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근하는데 고양이 식당 앞에 이쁜이가 앉아 있다. 밥그릇이 비어 있는 모양이다. 출근 시간이 빠듯해서 얼른 사료와 물을 챙겨 계단을 달려 내려간다. 마스크를 미처 못 챙겼지만 괜찮다, 차에 여분이 있으니. 차에 가방을 던져 놓고 뒷자리에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습식 파우치와 종이접시를 꺼낸다. 이쁜이 주려고 지난 번 마트 갔을 때 이쁜이가 좋아하는 걸로 미리 사두었다. 사람들 시선이 얼른 미치지 않을 만한 곳에 종이접시를 놓고 파우치 두 개를 쏟는다(이쁜이 배가 볼록한 게 또 아기를 가진 모양이다). 고양이 식당 빈 밥그릇에 사료를 채우고 물도 신선하게 갈아준다. 보통은 기다렸다가 종이접시를 회수하는데 오늘은 바빠서 접시는 나중에 치워야겠다. 


이쁜이는 라지의 자식은 아닌데 라지의 혈통이다. 마치 라지가 낳은 것처럼 삼월이와 자매처럼 닮았다. 눈이 땡그랗고 체구가 작고 호기심이 많고 납작코다(납작코는 라지의 혈통 특이다. 그리고 내가 고양이에게 사랑을 느끼는 대각선은 납작코다). 삼월이가 잘생기고 귀여운 편이라면 이쁜이는 귀엽고 귀엽다. 이쁜이의 구역은 내가 사는 다가구 주택 뒤쪽 작은 야산에 퍼져 있는 시골집들 어디이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나면 제 사는 동네로 신이 나서 부리나케 뛰어간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배부르고 따뜻해서 기분이 좋은지 뛰어가는 그 뒷모습만 보고 있어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항상 이쁜이를 걱정하는데, 그 조그맣고 눈 땡그랗고 납작코인 귀여운 삼색 고양이는 내 생각보다 훨씬 씩씩하고 야무져서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까지 훌쩍 떨어졌던 지난 겨울도 명랑하게 잘 살아냈다. 가슴 조마조마한 강추위가 지나가고 아무 탈 없이 평소처럼 밥을 먹으러 온 이쁜이를 다시 봤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오늘은 운이 좋았다. 이쁜이를 거의 이 주만에 본 것 같다. 내가 이쁜이를 좋아하는 게 맞는 것이, 나는 이쁜이가 어떤 부탁을 해오든 기꺼이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고 자주 느낀다. 심지어 부탁을 해오면 좋겠다고 기대하고 기다린다. 이쁜이가 사람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oonnight 2022-05-01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쁜이가 Joule님을 만나서 운이 좋았던 것 같은데 본인이 운이 좋았다고. 따뜻하신 Joule님 ^^

Joule 2022-05-02 16:10   좋아요 0 | URL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ㅋ
 

오늘 비가 내린다고 해서 연차를 냈다. 덕분에 출근시간이 지나서 일어났고 쇼핑몰을 어슬렁거리며 당장 구입하지는 않을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아몬드 몇 줌, 커피 한 잔, 삶은 달걀 두 개를 먹었다. 꽤 큰 비를 기대했으나 시시하고 되레 기분이 상할 정도의 강우량이다. 마음이 그냥 좀 차가워지는 정도의 강우량. 이런 날 누군가 나에게 부탁을 해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수월한 부탁이라 해도 간단하게 거절할 수 있을 것 같다. 식탁 위에 작은 얼룩을 슥 닦아내듯이.   


벽에 못을 박아 큰 거울을 벽에 거는 계획이 있긴 했으나 나는 지금껏 살면서 벽에 못을 한 번도 박아본 적이 없기에 얼른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여차하면 주말로 미룰 것이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그리고 더 나중으로 미룰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가.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피곤하고 지쳐 있을 내가. 흥! 그러거나 말거나. 그러고 보면 무책임하면 재미있는 것 같다. 마음이 가벼워서 짐승처럼 거침이 없다. 


고양이는 잔다. 고양이는 비가 오는 날이면 거의 하루종일 잔다. 아기는 잘 때가 제일 예쁘다고 하던데 고양이도 그렇다. 말 못하는 애들 특인 듯. 자는 모습이 귀여워 고양이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면 곧 갸르릉갸르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뜬다. 그럼 얼른 손을 치워야 한다. 잘 자고 일어났으니 이제 맛있는 걸 좀 먹자고 틀림없이 보챌 테니까. (보호자가 있는 경우) 고양이의 삶은 인간의 삶보다 훨씬 수월하다. 고양이는 귀여움으로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하긴 귀엽자고 태어난 동물이니까 그 정도쯤이야. 



저녁에는 미역국을 끓였다. 마늘, 국간장, 들기름으로 끓인 미역국.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oonnight 2022-04-14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미역국 사진에 눈을 빼앗깁니다@_@; 맑게 잘 끓이셨네요. 요리도 잘 하시는 Joule님^^ 들깨 안 넣은 미역국 좋아욧!
저도 모처럼 비 온다고 해서 기대 많이 했는데 제가 사는 곳엔 거의 안 왔어요. 대실망ㅠㅠ 바람은 굉장히 불었고요.

Joule 2022-04-14 16:58   좋아요 0 | URL
저도요! 들깨 안 넣은 미역국 좋아해요 저도^^ 물을 조금씩 여러 번 나눠서 부으면 좀더 맛있게 끓여지는 것 같아요. 단순한 재료로도. 주말에는 소고기 넣은 미역국 끓여 먹으려고 마케컬리에서 소고기 양지 주문했어요. 아티제 롤케이크랑 ㅋ
 

롯데리아에 가서 햄버거를 먹을까, 집에 가서 달걀 프라이 2개를 해서 김치랑 밥을 먹을까 고민 중이다. 드라이브-쓰루 매장이면 고민 없이 햄버거를 먹을 텐데. 집에 가면 삼월이가 또 북어를 달라고 조르겠지. 이렇게 갈팡질팡 고민하다 엉뚱한 것을 먹기도 한다. 얘랑 사귈까, 쟤랑 사귈까 고민하다 결국 다른 놈이랑 사귀는 것처럼. 고민을 한다는 건 둘 다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 어떤 선택을 해도 아쉬움이 남고 불만족스러울 거라는 뜻. 제길할, 도대체 뭘 먹어야 하는 거야!


엄마 집에 방 하나를 치워야 하는데, 그러자면 쓰레기가 꽤 나올 것 같아서 관할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OO 주유소 인근에 쓰레기종량제 봉투를 배출하는 곳이 어디예요?"

"마을회관 앞에 버리시면 수거해 갑니다."

(잠시 후) 

"조금 전에 전화드렸던 사람인데요, 로드뷰로 보니까 마을회관 앞에 쓰레기 배출할 만한 곳이 없더라고요. 표지판 같은 것도 없고요. 그냥 깨끗한 길이던데..."

"아... 아무것도 없어요? ... 그냥 거기다 버리면 수거해 갑니다."

"거기다 쓰레기봉투 갖다 놓으면 욕 먹을 것 같은데... 그냥 깨끗한 길이거든요."

"아... 종량제 봉투에 잘 분리하셔서 버리시면 돼요."

"재활용이면 분리를 하는데, 종량제봉투예요. 그냥 다 버리는."

"네, 그러니까 분리를 하셔야죠. 플라스틱 같은 거 넣으시는 분들도 있는데, 분리를 하셔야 해요"

"네? 종량제봉투를 분리하라고요? 음... 종량제봉투는 매립하는 거잖아요. 누가 종량제봉투를 분리하죠? 그리고 오염이 되어 있거나 스티커가 붙어 있는 플라스틱은 종량제봉투에 버리는 게 맞는데요. 깨끗한 플라스틱만 재활용하는 거잖아요. 종량제봉투에는 재활용할 수 없는 쓰레기 일체를 버리는 거고요."

"그래도 종량제봉투를 분리하셔야..."

"...... 네 감사합니다."


이런 대화가 나는 고단하고 버겁다. 이런 걸 과연 대화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래서 요즘 내가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네, 감사합니다". "대화를 종료하겠습니다"라는 의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oonnight 2022-04-1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제가 답답하네요ㅜㅜ 쳇바퀴도는 대화ㅠㅠ; 종량제봉투를 분리하라니. 무슨 얘긴가-_-

점심은 뭐로 결정하셨을까요? 궁금^^;

Joule 2022-04-12 15:46   좋아요 0 | URL
결국 제3의 메뉴 설렁탕을 골랐는데요. 집에 가야 할 사정이 두어 가지 생겨서 실제로 먹은 것은 달걀프라이 2개와 김치와 콩밥요 ㅋ

대화를 할 때는 상대방의 대답에 따라 유동적으로 본인의 멘트가 달라져야 하는데, 요즘 대화를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의 대답과 상관없이 본인의 멘트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더라고요. 그냥 지극히 일상적이고 단순한 대화에서도요. (그래서 가끔은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는 게 ‘끔찍하다‘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어요 ㅠㅠ)

엊그젠가는 그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전화번호를 불러주는데 말이 너무 빠르다고 해서 다섯 번을 다시 불러줬어요. 복잡한 휴대폰 번호도 아니고, 300-7758 그런 번호였는데 300 불러주면 3 쓰고 뭐라고요? 하고 물어보고 그냥 딱 까무라치겠더라고요.

뭐가 문젠지 모르겠어요. 갸우뚱.
 

아침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기분이 어느 순간부터 점점점 나빠져서 내일 점심에는 롯데리아에 가서 새우버거라도 먹어야 할 것 같댜. 요즘 봄을 타는 삼월이는 지금까지 나를 들들 볶다가 저도 지쳤는지 벌써 잠이 들었다. 하도 투정을 잔소리를 퍼부어대길래 나도 지지 않고 소리를 빽 질렀다. 


"거실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굴지 말고 방으로 들어와서 말해! 방에 들어와서 눈을 보고 말하라고!"


집에 가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엄마를 보러 집에 간 지 3년? 5년?도 더 된 것 같은데, 그래도 그렇게 말하지 말걸. 내일 취소하면 너무 속 보이니까 금요일쯤 문자로 비상근무가 잡혀서 못 가겠다고 말해야겠다. 사람에게 잘해주지 말아야 한다. 관계는 얼른 보기에만 별거 아니고 쉬워 보이(고 심지어 좋아 보이기까지 하)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부터 점점 더 어려워진다. 어려워지기만 한다. 너무 어려워서 엄마도 안 보고 싶을 정도로.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맞아! 올해는 재미있는 것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기로 했지 참. 책도 재미있는 책만. 말도 하고 싶은 말만.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러지는 말자고, 싫은 건 그냥 하지 말아보자고, 노력 같은 것도 하지 말아보자고, 올해는 그렇게 한번 살아보자고 마음먹었었지 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박해영 작가의 신작. <청담동 살아요>,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 그리고 이제 <나의 해방일지>

경기도 외곽에 사는 세 남매의 이야기. 1횐가 2횐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달걀 프라이를 보며 서울은 노른자고 경기도는 흰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면서 이민기가 자신은 경기도민이라 흰자 먹을 테니 사장님은 노른자 드시라고. 비유가 너무 찰떡 같아서 서울 떠올릴 때마다 생각날 듯.


동네 카페 앞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다 염창희(이민기)는 그런 말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이런 인구밀집도 떨어지는 시골에 살았으니까 친구 한 거지 쌔고쌘 게 또래들인 도시에 살았으면 나 너랑 친구 안 했어. 반경 10km 이내에 또래를 쓸어모아도 열댓명이 안 되는 이런 시골에 살았으니까 내가 어쩔 수 없이 같이 논 거지. 시골은 이게 문제야. 하여튼 나이만 같으면 다 친구야. 나 어려서 여자애 하나 껴서 넷이 놀았다고 그러잖아. 그러면 되게 죽이 맞았나 보다 그래. 그냥 네 명이 전분 거야 동네에. (염미정(김지원)을 가리키며) 쟤! 쟨 또래 하나도 없어갖고 동네 바보랑 놀았잖아. 개똥이랑. 

이런 시골에선 친구도 식구랑 같은 거야. 식구를 가려 만나? 그냥 태어나니까 식구래. 그냥 태어나니까 친구래. 옆집에 애 하나 있대. 학교에서도 옆에 앉는 짝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딴 애랑 놀면 돼. 근데 동네친구? 이건 답이 없어."


*


대체로 나는 이민기가 연기하는 역할에 대해 되게 동류의식을 느끼는데, 이번에도 그렇다. 가장 나 같은 인물을 찾으라고 하면 이민기. 이민기의 지난 번 작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도 이민기에게 감정이입되었었는데. 전생에는 고양이였지만, 다음생에 인간 남자로 태어나면 이민기(가 맡는 역할들) 같은 남자가 되지 않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22-04-12 0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드라마 눈여겨 보고 있는 중인데 최근 영화 <야차> 보고나서 이엘이라는 여배우에 관심이 가서 이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 더 커졌어요.
너무 어둡다, 칙칙하다는 여론도 있던데 무시하고 한번 시작해봐야겠어요. 더구나 <청담동 살아요>, <나의 아저씨> 작가라니 뭐...

Joule 2022-04-12 09:54   좋아요 0 | URL
이엘, 드라마 <도개비>에서 삼신할매로 나왔던 분이잖아요. 연기를 잘하는구나, 느꼈어요 이번에.
캐스팅이 정말 역대급. 모든 연기자들이 다 생활인 같아요. 연기자 안 같아요. 그래서 와 캐스팅 진짜 대박이다 해요, 다들 연기인데 왜 다들 연기 안 같고 진짜 저런 사람인 것 같은 건지.
TVN ‘우리들의 블루스‘ 끝나고 바로 JTBC 돌리면 ‘나의 해방일지‘ 하잖아요.
이거야말로 빅매치. 노희경과 박해영이라니.

저는 설경구를 별로 안 좋아라 해서 <야차>는 못 보고 있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