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면서 간직하는 것은 기억이 전부이다시피 해서, 우리가 삶을 생각할 때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은 기억하는 자아의 관점이다. 

내가 강의를 끝내고 어느 청중에게 들은 짧은 이야기는 기억과 경험을 구별하는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음반을 틀어 놓고 긴 교향곡을 넋을 놓고 듣고 있었는데, 곡이 끝날 무렵 음반 흡집으로 깜짝 놀랄 잡음이 나는 바람에 "음악 감상을 통째로 망쳤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감상을 망친 게 아니라 감상의 기억을 망쳤을 뿐이다. 감상하는 자아, 즉 경험하는 자아는 곡을 거의 다 들을 때까지 좋은 경험을 했고, 마무리가 안 좋았다고 해서 그 경험이 취소될 수는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이다. 내게 질문을 던졌던 그 사람은 결말이 안 좋았다는 이유로 그때의 경험을 통째로 망쳤다고 했지만, 그것은 음악을 들으며 행복했던 40분을 무시한 평가다. 실제 경험은 과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까? 

경험과 그 기억을 혼동하는 것은 인지 착각의 좋은 예이며, 사람들은 경험을 기억으로 바꿔치기 하는 탓에 과거 경험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경험하는 자아는 발언권이 없다. 기억하는 자아는 더러 엉터리지만, 삶의 점수를 기록하고 삶의 교훈을 지배하는 자아이며, 결정을 내리는 자아다. 우리가 과거에서 배우는 교훈은 미래 기억의 질을 극대화하되, 미래 경험의 질도 극대화한다는 보장은 없다. 한마디로 기억하는 자아의 횡포다. 

우리는 내 이익과 관련한 선호도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그것이 내 경험에 근거했어도, 그 경험의 기억이 고작 몇 분 전에 생긴 것일지라도 그러하다. 취향과 결정은 기억에서 나오고, 기억은 엉터리일 수 있다. 이 사실은 인간은 선호도가 일관되고 그것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합리적 행위자 모델의 기초가 되는 생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들쭉날쭉한 선호도는 타고난 것이다.

결혼 생활이 실패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기억하는 자아의 관점이다. 이혼은 막판에 불협화음을 낸 교향곡과 같다. 끝이 나쁘다고 해서 전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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