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 1 -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 50인 이야기, 전2권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6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성규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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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에서 태어나 로마 제정기를 화려하게 살았단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영웅전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듯 막힘이 없는 서술력을 지니고 있다.플루타르코스는 기원 후 42년에서 120년 사이(?) 생존했던 인물로 서양 문명의 중심축이 될 수 있는 영웅들의 삶의 이력을 다채롭게 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플루타르코스는 철학자로 플라톤 철학을 신봉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문명의 힘이란 불가사의한 인물을 설정하는 한편 약간의 인유(引喩)와 일화를 활용하고 있는 점도 두드러진다.특히 플루타르코스는 등장 영웅들의 삶을 실제 있었던 것과 흡사하게 전개하고 있으며 특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신화적 요소를 부여하여 서구 유럽인들의 문화 의식구조의 형성에 일조하고 있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중국의 『삼국지』에 비견될 정도로 서양인의 교양서이기도 하다.한편 서구 문명의 원점이라 할 만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늦게나마 접할 수 있었던 나는 마음 든든함을 느끼게 되었다.비록 한 번 훑어 보는 식이 되었지만 시간을 갖고 두고 두고 읽어 보려고 한다.영웅들의 삶의 이력 속에는 정의,공정,도덕,희생이라는 정신을 비롯하여 개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타 및 처세술의 표준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은 상,하로 나뉘어져 있다.상.하 전권에 등장하는 영웅은 모두 50명으로 대부분 기원 전의 인물과 몇 몇은 기원 후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이미 들어 본 영웅도 있지만 처음 접하는 영웅도 꽤 많다.그 만큼 그리스.로마시대의 영웅들의 삶을 제대로 접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상.하권으로 구성된 전집을 읽어 가다 보면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영웅들의 삶을 소개가 끝나면 둘 이상의 영웅들을 비교하고 있다.성격,공훈,지도력,국가관 등이 잘 그려져 있다.또한 영웅들의 삶의 이력은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들이 많다.정치가,군인,법무관,총독,집정관 등의 이력을 갖고 있다.플루타르코스의 박식함과 학문의 관대함에서 그리스.로마 영웅전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상.하권 모두 960여 쪽을 자랑하고 있다.상권에는 27명의 영웅들이 소개되고,하권에는 나머지 23명이 소개되고 있다.변명 같지만 한 번 읽고나서 영웅들의 면면을 압축 정리한다는 것이 매우 부담스럽기만 하다.또한 장황하게 나열하는 것도 서평의 모양새가 나지 않을 것 같다.아무튼 철학자로서,전기작가로서,치안관으로서의 플루타르코스는 도덕적.신앙적.정치적 특징에 접근하여 영웅전을 집필했던 것으로 보인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외 전해지지 않고 있는 작품들도 수두룩하다.주로 고대 영웅들의 생애가 주가 되고 있다.평론집,비평집,에세이 등 문학과 관련한 작품과 논문도 상당하다.테세우스,로물루스,페리클레스 등 세인들의 귀에 익숙한 영웅들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또한 서양인들의 의식의 중심에 각인되어 있고,감성과 창작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영웅들이 생존했던 시기의 대외관계,사회 제도,풍습 등을 상상할 수가 있다.그들의 삶이 동.서양의 사회적 지도자들에게 무언의 삶의 지침이 되기도 한다.내용 또한 매우 치밀하고 상세하다.영웅들의 전집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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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여행 - 역사기행으로 읽는 일본사
하종문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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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이웃 나라 일본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과연 얼마나 될까.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말한다면 낮은 수준,낮은 점수에 머무른다.대학에 입학하기 직전 일본어를 배우면서 일본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싹트게 되었고,이런 저런 사유로 일본인을 알게 되면서 일본의 생활문화,역사를 알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이 일기도 했다.대학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일본 현지 생활체험과 개인적인 여행을 통해 본 일본의 생활문화,도서(이어령 저자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를 통해 일본의 면면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집단적인 생활 방식과 타인에 대한 배려,규칙적인 생활 태도 등이다.

 

 나는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일한사전을 몸에 끼고 다닐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1980년대 초반의 일한사전이 아직도 건재하다.다만 세월이 흘러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고 군데군데 너덜너덜해진 부분은 있을지라도 단어 공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당시 일한사전 앞부분에는 고대 일본 지방명이 실려 있었는데,일본 지도와 함께 자주 쳐다 보면서 저절로 외우게 되었다.옛 지방명이 현재 일본 지방의 이름에도 자주 등장하곤 한다.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일본인의 실천적 의식은 현대 일본의 풍물에도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일본사는 단지 상대를 제대로 알아야 상대와의 대처법을 마련할 수 있는 기틀을 잡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일리가 있지만,한.일 관계의 흐름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흘러갔다는 연계설을 중점으로 일본사를 이해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인 학습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는 이웃 나라를 일본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인은 일본국(니뽕고쿠)이라고 부른다. 북쪽 홋카이도에서 남쪽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주요 4개의 섬과 7,000여 개의 부속 도서로 구성되어 있다.구체적으로 일본은 1도(都),1도(道),2부(府),43현(縣)으로 이루어져 있다.1868년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300여 개의 번(藩)으로 나뉘고,8세기 이후에는 70여 개의 국(國)으로 구분되어 있었다.근대 이전의 일본은 혼슈,시코쿠,큐슈가 일본사의 주요 무대였고,홋카이도와 오키나와는 일본의 강역(彊域)이 아니었다.19세기 후반 일본의 강역으로 편입되고,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쿠릴(Kuril)열도는 러시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쿠릴 열도 4개의 섬은 러시아에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곳이다.

 

 일본은 죠몬과 야요이라는 고대사,율령국가였던 야마토(大和) 정권에서 나라(奈良).헤이안(平安) 시대,무사가 주도하는 가마쿠라(鎌倉) 바쿠후(幕府)의 탄생에서 무로마치(室町),일본의 통일과 태평의 시대인 전국(戰國)시대를 거쳐 에도(江戶) 바쿠후 시대,근대화를 상징하는 메이지 유신에서 태평양 전쟁으로,그리고 현대 일본을 이끌고 있는 아베 신조(2006년 취임) 총리에 이르기까지 일본 역사가 펼치던 인물과 공간 무대를 중심으로 엮어졌다.제1부는 답사로 찾는 일본이고,제2부는 역사로 읽는 일본으로 구성되어 있다.답사로 찾는 일본은 마치 독자가 각 지방의 역사 여행을 순례하는 기분이다.역사로 읽는 일본보다 역사적 현장감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고,역사로 읽는 일본은 일본사의 지식을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기분이 들었다.일본의 근세는 번(蕃)의 다이묘(大名)를 중심으로 한 가신들의 내분이 끊이지를 않았다.19세기 중반 일본은 외세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봉건적인 사회체제를 일신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선포한다.주지하다시피 메이지 유신은 일본 사회를 서구적으로 변화시키면서 대외적으로는 영토 확장을 꾀하는 계기가 된다.대표적인 것이 사이고다카모리의 정한론(征韓論)이다.이후 조선과 불평등 조약(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반도를 병탄한다.

 

 일본인의 시조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이라는 것이 유력하다.한.일 역사 관계는 선린우호 관계도 있었지만,임진왜란,정유재란을 거쳐 구한말 일본의 강제적인 문호개방과 외교권 박탈,일제 강점기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속시원한 한.일 과거사의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4만∼3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부터 1159년 헤이지(平治)의 난까지의 고대사,1180년 겐페이(源平) 쟁란에서 1477년 오닌(應仁)의 난까지의 중세사,1559년 오다 노부나가의 오와리(尾張)통합에서 1843년 덴포(天保)의 개혁까지가 근세사로 분류한다.나아가 1853년 미국인 페리,우라가(浦賀) 내항에서 1945년 일본 항복에 이르기까지를 근세사로 분류한다.종전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는 현대사로 본다.일본 역사를 훑어 보면서 느끼는 점은 일본의 위정자들은 기회를 잘 포착하는 편이다.섬나라라는 지리적,환경적 요인인지는 모르지만 나라의 향방,살아갈 방향을 외세와 손잡는 것이라는 것을 일찍 깨닫고 실천했다.반면 한국은 근세는 사색당파의 쉼없는 싸움과 득실거리는 탐관오리가 백성들에게 행하는 가렴주구,무능한 왕과 일신의 안위에 빠진 신하들의 정치관으로 국론이 분열되면서 일본에게 먹히고 말았던 것이다.일본사를 접하면서 단지 일본을 안다는 차원에서 올바른 한.일관계를 인식하고, 한국이 세계 무대의 중심에서 어떻게 방향타를 잡아 가야 할 것인가를 사색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한국 위정자들의 실속 있는 외교전략과 심하게 균열(龜裂)되어 있는 사회 구성원의 상생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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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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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과 지식은 매우 단편적이고 편협되어 있다.국민학교가 끝나갈 무렵 봄(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중학교에 들어가 반공.도덕 시간에 배운 강재구 소령이 보여준 살신성인의 정신과 베트남 상이 용사들의 고엽제 후유증 등에 관한 것이 전부인 것이다.왜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고 한국은 왜 이 전쟁에 참여했으며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은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서는 관심 사항이 아니었던 터라 잊고 지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전쟁 당사국도 아닌 한국 입장에서 베트남 전쟁에 한국의 젊은이들을 파병시키고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전쟁에 대한 의미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 즉 1950년대 이후 베트남 정세 및 미국과의 충돌 등(통킹 만 사건) 그리고 한국군 파병,베트남 전쟁에서 얻은 교훈 등을 정치,군사,경제,사회학적 관점에서 잘 서술한 이 도서는 베트남 파병 50돌(2014년)을 맞아 기획.출간된 것으로 정치.군사.경제.사회적 관점에서 한국과 베트남 전쟁과의 관계를 되짚어 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1964년 9월 22일 한국군 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을 필두로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네 차례의 파병이 이루어졌다.총 32만 5,000여 명이 파병됐고,5,000여 명이 전사했다.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5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고엽제로 인한 질병 판정을 받은 장병들은 먼 이국에서 죽어가고,전쟁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몸서리나는 고생을 하고 있다.베트남과 한국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지만 미국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또한 유사 이래 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 파병된 첫 번째 사례다.미국의 우방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베트남 참전을 거부했음에도 한국은 파병을 결정했다.그것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 사회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한 시기로 경제 성장을 위한 특수(特需)효과를 기대했던 까닭이다.

 

 

 베트남 전쟁은 통킹 만(Gulf of Tongkin)에서 북베트남 경비정과 미군 구축함의 해상 전투 사건으로 미군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 베트남 전쟁의 발단이다.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 당시 박정희 정권은 존슨 미 대통령의 환대를 받으면서 베트남 전쟁 특수에 크게 의존했다.유지비가 싸고 전투력이 뛰어나며 베트남인과 비슷한 용모를 지닌 한국인이 미국 정부가 궁극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요청한 이유였다.네 차례에 걸쳐 베트남 파병을 진행하게 된 한국 병사들은 기상 악조건 속에서도 미군보다 더 맹활약을 했음에도 미국 정부의 농락에 의해 한국군의 이미지가 저울질되기도 했다.즉 한국군이 필요로 할 때는 효율적이라고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비효율적이라고 평가받았다.한국 병사들만 정치적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결국 미국은 지나친 전비 지출로 달러가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 자리를 지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조기에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들어야 했다.존슨 후임인 닉슨 대통령은 실사구시 정책을 쓰면서 비수교국이었던 중국과 핑퐁 외교를 구사하면서 미.중 수교(1972년)를 성사시켰다.

 

 

 베트남 전쟁에 파병했던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커다란 경제 성장을 이룩한 반면,정치적으로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 일로를 걸었다.베트남 파병과 관련이 있는 1968년 청와대 습격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사건은 북한이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펼치면서 국방비가 급증하면서 북한 사회가 경제적인 문제를 노정(露呈)하게 되었다.사회.문화적으로는 미니스커트가 등장하고 통기타 가수들이 인기를 얻었으며,베트남을 통해 미국과 일본의 전자제품이 국내에 유입되었던 시기다.나아가 중산층이라는 낱말과 부동산 투기가 시작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대치상태가 이어졌는데,미국에 의존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남베트남과 베트콩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베트남 통일을 달성하려던 북베트남,그리고 남베트남 정부를 지키려는 미군들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놓여 있었다.또한 베트남은 1950년대 말 남베트남의 게릴라들(베트콩)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반대하여 무장 투쟁을 시작하면서 베트남 전역의 정세가 불안정했다.미국은 통킹 만(미 어뢰정이 북베트남에 의해 침공당함) 사건으로 전쟁의 구실을 삼았다고 하지만,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미군만의 제한적 전쟁으로 비쳐졌던 베트남 전쟁은 결국 북베트남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된다.1976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건설되었다.전쟁 특수 효과를 기대하고 젊은 한국 병사들을 베트남 전쟁에 동원하다시피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죽었거나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상이용사들에 대한 트라우마를 풀어주어야 마땅하다.또한 베트남 전쟁에서 희생된 밀라이 학살 사건은 한국군이 개입된 것으로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기도 하다.이들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베트남 파병 이후 악화된 남북관계 해결,파월 장병들과 돈을 벌기 위해 떠난 근로자와 민간들의 무사 귀국 시키는 일도 난제였다.닉슨 정부가 들어서면서 주한 미군의 감축,철수 문제도 한반도 안보 공백을 우려해야만 했다.설상가상으로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더라도 한국군이 베트남에 주둔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는 것을 제기했다.당시 한국 국방부는 안절부절하는 상황이었다.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남베트남 피난민들은 보트 피플이 되면서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베트남 전쟁 특수는 한국 경제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경부고속도로 건설,부동산 투기 바람이 일어났다.전쟁 특수로 돈 재벌들이 탄생하기도 했다.박정희 정부는 파월을 통해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군사 동맹국의 위치에 서려고 했다.이제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려고 하는 사람도 없고 굳이 베트남 전쟁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하지만 전쟁 특수를 통해  반사 이익을 크게 얻었다.그 안에는 반드시 애꿎은 희생이 뒤따랐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나라의 경제 이익을 위해 동원된 파월 장병들의 트라우마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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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제국사 - 고대 로마에서 G2 시대까지 제국은 어떻게 세계를 상상해왔는가
제인 버뱅크.프레더릭 쿠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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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의 발화하고 진화시켰던 역동적인 시대의 주역 제국의 면모를 시대와 함께 음미해 봅니다.정치.군사적 힘의 역학관계부터 인류의 문명사에 남긴 족적에 이르기까지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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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대기근 - 삼백만 명이 굶어죽은 허난 대기근을 추적하다 걸작 논픽션 5
멍레이 외 엮음, 고상희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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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간 역사의 비극 현장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세상에 알리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그것은 사회체제 및 주류 이데올로기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해당 사건에 대한 공개 여부가 달라지리라 생각한다.일종의 정보의 불투명성이라 여겨지지만 인류 역사 이래 비밀이란 결코 없다.투철한 직업정신과 불요불굴(不搖不屈)의 집요한 기자정신에 입각한 중국 현대사의 비극 취재 결과가 세상에 드러났다.바로 중일전쟁의 와중에 허난(河南)성에서 발생한 재해와 인재가 뒤섞여 아사자만 300여 만을 낳았다.그것도 중국과 일본이 싸우는 가운데 허난성의 애꿎은 인민들만 새우등이 터진 꼴이었다.

 

 너무나도 생생하고 소름 끼치는 재해의 현장은 제석천과 아수라가 싸우는 아수라장을 연상케 한다.허난성 인민들은 일본군이 허난성을 쳐들어 올 무렵 제방 폭파로 황허강이 범람,이재민이 대거 발생한다.연이어 가뭄까지 들어 식량을 구할 수가 없게 된다.굶주림에 지친 인민들은 느릎나무 껍질과 같은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는데,때아닌 메뚜기 떼가 허난성을 급습하여 허난성 인민들은 천형(天刑)을 받아야만 했다.더욱 놀라운 점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자식을 매매하고 인육까지 서슴치 않고 먹는다.게다가 자국의 인민들을 보호해야 할 지도자들은 인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양식들을 착복한다든지 (인민들이)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겼는지 탕언보(湯恩伯)와 같은 군인들은 수많은 인민들을 학살한다.설상가상 기근으로 수많은 이재민까지 발생한다.그들은 일본군과 자국 군인의 학살을 피해 후방지역 (샨시성)으로 피난을 간다.

 

 당시 대기근의 상황을 집중 취재했던 미국 「타임즈」기자 해리슨 포먼이 없었더라면 1942년 허난성 대기근 상황은 그저 흘러가는 에피소드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해리슨 포먼 기자가 있었기에 당시 대기근 상황과 허난 인민들이 간난신고의 처지를 현장감 있게 접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죽음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난 인민들이 겪어야만 했던 길고 긴 피난 행렬은 한국 전쟁을 방불케 한다.허난성을 일본군이 침입하자 장졔스 군인은 양식이 일본군에 돌아갈까 방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인민들이 굶주려 죽어 나가는 상황을 알고도 모르쇠로 일관했다.중.일전쟁이라는 난리통에 허난 성 인민들은 자식들을 병역에 보내고,현물납부가 필수적이었다.

 

 1942년 대기근을 경험했던 생존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기근의 참담함을 그대로 전한다.메뚜기 떼가 허난 성을 급습하면서 허난 인민들은 메뚜기를 구워 먹는다는 생각은 못했던 모양이다.재앙을 부르는 곤충을 먹으면 하늘의 노여움을 산다는 미신을 믿었던 탓이다.양식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허난 인민들은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고 보자는 심경이었을 것이다.보리 뿌리,야생 노란 국화,콩 줄기,목화 잎,호두 껍질,감나무 잎,능금나무 잎,가죽 끈 등 셀 수도 없을 정도이다.뤄양역에서 시안으로 떠나는 피난 행렬은 생지옥과 같다.말그대로 '콩나무 시루'와 흡사할 정도로 피난민으로 가득차 발들일 틈이 없다.타임즈지의 해리슨 포먼 기자의 생생한 리포트와 촬영을 본 장졔스는 결국 허난성에서 발생한 대재앙을 추스르는 동시에 인민들에겐 적극적인 구제활동을 실시하게 명령했다.

 

 장졔스가 허난 인민들에게 적극적 구제활동을 명령하면서 탕언보 군인이 인민들을 학살한 사건과 관련하여 인민들은 탕언보 탄핵과 허난 성 개각을 요구하게 된다.허난 성 대재앙은 결국 '수해,가뭄,메뚜기 재해,탕언보'라는 4대 재앙으로 압축된다.1942년 허난 성 대재앙이 종식되고 70여 년이 흐른 현재의 허난 성은 처참했던 당시의 상황은 찾을 길이 없을 정도로 상전벽해의 꼴을 보이고 있다.도시화,산업화에 의해 현대식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고,당시 처참했던 상황은 생존자들의 경험이 가감없이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또한 기근 문제와 관련하여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쿠마르 센이 보여 준 사실 증명은 정치 지도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근이 자연재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객관적인 요소는 주로 어떤 결과를 야기하거나 심화시키는 작용만 할 뿐이다.권리의 불평등,정보의 불투명성,언론 자유의 부재,민주적이지 않은 정치체제야말로 빈곤과 기아를 악화시키고 대량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기근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다.즉 식량 문제의 본질은 정치와 관련이 있고,기근의 발생 여부는 한 사회가 어떤 권리와 제도를 갖추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1942년 대기근의 본질이기도 하다."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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