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키노 > 영화에서 발견한 재즈의 시대 [1] - <스윙걸즈>


To swing or not to swing? 스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스윙걸즈>가 던지는 질문이 혹시 누군가의 인생을 좌우할지도 모른다. 재즈의 공작으로 알려진 듀크 엘링턴 가라사대, “스윙이 거기 없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스윙걸즈>는 재즈의 맛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스윙의 즐거움과 흥분과 미각을 알아차리게끔 해주는 애피타이저 같은 영화다. 재즈 음반 한장 없어도, 스윙이 뭔지 알지 못해도 재즈를 즐길 수 있다. 그 첫걸음은 <리플리>의 감미로운 쿨 재즈 선율일 수도, <버드>처럼 격렬하고 뜨거운 비밥 재즈일 수도, <스윙걸즈>처럼 초심자들이 가볍게 흥얼대며 장단을 맞추는 스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첫걸음을 어디서 시작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횡단보도에서 나오는 시그널 뮤직인 <Coming Through the Rye>에서도 재즈를 발견하는 ‘스윙걸즈’의 발랄함만 있다면 되는 거 아닌가.

느낌으로 따라가는 빅밴드의 경쾌한 선율

1930∼40년대 스윙의 시대 - 야구치 시노부의 <스윙걸즈>

“재즈는 이해하기보다는 느끼는 음악이어야 한다.” - 아트 블래키

이 영화 한편으로 바로 스윙을 알게 됐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다만 이 영화 한편으로 스윙이 뭔지 어슴푸레 느꼈다고 한다면 그건 참말일 것이다. 재즈의 초심자로 하여금 아껴둔 쌈짓돈으로 중고 색소폰을 사고 싶은 마음을 일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즐겁다. 식중독에 걸린 학교 밴드부 대신 급조된 보충학습반 아이들이 재즈에 눈을 뜨게 된다는 내용의 <스윙걸즈>(2004)는 재즈의 역사를 혼자 써내려간 마일스 데이비스로부터도, 재즈 마니아를 식별하는 표지인 찰리 파커로부터도, 이름만 재즈 카페지 재즈다운 곡은 하나도 틀지 않는 카페에서 겨우 인색하게 흘러나오는 쳇 베이커나 스탄 게츠로부터도 시작하지 않는다. 바로 듀크 엘링턴의 <Take the A Train>으로 시작한다.

급조된 밴드부가 처음 연습하는 곡이기도 하고, 맨 마지막 밴드부 경연대회에서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스윙 소녀’의 연주곡이기도 하며 1930∼40년대를 풍미한 ‘스윙의 시대’를 대표하는 곡이기도 하다. 이 시대는 10명 이상의 대규모 밴드가 연주하는 빅밴드 시대였다. 빅밴드를 대표하는 이름들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것이 바로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베니 굿맨, 글렌 밀러 등이다. <스윙걸즈>는 이 빅밴드의 시대에서 유독 우리의 귓가에 오랫동안 친숙한 선율을 남겼던 글렌 밀러의 <In the Mood>, 베니 굿맨의 <Sing Sing Sing> 등으로 재즈가 어렵기만 한 음악은 아니라는 점을 각인시킨다. 짧은 검은 스타킹 차림으로 발로 박자를 맞추는 우에노 주리(스즈키 토모코)의 경쾌한 스텝처럼 말이다. 그건 굳이 배우지 않고도 느낌만으로도 따라할 수 있는 선율이다.

재즈의 모차르트로도 불린 듀크 엘링턴은 재즈 역사상 가장 멋쟁이였고, 쉴새없이 떠오르는 멜로디로 재즈의 아름다움을 알린 장인이었으며, 데이브 브뤼벡(<The Duke>)과 스티비 원더(<Sir Duke>)까지 곡을 써서 헌정할 정도로 존경받는 예술가였다. 그의 빅밴드엔 자니 호지스(알토 색소폰), 벤 웹스터(테너 색소폰), 지미 블랜튼(베이스) 등 재즈계의 명장들이 수십년간 몸을 담았다. 1941년에 녹음된 <Take the A Train>은 지금 들어도 온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흥겹고, 자기도 모르게 우에노 주리처럼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어 장단을 맞추게 되는 곡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곡이 실린 <In A Mellotone> 앨범에 대해 “진정 뛰어난 음악이 불현듯 내 몸에 다가왔을 때, 어디에선가 조용히 샘솟는 깊은 공감과 넉넉한 자비”라고 썼다(<재즈 에세이>). 듀크 엘링턴이 우아하면서도 재치있는 피아노 선율로 시작하면, 바로 색소폰 파트가 그 선율을 받아서 멜로디로 진행시키는 라인은 듣기만 해도 설렌다. 우에노 주리가 자신의 왼편에 있는 색소폰 파트의 친구들을 정겹게 바라보며 음정도 안 맞는 선율을 불 때, 그 표정은 얼마나 상쾌하면서도 아름다운가. 그들의 서툰 연습 덕분에 스윙 소녀들이 눈에 갇힌 기차 안에서 라디오 선율에 맞춰 단 한명의 관객을 위해 연주한 <Take the A Train>은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스스로 흥겨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스윙의 정신이 거기에 있다(너무 ‘일본적인’ 일사불란함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연주회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은 당연히 스윙시대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베니 굿맨의 <Sing Sing Sing>이다. 이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다. 다만 그 감동의 크기는 예상하기 어렵다. 카운트 베이시 악단처럼 원초적이고 화끈한 스윙의 리듬은 없지만, 각 솔로 파트를 독립시켜 악단의 최상의 기량을 뽑아내는 감각이 있다(그래서 스윙 소녀들의 개성이 두루 발현될 수 있다). 맥주광고로도, 숱한 영화의 배경음악으로도 쓰여 귀에 유독 익은 멜로디다. 듀크 엘링턴으로 가기 위해 베니 굿맨을 우회로로 택할 수도 있다(물론 찰리 크리스천과 함께한 진지한 작업도 있지만). 스윙 소녀들은 우리가 재즈의 정문이 높게 느껴질 때, 친숙하게 타고 넘을 수 있는 담장으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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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2번 & 차이코프스키 : 피아노 협주곡 1번 - DG Originals
차이코프스키 (Peter Ilyich Tchaikovsky) 외 작곡, 카라얀 (Herbe / DG / 1999년 6월
평점 :
품절


 


 

“저는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아요. 모든 것이 사라졌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입니다.”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 자신도 함께 끝나버렸다고 말입니다.”

Written by Joseph Conrad의 Lord Jim 중에서


시리우스(Sirius)란 별을 아시는가?

아름다운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 들 가운데 가장 밝게 빛나는 별로

백과사전에서 시리우스란 별을 찾아보면,

“시리우스는 큰개자리의 α별로, 태양에서 8.7광년 떨어진 분광형 A1형의 주계열성입니다. 시등급 -1.5등급으로 전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별(태양을 제외하고) 중 가장 밝습니다. 시등급 8.7등급의 동반성을 가지고 있는 안시쌍성으로 두 별은 49.98년을 주기로 공전하고 있습니다.”라는 친절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수많은(?)음반 가운데서도 유난히도 빛을 발하고 있는 시리우스 같은 녀석이 하나 있다.

 

 그 녀석은 바로 요 녀석으로



Sviatoslav Richter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함께 커플링 되어있는 정말 정말 매력적이고 황홀한 음반이다.

언젠가 음악 칼럼니스트 정만섭씨가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조금만 훈련된 음악 애호가라면 음반을 처음 듣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것이 Richter의 연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리히터는 아주 강력한 개성을 소유한 피아니스트입니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개성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개체가 가진 고유한 특성이란 말로는 설명되어 질 수 없는... 뭐랄까? 압도적인 존재감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듯 하다.

 

가끔 나는 리히터의 존재감이라는 것은 피아니스트들에게는 지독한 <악령>에 버금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종종하게 된다. 우린 ‘Liszt 나 Paganini의 연주가 정말 대단했다.’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들의 연주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그저 문헌으로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리히터의 연주는 어떠한가? 그는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살아남아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에게 경외와 절망을 함께 안겨다 주고 있다.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2

Conductor: Stanislaw Wislocki

Orchestra: Warsaw Philharmonic Orchestra


리히터: 나는 내가 녹음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다시 들었지. 작품 그 자체의 수준에 상응되는 제법 잘 된 연주였어.


: 정말 막막하기 그지없는 연주셨습니다. Maestro! 투우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마에스트로께서는 Matador셨습니다.

붉은 물레타(muleta) 하나로 작곡가와 청중과 피아니스트들을 유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달아오른 심장에 차디찬 검을 꽂으셨지요.

 

연주가 끝난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고,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 자신도 함께 말이지요


Tchaikovski Piano concerto NO. 1

Conductor: Herbert Von Karajan

Orchestra: Wiener Symphoniker


리히터: 난 원래부터 카라얀을 좋아하지 않았네. 내가 그를 싫어하는 이유는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지. 나와 그는 함께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함께 녹음한 바가 있었는데, 이 녹음에는 악보를 터무니없이 잘못 해석한 부분이 남아있다네. 그 오류는 오로지 카라얀의 고집 때문이었지. 제 2악장의 카덴차가 끝나고 주제가 회귀하는 곳이 있는데, 내가 카라얀에게 상박(上拍)을 지시해 달라고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자를 맞추기를 거부해 버렸지. 나는 그저 리듬의 정확성을 요구했을 뿐이었는데도 그는 철저히 나를 무시했어! 정말 고약한 일이었지.


: 네! 그런이유로 몇몇의 음악애호가들은 마에스트로의 이 녹음을 그다지 신통치 않게 생각하더군요. 하지만 마에스트로께서는 전혀 굴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카라얀의 고집에 팽팽히 맞서시더군요. 그래요! 마치 동. 서 진영간에 벌어진 냉전(COLD WAR)같았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아름다운 선율안으로 두 분의 뜨거운 열정과 힘이 느껴지던데요. 두 분간의 미묘한 신경전으로 인해 특히 1악장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않게, 장엄하게)는 마치 음표의 융단폭격과도 같았습니다. 전 오히려 그 부분이 맘에 듭니다만...


리히터: 하하.. 자네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 그래! 그런데 자넨 “어느 별에서 왔나?”(리히터가 신인 피아니스트들에게 종종 장남삼아 던지곤 했던 말)

 

나:  ^^;  Maestro...


PS> Richter의 음반에 관한 자신의 말은<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을 참조하여 제가 약간 손질하였음을 밝힙니다.

 

세간에선 흔히들 결정반이라는 말을 하는데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만큼은 바로 결정반이 존재하는듯 합니다. 바로 리히터의 이 음반이죠

반면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의 경우에는... 물론 이 곡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 곡에서 만큼은 아직 결정반이 나오지 않은 듯 합니다. 호로비츠, 지메르만, 베르초프스키, 아르헤리치, 라자르 베르만 등등 많은 명반이 있습니다만, "바로 이거다!"하는 결정반은 없죠. 리히터가 라흐 3번을 녹음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더욱 남는 부분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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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the First

물론 나는 이마빼기로 이 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만한 힘은 내게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결코 이 벽과 화해하지는 않겠다. 왜냐? 내 앞에 돌 벽이 서 있으나 나는 그걸 무너뜨릴 힘이 없다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


Written by Dostoevskii, 지하생활자의 수기 중에서


신화의 원형에 있어서 영웅은 언제나 버림받고,(Wasted) 상처받으며(Wounded), 그리고  정처 없이 어디론가 방랑을 떠나야만 하는 존재(Waltzing Matilda)로 묘사되어왔다.

이런 신화적 원형은 현대에 이르기 까지 여전히 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새로운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만약 영웅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힘을 발휘하는 숙명이 존재한다면, 그건 아마도 방랑자의 운명일 것이다. 운명에 쫓겨 사살당하는 삶이 아닌 운명을 지배하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절대적 자유가 필요하다.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부자유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는 고귀한 분노를 머금은 채 방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영웅에게 주어진 전사의 삶이다.


난 21세기에 있어서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남은 Roman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방랑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헤르만 헤세는 방랑자를 이렇게 노래했다.


“방랑자는 인간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향락을 누리는 사람이다. 기쁨이란 한 때 뿐이라는 걸 머리로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직접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방랑자는 잃어버린 것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한 때 좋았던 장소에 뿌리를 내리려 안달하지 않는다.”


또한 방랑은 카프카에게 있어서는 이러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나도 몰라” 나는 말했다.

“여기를 떠날 뿐이야, 여기서 나가는 거야 어디까지라도 가보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어.”

“그럼 가실데가 있으시군요?” 하인이 물었다.

“암! 그럼.” 나는 대답했다.

“방금 말하지 않았나. 여기서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내 목표야!”


서두가 너무 길었는데... Tom Waits 도 그런 방랑자의 운명을 타고났다라는 단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Tom Waits



그의 운명은 “1949년 캘리포니아 포모나(Pomona)의 달리는 택시 안에서 태어났다.”라는 단 한마디의 말로 요약되어 질 수 있다. 그 후로도 그는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낡은 차 안에서 기거해야 했으며, 69년 L.A.의 트라우바도(Troubadour)에서 열린 그의 첫 공연이 열릴 때까지 차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느새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거리의 부랑자요, 방랑자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언제나 끊임없이 부유해야만 하는 도시 빈민의 삶에 강한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들풀같은 노래 안에는 수많은 부자유에 맞서 기꺼이 싸우려는, 강인한 삶에의 의지와 방랑자의 고귀한 분노가 녹아있다.


영화 바스키아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바스키아(Basquiat)"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이 영화는 거리의 부랑자이자 포스트모던의 위대한 화가였던 Jean-Michel Basquiat의 생애를 그린 전기영화로, 어디에서도 소속될 수 없었던 방랑자 바스키아의 삶을 너무나도 잘 그려내고 있다. 한  쪽에선 노예적 삶을 위해 자신의 창조적 재능을 부유한 백인들에게 팔아먹고 있다는 비판을 다른 한 쪽에선 그저 마약에 찌든 'Nigger' 낙서쟁이에 불과했던 바스키아는 이중적 삶에의 정체성 혼란으로 괴로워하고 있던 차에 유일한 친구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앤디 워홀의 죽음을 맞게 된다.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워홀의 영상을 지켜보면 소리 없는 절규를 부르짖던 바스키아의 눈물이 Tom Traubert's Blues과 함께 유유히 흐른다.

 

Tom Traubert's Blues

 

Wasted and wounded, it ain't what the moon did
Got what I paid for now
See ya tomorrow, hey Frank can I borrow
A couple of bucks from you?
To go waltzing Matilda, waltzing Matilda
You'll go a waltzing Matilda with me

I'm an innocent victim of a blinded alley
And tired of all these soldiers here
No one speaks English and everything's broken
And my Stacys are soaking wet
To go waltzing Matilda, waltzing Matilda
You'll go a waltzing Matilda with me

Now the dogs are barking and the taxi cab's parking
A lot they can do for me
I begged you to stab me, you tore my shirt open
And I'm down on my knees tonight
Old Bushmill's I staggered, you buried the dagger
Your silhouette window light
To go waltzing Matilda, waltzing Matilda
You'll go a waltzing Matilda with me

Now I lost my Saint Christopher now that I've kissed her
And the one-armed bandit knows
And the maverick Chinaman and the cold-blooded signs
And the girls down by the strip-tease shows
Go, waltzing Matilda, waltzing Matilda
You'll go a waltzing Matilda with me

No, I don't want your sympathy
The fugitives say that the streets aren't for dreaming now
Manslaughter dragnets and the ghosts that sell memories
They want a piece of the action anyhow
Go, waltzing Matilda, waltzing Matilda
You'll go a waltzing Matilda with me

And you can ask any sailor and the keys from the jailor
And the old men in wheelchairs know
That Matilda's the defendant, she killed about a hundred
And she follows wherever you may go
Waltzing Matilda, waltzing Matilda
You'll go a waltzing Matilda with me

And it's a battered old suitcase to a hotel someplace
And a wound that will never heal
No prima donna, the perfume is on
An old shirt that is stained with blood and whiskey
And goodnight to the street sweepers
The night watchman flame keepers and goodnight to Matilda too


 

하루 위스키 1병과 2갑의 담배를 꾸준히 피어대야만 만들어질 것 같은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인간의 슬픔을, 존재로서의 고독을, 구속되어지지 않는 자유를 노래한다. 굳이 인간으로서의 톰 웨이츠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짐 자무쉬의 영화 <커피와 담배>를 한 번 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정말 있는 그대로의 톰 웨이츠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커피와 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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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친근한 것이고, 친근한 것이지만 아주 오래 전의 것이다.

Written by Sigmund Freud


오후 2시의 일요일은 언제나 따분하다.

오후 2시라는 의미는 나에게 있어서 권태를 벗어던지고자 무얼 하려고 하기엔 너무 이르거나 혹은 너무나 늦은 때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권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권태의 고수들(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이상, 다자이 오사무 등등)의 얘기를 귀담아 듣기로 했다.

“언제나 따분했을 것이 분명했을” 소로우는 나에게 ‘영혼이 자유로운 길’을 걸으라고 충고하고 있었다.


제길! 어디에 영혼이 자유로운 길이 있다라는 거냐? 어딜 둘러보아도 시커먼 아스팔트뿐이요. 그나마 간간히 보이는 잔디밭엔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푯말이 붙어있는데...


오랫동안 광활한 타타르의 스텝을 여행했던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작지 안에 다시 들어서는 순간, 문명의 소용돌이와 혼란, 동요가 우리를 압박하고 숨 막히게 만들었다. 공기는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았으며, 매순간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헐! 그럼 경작지 안에 죽치고 사는 나는 전신주에 목이라도 맬까? 영혼이 자유로운 길을 찾고자 산책을 나섰던 나에게 구원은 어디에도 없는거냐! 나의 비명어린 절규를 어디서 용케 들었는지 신은 나에게 다행히도 메시아를 내려주셨다. 내 눈앞엔 전 세계에서 산타클로스 다음으로 유명하다는 로날드 맥도널드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좀 쉬었다 가! 총각.” 나에겐 더 이상 그의 친절을 거부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고, 그는 단지 동전 몇 푼이면 맛있는 “아이스크림 콘”을 먹을 수 있다고 날 유혹했다.


그렇게 난 몇 푼의 동전으로 구원을 샀다.


돈으로 산 구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한적한 골목길에서 난 <두려운 낯설음>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 감정은 프로이트보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것에 더 가까웠다.


 

 

 

 

 

봄이면 아무렇게나 바람에 날려와 돋아난 식물로 가득 찬 정원의 화분들이 언제나처럼 화사했다. 오랑캐 꽃도 피어났고, 수선화도 피어났다. 그러나 한 낮의 정적과 화사함은 밤의 혼돈과 법석 못지않게 기이하게 보인다. 나무들이 거기 서 있고, 꽃들이 거기 서서 앞을 바라보고 위를 바라보지만 눈이 없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니 너무 끔찍했던 것이다.


To The Lighthouse 중에서


낯설음... 수 백번이나 오고 간 골목길이 그 순간 나에게 너무나 낯설었다. 마치 술잔을 앞에 대고 시시덕거리던 친구의 얼굴이 한 순간 전혀 낯선 이의 얼굴로 변모하는 것처럼, 나를 둘러싼 이 친숙한 공간이 한 순간 일그러지고 비틀어지는듯 한 왠지 모를 기괴함이 엄습했던 것이었다.


“뭐냐 이건... 이 불쾌한 감정들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거지? 무엇이 나를 이토록 불편하게 만들고 낯설게 느끼게 만드는 건가. 이 주위에 무언가 바뀐 게 있나?”


어디를 둘러보아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 구조물이나 사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늘 보아온 것처럼 그냥 그 곳에 있어야할 곳에 다 자리잡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다만 나만 변모한 것이었다.


손에 든 아이스크림 콘을 집어던져 버리고, 난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StingFragile을 들었다.



On and on the rain will fall


쉬지않고 비는 계속 내리리


Like tears from a star like

tears from a star


별에서 떨어지는 눈물처럼, 별에서 떨어지는 눈물처럼


On and on the rain will say

How fragile we are how fragile we are


쉬지않고 비는 계속 속삭이리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우리가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존재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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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3-27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네요~

보르헤스 2006-03-27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물만두님 르네 마그리트입니다. 음악이랑 잘 어울리는 듯 해서요 ^^
 
속마음을 들킨 위대한 예술가들 - 은밀하게 엿보는 그들의 숨겨진 욕망 읽기
서지형 지음 / 시공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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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은 표면임과 동시에 상징이다.

Written by Oscar Wilde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했다.

“욕망과 증오로 가득한 자에게 진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서지형씨는 “당돌하게도” 일그러지고 비틀어진 욕망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꽤나 “발칙한” 시도를 하고 있다.


게다가 그 시도가 “인류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들로 하고 있다면?


저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빈센트 반 고흐, 카미유 클로델, 살바도르 달리, 뭉크, 에곤 쉴레, 심지어 앤디 워홀에 이르기 까지 “예술”이라는 위선의 장막 뒤에 숨어있는 은밀하고 때로는 당혹스러운 실재의 “어둠의 욕망”들을 끄집어내어 “진실의 빛”밖으로 드러낸다. 이런 일련의 작업들은 분명 고통스럽지만 매력적이며, 흥미로운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한다. 마치 그 욕망을 품고 있다라는 것만으로도 "정신질환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보통사람과 정신질환자의 차이라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얼굴의 뒤로 숨기느냐 아니면 얼굴로 통해서 드러내느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철학자 Emile Cioran

"누군가 모든일에 인생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가 병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라고 말했다

우리의 세계는 결코 완벽하지 않으며, 우리의 자아 또한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다. 깨어진 거울의 파편처럼 일그러지고 비틀어져 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인 것이다.


모나리자에게서 다 빈치의 동성애 코드를, 고흐의 의자에게서 나르시시즘을, 달리에게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어내었다고 해서 그 위대한 작품들이 추악한 욕망의 배설물로 퇴락해 버리는 것일까? 황폐하고 혹독한 사막을 끊임없이 걸어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난 우리에게 오아시스의 신기루라도 없다면, 우리는 그 잔혹한 폭력 앞에서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하고, 바라며, 욕망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는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위대한 예술가로 불리는 그들 또한 우리와 동일한 것을 겪고, 상처 받으며, 욕망한다라는 진리를 이 책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도 “가까이 하기엔 아직은 너무나 먼” 자크 라캉(Jacques Lacan:1901-1989)과 함께라면 올 한해의 독서는 이 책 한권만으로도 풍족했다라고 난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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