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과 지식은 매우 단편적이고 편협되어 있다.국민학교가 끝나갈 무렵 봄(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중학교에 들어가 반공.도덕 시간에 배운 강재구 소령이 보여준 살신성인의 정신과 베트남 상이 용사들의 고엽제 후유증 등에 관한 것이 전부인 것이다.왜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고 한국은 왜 이 전쟁에 참여했으며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은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서는 관심 사항이 아니었던 터라 잊고 지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전쟁 당사국도 아닌 한국 입장에서 베트남 전쟁에 한국의 젊은이들을 파병시키고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전쟁에 대한 의미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 즉 1950년대 이후 베트남 정세 및 미국과의 충돌 등(통킹 만 사건) 그리고 한국군 파병,베트남 전쟁에서 얻은 교훈 등을 정치,군사,경제,사회학적 관점에서 잘 서술한 이 도서는 베트남 파병 50돌(2014년)을 맞아 기획.출간된 것으로 정치.군사.경제.사회적 관점에서 한국과 베트남 전쟁과의 관계를 되짚어 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1964년 9월 22일 한국군 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을 필두로 19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네 차례의 파병이 이루어졌다.총 32만 5,000여 명이 파병됐고,5,000여 명이 전사했다.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5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고엽제로 인한 질병 판정을 받은 장병들은 먼 이국에서 죽어가고,전쟁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몸서리나는 고생을 하고 있다.베트남과 한국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지만 미국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또한 유사 이래 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 파병된 첫 번째 사례다.미국의 우방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베트남 참전을 거부했음에도 한국은 파병을 결정했다.그것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 사회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한 시기로 경제 성장을 위한 특수(特需)효과를 기대했던 까닭이다.

 

 

 베트남 전쟁은 통킹 만(Gulf of Tongkin)에서 북베트남 경비정과 미군 구축함의 해상 전투 사건으로 미군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 베트남 전쟁의 발단이다.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한 당시 박정희 정권은 존슨 미 대통령의 환대를 받으면서 베트남 전쟁 특수에 크게 의존했다.유지비가 싸고 전투력이 뛰어나며 베트남인과 비슷한 용모를 지닌 한국인이 미국 정부가 궁극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요청한 이유였다.네 차례에 걸쳐 베트남 파병을 진행하게 된 한국 병사들은 기상 악조건 속에서도 미군보다 더 맹활약을 했음에도 미국 정부의 농락에 의해 한국군의 이미지가 저울질되기도 했다.즉 한국군이 필요로 할 때는 효율적이라고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비효율적이라고 평가받았다.한국 병사들만 정치적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결국 미국은 지나친 전비 지출로 달러가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 자리를 지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조기에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들어야 했다.존슨 후임인 닉슨 대통령은 실사구시 정책을 쓰면서 비수교국이었던 중국과 핑퐁 외교를 구사하면서 미.중 수교(1972년)를 성사시켰다.

 

 

 베트남 전쟁에 파병했던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커다란 경제 성장을 이룩한 반면,정치적으로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 일로를 걸었다.베트남 파병과 관련이 있는 1968년 청와대 습격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사건은 북한이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펼치면서 국방비가 급증하면서 북한 사회가 경제적인 문제를 노정(露呈)하게 되었다.사회.문화적으로는 미니스커트가 등장하고 통기타 가수들이 인기를 얻었으며,베트남을 통해 미국과 일본의 전자제품이 국내에 유입되었던 시기다.나아가 중산층이라는 낱말과 부동산 투기가 시작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대치상태가 이어졌는데,미국에 의존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남베트남과 베트콩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베트남 통일을 달성하려던 북베트남,그리고 남베트남 정부를 지키려는 미군들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놓여 있었다.또한 베트남은 1950년대 말 남베트남의 게릴라들(베트콩)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반대하여 무장 투쟁을 시작하면서 베트남 전역의 정세가 불안정했다.미국은 통킹 만(미 어뢰정이 북베트남에 의해 침공당함) 사건으로 전쟁의 구실을 삼았다고 하지만,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미군만의 제한적 전쟁으로 비쳐졌던 베트남 전쟁은 결국 북베트남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된다.1976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건설되었다.전쟁 특수 효과를 기대하고 젊은 한국 병사들을 베트남 전쟁에 동원하다시피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죽었거나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상이용사들에 대한 트라우마를 풀어주어야 마땅하다.또한 베트남 전쟁에서 희생된 밀라이 학살 사건은 한국군이 개입된 것으로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기도 하다.이들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베트남 파병 이후 악화된 남북관계 해결,파월 장병들과 돈을 벌기 위해 떠난 근로자와 민간들의 무사 귀국 시키는 일도 난제였다.닉슨 정부가 들어서면서 주한 미군의 감축,철수 문제도 한반도 안보 공백을 우려해야만 했다.설상가상으로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더라도 한국군이 베트남에 주둔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는 것을 제기했다.당시 한국 국방부는 안절부절하는 상황이었다.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남베트남 피난민들은 보트 피플이 되면서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베트남 전쟁 특수는 한국 경제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경부고속도로 건설,부동산 투기 바람이 일어났다.전쟁 특수로 돈 재벌들이 탄생하기도 했다.박정희 정부는 파월을 통해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군사 동맹국의 위치에 서려고 했다.이제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려고 하는 사람도 없고 굳이 베트남 전쟁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하지만 전쟁 특수를 통해  반사 이익을 크게 얻었다.그 안에는 반드시 애꿎은 희생이 뒤따랐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나라의 경제 이익을 위해 동원된 파월 장병들의 트라우마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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