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잭 웨더포드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이론과실천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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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을 먼저 음미해서는 안된다. 원제는 ‘Savages and Civilization'인데, 한국어판으로 되면서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짜릿한 선택적 어구가 그 뒤에 붙었다. 그러나 제목처럼 이 책은 자극적이지도 않으며, 숨 가쁜 논쟁이 이어지는 책도 아니다.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은 긴 호흡을 요하고 있다. 잭 웨더포드는 각 장마다 세계의 한 곳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 곳은 아프리카의 말리가 되기도 하고, 러시아의 바이칼호가 되기도 하고, 아메리카의 볼리비아가 되기도 한다. 원주민의 삶을 자세히 투영해보거나, 야만과 문명의 양상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한올 한올 풀어가고 있다.

이 책은 그러면서도 인류문명을 시대순으로 얘기하고 있다. 현재의 땅에 서서 현실을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인류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현재 우리 세계에 아직도 여러 문명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의 단증이기도 하다.

저자는 크게 역사를 3단계로 나눈다. 고대문명에서 15세기경까지 이르는 부족문화와 다양성의 문화가 존재하는 시기다. 원시시대부터 유목민문화, 정착생활, 세계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진보를 가져오는 원동력은 서로 다른 문화집단 간의 역동적인 긴장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나, 각 문화집단은 그 나름대로 제 기능을 훌륭히 수행해왔다는 것을 얘기한다. 나아가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일으켰다는 것 또한 놓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농경은 채집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지만, 기대 수명이 짧아지고 키가 작아지며 질병이 많아지고 영양 상태가 나빠지며 주기적으로 기근을 겪는 등의 대가를 치렀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 다음이 근대의 국민문화와 세계 질서가 대두되는 시기다. 그러나 국민문화와 세계 질서는 접촉이 있을 때마다 부족민과 다른 문명을 끊임없이 파괴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세계의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문화를 창조하려고 애썼으나, 근대의 국민주의 문화는 그들이 지배한 넓은 지역에서 획일성을 강요한다.

획일성은 파괴를 낳는다. 유럽에서 싹튼 세계문명은 유럽을 빠져나와 카나리아 제도, 카리브해 원주민, 아메리카 주민, 폴리네시아 원주민 사회를 깡그리 말살해갔다. 현대 세계는 반대나 변이나 일탈을 거의 용납하지 않았고, 특정 사회체제에 맞는 획일적인 주민들을 요구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세계문화의 혼란기에 접어들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 혼란의 정체는 지금이 위기의 끝에 서 있다는 진단과 일맥상통한다. 역사적으로 전쟁이나 역병, 환경교란 등의 이유로 비교적 갑자기 무너진 문명의 예가 많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단일한 지구 문명으로 통일되어 있어 단지 한 문명의 몰락이 아니라 세계문화의 몰락으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저자는 더욱 심각성을 두고 있다. 한 부분의 멸망은 연쇄 반응을 일으켜 지구 전체를 휩쓸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최근 1만년이라는 기간은 채집으로부터 모종의 어마어마하게 뛰어난 생활방식으로 옮겨 가는 과도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낙관적으로 보든, 비관적으로 보든,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의 커다란 한 시대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문명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이 순간, 저자는 우리 문명 스스로 아마겟돈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난제는 획일적으로 살지 않으면서 조화롭게 사는 것, 즉 상업, 대중문화, 통신 등과 같은 세계적인 힘에 의해 통일되면서도 종교나 민족성 등과 같은 분야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평화로이 유지하는 것이다.”라고 답하고 있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닥칠 위험이 있는 문제들을 우리가 극복하려면 모든 문화가 지니고 있는 모든 지식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클라이브 폰팅은 ‘녹색세계사’를 통해 세계사를 환경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바 있다.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은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을 통해 언어의 다양성 말살이 우리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 책도 비슷한 맥락에 서 있다. 문명의 발달과정이 파괴의 역사를 걸어왔다는 지점에서는 환경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고, 문명의 다양성 입장에 굳건히 서서 문화 또는 문명의 획일성이 문명의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얼마전만 해도 문화적 상대성은 상대편 문화에 대한 똘레랑스를 뜻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관점은 다소 점잖은 태도로 느껴진다. 상대방이 없으면 자신도 없다는 절박감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제목은 수정되어야 한다. 야만과 문명은 분리된 다트판으로 우리가 화살을 던져 살아남을 쪽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다. 둘 다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해야 하며 그 관점에서 그 둘은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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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역사 세계신화총서 1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감수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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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열풍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어른들은 이윤기씨의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담론 등을 중심으로, 아이들은 만화 그리스로마신화로 꾸준한 관심을 끌고 있다. 신화의 ‘신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가 첨단과학시대에도 왜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걸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도, 아이들의 신화에 대한 관심에 제대로 응대 해주기 위해서도 신화의 역사를 들여다봄직 할 것이다.

신화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류가 상상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신화는 싹 텄을 것이다. 인류는 죽음을 그리고, 동물을 등장시키고,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논하면서 신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신화는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았다. 인류가 생명의 유한함을 인식하거나 절망에 빠질 때, 그 사실과 타협하기 위한 일종의 대응논리로 만든 것이 신화라고 『신화의 역사』 저자(카렌 암스트롱)는 말한다. 결국 그 당시 마주한 환경과 이웃, 관습에 대한 태도를 설명하거나 곤경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용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은 단지 재미가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은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살아가면서 미지의 세계와 만날 때 이러한 영웅신화는 지침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헤라클레스는 필요에 의해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애초에 신화는 초자연적인 것도 아니었고, 신들의 세계와 인간 세계 사이에 큰 간격도 없었다.

저자는 이러한 신화가 역사의 발달 속에서 어떤 모습을 지녀왔는가를 얘기하고 있다. 신화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을 끼친 요소를 뽑으라면 단연 과학(또는 로고스)이라고 할 것이다. 신화와 과학은 역사 발달 과정에서 공존과 배척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형성해왔다고 할 것이다. 종교, 철학, 국가, 문명의 발달과정에서 신화는 이들과 거리를 두기도 하고, 서로 영역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신화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기도 했다. 그러다가 근대의 발달 이후로 신화의 영역과 위상은 축소되어왔다.

이에 대해 저자는 신화와 과학(또는 로고스)은 둘 다 인류의 영역을 확장시켜준다는 견해를 편다. 신화와 로고스는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고, 서로 다른 영역이기에 인간은 두 가지 사유방식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사회에서 사냥 원정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로고스가 필요했지만, 동물을 죽인다는 복잡한 심경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신화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우리가 물질적으로는 더 세련된 삶을 살고 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신화의 영역을 축소시킴으로써 퇴보했을지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대인은 미술이나 록 음악, 마약, 과장된 영화 등에서 ‘영웅’을 찾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 양자가 조화되는 삶이야말로 지구를 살리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단지 신화가 어떻게 탄생해서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거론하는데 지나는 것이 아니라, 현대문명의 문제점 및 방향까지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신화의 현대적 해석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로마사에 대해 접근할 때 우리 현대의 기준을 가지고 자를 재려 해서는 안된다”는 시오노 나나미의 말은 신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노예제도를 현대의 민주주의라는 자에 의해 재단할 수 없듯이, 신화 역시 현대과학에 의거해 판단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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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라이프 - 우리가 꿈꾸는 또 다른 삶
쓰지 신이치 지음, 김향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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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라이프’라는 단어에는 벌써 많은 얘기가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언뜻 가깝고 친근한 단어처럼 느껴지지만, 이 단어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음미해본다면 멀고 무겁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이 단어에는 현재를 부정하고 현재를 탈출하고자 하는 심리를 자극하는 마력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행동화까지 이끄는 용기까지는 쉽게 주지 못하는 듯 하다.

그것은 현재의 우리의 삶은 복잡다단한 네트워크와 사슬로 묶여 있어 조그마한 고리 하나도 자유롭게 떼어내기 어렵다는 것과 긴밀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또한 슬로 라이프를 현재의 부정이나 탈출을 넘어 대안적 세계관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 이의 방향으로 단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슬로 라이프는 현재의 주류문화, 주류가치관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식으로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세계관 또는 삶의 양식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계 일본인인 쓰지 신이치(한국명 이규)의 『슬로 라이프』는 이점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슬로 라이프’라는 말은 저자가 처음 세상에 퍼뜨린 말이기도 하다. 저자는 1999년 ‘나무늘보 친구들’이라는 NGO를 결성해 슬로 라이프를 되찾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오고 있기도 하다.

‘슬로’ 또는 ‘심플’이라는 사상은 부분적으로는 이 세상의 키워드가 되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슬로푸드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슬로푸드는 패스트푸드의 생산양식이나 소비양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아무리 논리적 우월성을 띠었다 해도 항상 소수파의 입장이 될 것이다. 패스트푸드는 단순히 시간이 걸리지 않아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패스트푸드를 음식이나 요리법뿐만 아니라, 음식을 둘러싼 사람들의 생활, 인간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산업 구조 등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양식이자 사상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결국 슬로푸드운동은 대안적인 음식에 대한 운동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양식에 대한 운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광란의 속도에 휩싸여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미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1990년대 미국인 근로자들은 1970년대에 비해 연평균 142시간을 더 일하고 있다. 현대과학기술이 오히려 사람들을 더 바쁘게 만들고 있다는 역설이다. 자신의 다이어리에 빼곡히 일정이 적혀있지 않으면 그 여백으로부터 황소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아서 불안해서 못 견디는 ‘여백증후군’도 있다.

이러한 것이 발생하는 기본적인 정서가 ‘공포’라고 저자는 얘기한다. 경쟁을 떠받치고 있는 근원적인 공포가 제거되지 않는 이상, 경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대사회는 안심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고, 자유와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도록 부추겼으며, 그 너머에 도달해야만 안심이 있는 것처럼 믿게 했다. 슬로 라이프란 바로 이러한 안심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안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자는 ‘씨앗이 자라나는 속도’를 넘어선 곳에는 공포만 있을 뿐 안심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자연의 시간에 인간의 삶을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중심적 시간을 자연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이제까지의 방식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을 자연의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차원에서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발상법인 ‘시간이 돈’이라는 말 대신에, 모든 것을 시간으로 환산하는 ‘돈이 시간’이라는 말로 발상을 전환하자거나, 생산자와 소비자가 제휴하여 유기농업을 키워 온 것처럼, 유기공업을 키워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저자의 제안이 신선하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에 의해서 걷기, 게으름, 패스트푸드, 반세계화, 경쟁, 슬로 러브, 지구 온난화, 비폭력, 전쟁, 진보, 남북문제, 언플러그, 비전화(非電化), 친환경주택, 육식, 에코 투어리즘, 슬로 카페, 슬로 섹스 등 모든 사회현상을 걸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장시간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어슬렁어슬렁 보내는 사람들에게 슬로 라이프는 구세주 철학인가? 안타깝게도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진짜 슬로 라이프는 자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활기차고도 역동적인 생활 방식에 있다도 못을 박고 있으니 단순히 게으른 사람에게는 슬로 라이프가 탈출구가 되지는 못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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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사유의 기호 - 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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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동경 레인보우브릿지 남단지역은 세계 건축 전시장 같기만 하다. 파리의 퐁피두센터와 우주정거장을 연상시키는 후지TV 본사나 피라미드 네 개를 거꾸로 해놓은 듯한 국제전시장, 파리의 라 그랑 아르세를 연상시키는 가운데가 크게 비어 있는 건물 등 하나 하나의 건물들이 다들 큰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쓰레기를 매립하면서 떨어져 있는 섬들을 이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 지역은 환경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그릴 수도 있고, 아니면 인간의 불굴의 힘을 상징하는 모습으로도 그릴 수 있겠는데, 최소한 이 곳의 건물들의 모습을 보면 후자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건축은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하나는 심미적 측면에서 보여지는 건축조형에 대한 느낌이며, 다른 하나는 인문학적 측면에서 보여지는 삶을 담는 공간으로서의 주거형태이다. 그러나 건축은 인문학적 측면에서 보는 시각이 앞서야만 할 것이다. 승효상씨 역시 그렇게 접근하는 대표적인 건축가이다. 그의 책 제목 『건축, 사유의 기호』에서도 이는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승효상씨는 건축을 굳이 다른 학문의 분류에 넣으려 한다면 인문학에 가깝다고 말한다. 문학적 상상력과 논리력, 역사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사물에 대한 사유의 힘이, 이웃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 속에 작업해야 하는 건축가에게는 필수불가결한 도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집을 짓는 것은 삶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인데, 자칫 입면을 건축의 목적으로 판단하여 건축을 시각적 상징과 기호로서 취급해버린다면 건축 속에 참다운 삶이 만들어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견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건축의 차별성을 건축의 입면에서 쉽게 찾는다. 그 중에서도 입면의 화려함이나 특이함, 또는 웅장함에서 건축에 대한 외경심을 느낀다. 건축은 보는 대상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대상이기에 쉽게 고정되어 있는 시각을 다른 시선으로 돌려야만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승효상씨가 ‘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이라는 부제를 단 책에서 첫 번째 거론한 건축물은 가히 실망스럽고 그렇기에 충격적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미카엘광장에 세워진 로스 하우스 건물은 극히 평범해보이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그 당시의 자주 사용되는 화려한 장식을 배격하고 얌전하고 단아하게 거리를 구성하고 있는 6층 건물을 만들어내었다. 그는 장식이 오늘날의 문화와 유기적 관계를 맺지 않는 한 전혀 가치 없는 것이며, 건축가는 더욱 본원적인 것에 몰두해야 한다는 논리로 장식을 죄악시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그 당시 수많은 비판의 타겟이 되기도 했지만, 도시가 지닌 허구와 그 시대 지식인의 지적 허영에 대한 반기라는 평을 얻기도 했다.

물론 이 건축은 건축가 승효상을 승효상 다운 건축으로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16개의 건축을 꿰뚫고 있는 중심축이 되기도 한다. 장식을 배격한 건축, 삶의 양식을 담는 건축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의문은 남는다. 베를린의 빌헬름 황제 기념 교회를 건축한 건축가 에곤 아이어만의 “건축은 끔찍한 것이다. 신의 아름다운 자연을 훼손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굳이 연상하지 않는다 해도 궁금증은 남는다. 그것은 건축이 그 삶의 시스템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만 만족할 때, 그것은 현 시대의 일반적 삶의 방식의 확대재생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윈스턴 처칠도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고 말한 바 있다. 건축은 삶의 시스템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갈 삶의 시스템을 이끄는 쪽으로도 고민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건축은 더욱 인문학적 사고를 필요로 할 것이다. 결국 건축의 설계는 삶의 설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지속가능한 삶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는 건축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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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 스토리 - 뇌는 어떻게 감정과 의식을 만들어낼까?
수전 그린필드 지음, 정병선 옮김, 김종성 감수 / 지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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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에 관한 가장 유명한 잘못된 상식은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뇌의 10%도 채 못 쓰고 죽는다는 것일 게다. 이 얘기는 아인슈타인도 자신의 뇌를 15%밖에 못 쓰고 죽었다는 얘기가 덧붙여지면서 설득력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잘못된 상식이라는 것이 뇌 촬영 영상기술로 밝혀졌다. 아주 단순하게 뇌를 움직이는 활동을 할 때도 뇌의 다양한 영역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뇌 전체가 골고루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뇌에 관한 잘못된 상식은 많을 것이다. 또 하나 든다면 좌뇌와 우뇌의 역할분담에 관한 것이 아닐까 싶다. 뇌의 한쪽 반구가 분석을 담당하고 다른 쪽 반구는 감정을 담당한다거나, 한쪽이 언어를 처리하고 다른 쪽은 비언어적 기능을 맡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뇌 과학자들은 그렇게 결론지을 수 없다고 한다. 좌우 반구의 차이가 절대적 구분의 문제라기보다는 정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학자들은 우리는 뇌의 특정 부위에 고정된 역할을 부여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 특정한 정신 작용을 담당하는 하나의 센터 같은 것은 없다고 한다. 단어 하나를 말해도 대뇌피질 전체에서 독특하게 잔물결이 인다고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잘못된 상식의 결론은 모두 다수의 두뇌 영역이 놀라운 수준으로 협동한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이 두 가지는 잘못된 상식의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그만큼 뇌는 아직도 신비의 영역이다. 게놈프로젝트가 완성된다 하지만, 그래도 뇌의 영역은 여전히 안개에 뒤덮여 있다. 이 안개가 걷히는 시점이 인간의 이해에 대한 종착지에 도달하는 시점이 될 것이다. 뇌의 기능을 밝히려는 신경과학자의 노력은 결국 인간 자체에 대한 연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브레인 스토리』는 지난 2000년 영국 BBC에서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어 주목을 받았다. 저자인 수전 그린필드는 파킨스병 및 알츠하이머병 연구로 유명한 뇌 과학자이다. 이 책은 전문적인 서술방식은 자제하고 다양한 임상사례를 중심으로 일반인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안내를 하고 있다. 복잡한 뇌의 신비가 밝혀질 때는 신비롭지만, 너무나 밝혀진 것이 막연할 때는 때로는 답답해지기도 한다.

동물의 뇌는 운동을 돕기 위해 필요하다. 식물이나 움직이지 않는 동물은 뇌가 필요 없다. 예를 들어 우렁쉥이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유생 때만 뇌를 가진다고 한다.

많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인간은 약 1조개나 되는 뇌세포를 가지고 있다. 몸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작지만, 다른 어떤 기관보다도 더 높은 비율로 연료(산소와 포도당의 형태)를 소비한다.
뇌의 신비에 이르는 미로의 험난함은 단지 어마어마한 뇌세포의 숫자가 전부가 아니다. 뇌세포 중에서도 뉴런은 가장 중요하다. 다른 뉴런에게 신속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 수만 해도 무려 1천억개나 된다. 하나의 뉴런은 무수히 많은 수상돌기를 통해 무려 수만 개의 정보를 입력받는다. 이렇게 다량으로 입력된 정보는 세포체에서 처리되어 단일한 정보를 만들어 다른 뉴런에게 전달하는데, 이는 단지 다음 뉴런에 모이는 수만 개의 입력 정보 가운데 하나가 될 뿐이다. 뉴런 중에는 수상돌기가 최대 10만개까지 있는 것도 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것을 감안하여 인간 뇌의 신경결합의 수를 계산하면 대략 100조개가 된다고 한다. 뇌의 미로가 얼마나 험난한지 어렴풋하게 짐작이 갈 뿐이다.

뇌의 신비를 쫓는 것은 생명의 신비를 쫓는 것과 동일시되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의 태도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우선시 되어야지 진리에 대한 오만함이 앞서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뇌의 신비를 얘기하는 것이, 그렇기에 인간이 우월하다는 결론으로 쉽게 이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침팬지가 인간의 뇌보다 용량이 3분의 1이고, 뇌의 주름살도 인간만 못하다는 것을 예로 쉽게 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행동양식을 종착지로 귀결지어놓고 논리를 꿰어 맞추는 것일 뿐이다. 뇌는 고도의 신비한 기능임에는 틀림없지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기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필요 이상으로 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비효율적이지 않겠는가. 모든 생물은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뇌를 가지고 있거나 또는 뇌를 가지지 않고 있는 것 뿐이다. 신비를 쫓는 것과 우월감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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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林火山 2008-12-26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Naver Opencast의 "風林火山의 분야별 대표 도서 소개"(http://opencast.naver.com/BK175)라는 캐스트의 캐스터 風林火山이라고 합니다. 이 글을 제 캐스트에 발행했는데, 혹시라도 발행을 원치 않으시면 '캐스터에게 한마디'에 적어주시거나, itmedusa@gmail.com으로 메일 주세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