려한 전면에 나서는 것은 오이스트라흐였고 코간은 그의 커튼 뒤에 묻혀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그런 코간에게도 드디어 세상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브뤼셀에서부터 그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대상을 거머진 코간은 이후 열린 파리/런던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고 모든 성공한 소련 연주자들의 순례코스이기도 한 미국 공연에 올랐다.1958년 보스턴 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미국 청중으로부터 장장 20분간에 걸친 커튼 콜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 이후 소련이 자랑하는 피아니스트인 에밀 길레스의 누이와도 결혼하게 되었고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피아노의 에밀 길레스와 함께 TRIO를 결성하게 됨으로써 코간의 화려한 전성시대는 최고조에 올랐다.
그의 이러한 전성기도 예기치 못한 파국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들의 잦은 서방세계로의 화려한 연주여행은 KGB의 감시를 필연적으로 불러왔고 코간에게 그 감시 임무가 주어졌다. (코간은 소련내에서도 소수 그룹이었던 유태인이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이런 요구에 불복할 수 없었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스트로포비치의 KGB 감시문건이 우연찮게 로스토로포비치에게 알려지면서 그들의 우정은 산산히 금이 갔고 카잘스,티보, 코르토이후 최고로 평가받던 TRIO는 해체되었다. 그 이후 코간은 사과를 위해 수차례 로스트로포비치와의 면담을 요구했으나 단 한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이후 로스토로포비치는 서방으로 망명하여 화려한 그의 명성을 계속 이어갔다.
코간은 그 이후 모든 의욕을 잃고 후학 양성에만 힘을 쏟게 되었다. 화려한 조명을 벗어나 다시 그가 원래 살던 어둠의 커텐뒤로 찾아 들어간 것이다. 1982년 12월 빈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탄 새벽 기차는 원래 순환기 장애가 있던 코간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고 그 기차가 코간의 고향부근인 우크라이나의 한 역을 지날 무렵 기차 승무원이 텅빈 기차안에서 싸늘히 식어있는 코간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사람들은 흔히들 코간의 바이올린 음색을 서늘하다고 말한다. 하이페츠의 음색을 혹한의 한기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왜 코간의 음색은 그저 서늘하다고만 말할까? 혹시 그 대답이 코간이 하이페츠에 감히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난 편견을 버리고 그의 음반을 다시 들어보라라고 말해줄 수 밖에 없다.(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참고로 네이트 사전 검색에 나온 코간에 대한 설명을 들자면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 우크라이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출생. 모스크바음악원을 졸업하였고 1951년 엘리자베트국제콩쿠르 1 위 입상으로 서방측 여러 나라에 그 존재가 알려졌고 55년부터 활발한 국제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D.F. 오이스트라흐 이후의 거장(巨匠)으로서 대성(大成)이 기대되었으나 기교적으로는 탁월하면서도 표현에는 깊이를 갖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52년 이후 모스크바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고 많은 후진을 육성하였다.
난 하이페츠의 연주를 감히 싫어한다고 말하는 편이다.(니가 하이페츠에 대해 뭘 알아! 라고 대꾸하면 할 말은 없다) 그의 연주는 정말 기적적이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난 그의 연주가 기적적이고 대단히 특출나기는 하지만 그의 음악을 좋아할 수는 없다라고는 말할 수 있다. 그의 정확하고 현란한 기교에는 감히 언급할 수 없지만 그의 연주를 듣다보면 난 마치 나의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갈갈히 찢겨나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음악은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래서 난 그를 좋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코간은 하이페츠와는 다르다. 그의 음악 또한 싸늘한 한기가 느껴지고 고음역에서는 찢어질듯한 현의 비명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하이페츠의 혹한의 한기와는 다른 약간 쌀쌀한 11월의 차가움 정도랄까.... GUNS N' ROSES가 노래한 이 그에게 딱 맞는 이미지라고 생각하면 적확한 표현이리라. 바로 그 느낌! 그게 코간이다.
심장마비로 죽어가던 코간의 동공에 새겨진,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영상은 무엇이었을까? 시대가 만들어낸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비애와 절친했던 그의 동료를 배신해야만 했던 슬픔, 또 그로 인해 깊이 각인되버린 고독의 상처 그 모두가 어우려져 녹아들아간듯한 고향 우크라이나의 황량한 겨울 풍경이 아니었을까? 어둡고 싸늘히 식어버린 차가운 새벽 기차안에서의 홀로 죽어간 코간!
정말 죽음마저도 코간 답다.
PS> 혼자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을때 반드시 코간의 CD를 챙겨가시길..
그가 정말 도움이 될 겁니다. 여러분의 여행에 ...
모네의 생 라쟈르 기차역 그림을 함께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