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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베토벤 : 교향곡 9번 - 푸르트뱅글러 - Great Recordings Of The Century
횡엔 (Elisabeth Hongen) 노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 / 이엠아이(EMI) / 1998년 10월
평점 :
절판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때론 靈感이라 불리는 기묘한 감정상태를 경험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74살의 늙은 괴테가 고열을 심하게 앓고 난 후 울리케 폰 레베초프라는 19살의 젊은 처녀를 보고 첫눈에 사랑을 느낀 후 그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의 상실감을 <마리엔바트 시가>에 싣거나 방랑의 길에 올라야 했던 루소가 한 들판의 나무아래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영감에 빠져 위대한 저작 에밀을 탄생하게 했던 그런 영감에는 도저히 못 미칠지라도 어느날 새벽 알 수 없는 영감에 사로잡혀 여자친구에게 어처구니 없는 연애 편지를 쓴다거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시를 끄적인다는 등의 그런 황당한 감정의 과잉상태에 빠져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거라 믿는다.(아님 나만 그런건가? 그런거야?)
나에게 그런 영감으로 다가온 음악이 있었다.
어느 따분한 일요일 오후였다. 읽고 있던 소설은 지겹기 짝이 없었고(앙드레 말로의 왕도로 가는 길이었다) TV나 볼까 하고 채널을 여기저기 틀어보니 드라마 재탕만 부지기수였다.
갑자기 너무 심심해진 난 ‘음악이나 듣자’ 며 오디오에 CD를 걸었다. 아주 오래 전 산 CD였지만 한동안 JAZZ만 듣고 있던 터라 꽤나 묵혀두어서 꼬장꼬장한 몰골을 띄고 있었다.
Furtwangler의 베토벤의 교향곡 제 9번 이었다.
한동안 듣고 있던 난 어느새 CD플레이어가 지익하는 소리와 함께 조용히 멈추자 작은 손박수를 치고 있었고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었다. 순간 누군가 방문을 열어 나의 이 꼬락서니를 지켜 본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고 난 황급히 이불을 뒤집어 썼다. 뒤집어 쓴 이불 속에서도 감동은 멈추지 않았고 난 빨리 내 감정을 추스려야 겠다는 일념 뿐이었다.
그게 나와 Furtwangler의 첫만남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 믿는다.
“에이 또 베토벤이야 게다가 또 푸르트벵글러냐?” 그렇다 또 베토벤이고 게다가 또 푸르트벵글러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나에게 1951년 바이로이트 실황앨범은 이다.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바이로이트 실황은 역사적 배경만을 빼고 보자면 결점투성이의 엉터리 연주라고,, 3악장의 간간히 내비치는 금관의 실수는 접어두고서라도 어처구니 없을 만큼의 느린 템포설정에 4악장 Finale의 Chorus가 한 템포 늦게 들어오는데다가 오버한 Schwarzkopf의 내지르는 괴성소리라니..
맞다. 모두 다 맞는 사실이다. 바이로이트 실황은 연주 자체로 보자면 전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곳에는 완벽함을 뛰어넘은 위대한 영감이 존재한다.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을 작곡할 당시에는 매우 힘든 상황에 놓여있었다. 1812년 교향곡 7,8번을 연이어 발표한 이후로 그는 조카의 교육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수많은 여인들과 사랑에 빠졌지만 결국 가정을 이루는데는 실패했고, 또 자식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조카에의 집착은 유별난 것이었고, 심지어 조카의 친 엄마를 상대로 그녀의 좋지 못한 행실을 빌미 삼아 조카의 양육권 분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결국 그의 조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조카의 자살미수로 이어졌고 이는 그에게 커다란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또한 그의 고질적인 귓병은 더욱 악화되어 남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필기장이 필요했고, 폐렴,황달,눈병,위장장애가 거듭되어 나타나면서 그를 더욱 괴롭혔으며 경제적으로도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또한 당시 로시니의 오페라가 크나큰 성공을 거두면서 베토벤의 창작열은 이제 끝이 난게 아닌가하는 세간의 비판도 자부심 높던 그를 더욱 힘든 상황으로 몰아갔다.
1824년 2월 베토벤은 이런 고통과 절망감을 딛고 서양음악사 사상 불멸의 저작 <합창교향곡>을 완성했던 것이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어떤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 기꺼이 나치당원이 된 카라얀과는 달리 순수 아리안계의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치 Goebbels의 주도하에 벌어진 나치의 선전전술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모든 음악인들이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독일을 빠져나가는 상황에서도 “나치 휘하의 독일보다 더 절실하게 베토벤이 필요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라며 기꺼이 사랑하는 조국의 옆에 머물렀다. 패전 후 그 이유로 비 나치 심리재판에까지 올라야만 했고 1947년에 이르러서야 그는 나치 동조 혐의에서 벗어나 연주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51년 연합국의 폭격으로 부서진 바이로이트가 처음으로 다시 개관하는 날 그는 기꺼이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선택했다.
소프라노였던 슈바르츠코프가 회상하듯이 그 날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은 신경쇠약에 걸리기 일보직전의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바그너의 링 사이클이 주로 나치의 주요 선전물이었고(바그너는 인종주의자였고 지독한 반유태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로인해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또한 연합국의 좋지 못한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게다가 패전 이후 처음 갖는 바그너의 성지에서의 독일인의 위대한 영혼 베토벤이 연주 된다는 것! 세상의 시선은 바이로이트에 집중되었다.
장엄한 폭풍과도 같았던 1,2악장이 끝나고, 지난 전쟁의 참화를 암시하는 듯한 너무나도 슬픈 3악장의 아다지오가 끝이 났다, 그리고 4악장!
Edellmann이 쉴러의 환희에 부침을 엄숙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O Freunde, nicht diese Tone!
Sondern lasst uns and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
(오, 벗이여, 이 노래가 아닌 더 기분 좋은, 더 환희에 넘친 노래를 함께 부르자꾸나)
그리고 이어 터지는 4명의 독창자들에 의한 변주, 그리고 이은 대규모 합창!
Ja, wer auch nur eine Seele
Sein nunnt auf dem Erdunrund!
Und wer’s nie gekonnt der stehel
Weinend sich aus diesem Bund
(옳거니 다만 한 사람의 영혼일지라도 지상의 벗으로 부를 사람을 가진다면! 그러나 그것 마저도 가질 수 없는 자는 눈물을 흘리며 살며시 떠나는 것이 좋다.)
….
그리고 코다, 마지막 프레티시모!
우리 손을 잡자, 억만의 사람들이여 이 입맞춤을 온 세계에 주자꾸나!
형제여, 별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버지가 계시나니
엎드려 기도할까? 억만의 창생들이여
창조주를 느끼는가? 세상 백성들이여
별하늘 저편에서 주를 찾아보자꾸나!
별들 위에 주님은 계시나니!
푸르트벵글러의 이 휘몰아치는 코다가 쉴러의 환희에 부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단 말인가?
난 이 4악장을 들었을 때 합창교향곡이 빈의 케르트나토아 극장에서 처음 초연될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귀를 먹은 베토벤의 심취한 지휘 모습이! 베토벤 자신은 귀를 먹었기에 연주자체는 또 다른 지휘자였던 Umlauf의 지휘를 따랐다. 4악장의 장엄한 코다가 끝이 났을 때 청중은 이 위대한 작곡자에게 열렬한 박수로 하염없는 존경심을 표현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마냥 등을 돌리고 서있던 베토벤에게 앨토 가수였던 Frau Unger 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청중쪽으로 돌려 세웠다. 그리고 떨리는 몸짓으로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베토벤!( 영화 불멸의 연인을 보면 베토벤의 이런 모습이 잘 표현되었다.)
1951년 바이로이트!
전쟁은 독일과 연합국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전쟁은 그것이 가해자였건 피해자였건 모두 소중한 사람들을 잃게 만들었고 서로의 불타오르는 증오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지금 바이로이트에서 베토벤은 말한다. 이제 우리 그만 이런 증오의 노래는 그만 부르고 환희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암! 슬픔이 넘쳐흐르는 3악장의 아다지오에서 전쟁을 겪은 사람이라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호른을 맡고 있던 연주자가 격정에 빠져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슈바르츠코프가 이 위대한 영감에 취해 오버하며 괴성(?)을 지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 그들에게 그것이 형편없는 연주라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음악(音樂)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음학(音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지 말고 분석하려 하지 말고 그냥 just listen하자!
푸르트벵글러의 마력에 한번쯤은 취해 보는 것! 이성을 마비시키고 푸르트벵글러의 흐느적거리는 지휘봉을 따라 지나친 감정의 과잉상태에 빠져보는 것!
그것이 음악을 진정 즐기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