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과학 에세이
이인식 지음 / 푸른나무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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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 이인식씨는 우리나라의 과학 글쓰기가 아직 선진국에 못미치고 있다고 우려한다. 10매 정도의 쪼가리 글로는 '과학' 얘기를 할 수 없다고도 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35매 글이 아니면 연재 청탁을 거절하고, 과학 에세이 100편을 10년 안에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에서 과학을 주제로 한 글쓰기의 한 전형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99개월만에 앞당겨져 이루어졌고, 이 100편을 쓴 기념으로 내놓은 책이 <아주 특별한 과학 에세이>이다.

이 책은 저자의 이러한 고집과 철학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35매 정도이면 책 페이지로 대략 10페이지에 해당한다.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과학 논문이라면 이 분량이 무리겠지만, 일반인을 대상으로 과학을 설명하기에는 적당한 분량이라는 느낌이다. 너무 얕지도 않고 너무 전문적이지도 않은 분량이라는 뜻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최근 출간된 책 중에서 흡혈박쥐를 거론된 에세이가 두 권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는 비교적 짧은 글을 통해서 썼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이다. 흡혈박쥐는 굶는 박쥐가 있으면 정량 이상의 피를 들이삼킨 박쥐가 게워 내서 나누어 준다고 한다. 이를 두고 전자의 에세이에서는 이타주의의 전형으로 설명했고, 후자의 에세이에서는 생물의 이타적 행동을 설명하는 몇 가지 이론을 소개한 후 '죄수의 딜레마' 이론을 소개한다.

그리고 나서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 이론과 이기적 세계로부터 서로간의 만족스러운 상태를 찾아 협력해가는 팃포탯(Tit for Tat)이론을 설명하고 이 이론의 입장에서 흡혈박쥐의 행동을 분석한다. 전자의 에세이에서는 흡혈박쥐의 이타성을 인간도 배워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만 준다면 후자에서는 그 근원적 원리를 짧은 글 속에서도 명징하게 깨닫도록 해주고 있다.

이 외에 현대인이 병에 잘 걸리는 이유를 다윈의학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나, 인간의 경우 특이하게 발정기가 노출되지 않는 배란 은폐를 수수께끼를 밝히고 있는 것이나, 정자들의 전쟁, 생명 공학 등에 대하여 재미있고도 체계적인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다.

인간의 궁금증에 기대어 얄팍한 지식을 파는 책들이 간혹 있다. 호기심 있는 주제를 열거하여 박학다식의 자위감을 주는 책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책들은 감흥이 오래가지 않고 얄팍한 지식은 곧 한계를 드러내버리곤 한다.

그래서인지 이인식씨의 글은 통쾌하다. 신랄하게 비판해서 통쾌한 게 아니다. 우리의 궁금증이나 모르던 사실에 대해서 너무나도 논리정연하고 알차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통쾌하다. 모든 과학이 아직 밝혀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이지만은 이렇게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일지라도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저자의 접근법에 쫓다 보면 혼돈을 느낄 여지가 없어진다.

이 책은 기존에 발표한 글 19편을 다시 수록하고, 여기에 8편의 새로운 글을 추가하여 모두 27편의 에세이를 담고 있다. 주로 성과 과학 기술과 관련된 내용의 에세이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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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 최재천의 동물과 인간 이야기
최재천 지음 / 효형출판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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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왔다. 단지 물리적 자원만이 아니라 인류가 이룬 철학, 과학 역시 자연을 토양으로 하여 발전해 왔다. 그 자연 중에서도 동물은 인간 사회와 좀 더 가까운 자연이기에 더욱 많은 토양을 제공하여 왔다.

우리가 동물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단지 우리와 무관한 세계에 대한 지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함일 수는 없다. 우리들이 자신의 행동이 올바랐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나 사회적 규범이라는 거울에 투영해보는 것이 필요하듯, 인류 역시 인류의 여러 행동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거울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거울은 다양한 세계를 이루고 있는 무수한 동물세계에서 제공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결국 그 속에서 인간의 원형을 발견한다는 것과 진배없을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는 이렇게 동물과 인간 사이를 엮어 쓴 수필집이다. 저자는 동물행동학을 전공한 최재천 교수다. 동물과 인간 사이의 간극은 크다면 크다할 수 있다. 이를 최재천 교수는 다양한 동물을 끌어들여 소재를 풍부하게 하고, 시사적 주제 역시 무리 없이 연결시킴으로써 그 간극을 독자들이 무리 없이 메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호주제 폐지에 대한 글을 봐도 그렇다. 저자는 단지 인류의 호주제 역사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자연계의 어느 동물도 진정한 의미의 부계사회란 찾을 수 없으며, 정자는 남성의 DNA를 난자에게 운반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값싸게 만든 기계에 지나지 않는 등의 사례를 거론하며 호주제가 낡은 악습이라고 말하며 나아가 호주제야말로 오히려 남성을 더 얽매는 제도라고 강변하고 있다.

저자는 '알면 사랑한다'는 믿음으로 지금까지 동물들을 들여다봐 왔다고 한다. 동물들의 이런저런 모습들을 계속 그렇게 들여다보면 생명도 하나둘씩 옷을 벗고 언젠가 그 햐얀 속살을 내보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내보여지는 것은 동물의 속살만이 아니라 인간의 속살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은 동물을 통해서 인간을 발견하는 거창한 의미에서만이 아니라도 재미있는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다. 동물도 연상의 여인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는가, 동성애가 있는가, 이혼을 하는가, 거짓말을 하는가, 입양을 하는가, 술을 마시는 동물이 있는가, 동물 사회에서도 집단 따돌림이 있는가 등의 주제에 대한 글은 한번쯤 궁금했던 내용으로 금방 심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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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집과 실패의 전쟁사
에릭 두르슈미트 지음, 강미경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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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격동기는 어느 때일까. 혁명(정치적이든, 산업적이든)과 전쟁이지 않을까 싶다. 이 양자는 짧은 기간 안에 어떤 것을 파괴하고 어떤 것을 건설한다. 그 파괴와 건설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지기에 인류사는 이 기간에 응축되어 표출되고 충돌되기 마련이다.

전쟁 역시 인류사를 크게 움직여왔다. 전쟁사만 제대로 쓰다 해도 인류사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인류는 전쟁의 징검다리를 짚고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그런 전쟁에서 어떤 것이 결정적인 승패의 요인으로 작용했을까, 리더십이 가장 잘 발현되고 명암이 뚜렷이 교차한다는 전쟁에서 러더십을 잘 발휘한 지도자는 누구였을까 하는 주제는 그저 호사가들의 궁금증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릭 두르슈미트의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는 우리의 눈길을 끈다. 저자는 BBS와 CBS의 종군기자로 30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생존해 있는 그 어떤 장군보다 더 많은 전쟁을 겪고 생존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렇게 전쟁의 생리를 꿰고 있는 저자가 갖가지 자료와 백 명 이상의 장군, 역사학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의 방향에 큰 영향을 준 10개의 전쟁을 선별했고, 이 전쟁에서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전환요소(hinge factor)와 군대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자질 등 두 가지 요소가 어떻게 전쟁과 역사의 방향을 뒤바꿨는가를 썼다고 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두 책 모두 우연한 전환요소가 세계사를 써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책은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 두 책이 공통으로 다루고 있는 워털루 전투를 보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두르슈미트는 그 전투 과정에서 끊임없이 '~했다면 ~텐데' 이라는 가정이 나온다. 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는 우연의 산물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그 우연의 파도에 타는 사람은 승리하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패배의 나락에 떨어질 듯만 하다. 저 거대한 적군의 파상공세도 어떤 우연의 힘 앞에서 꼬꾸라질 수도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이지만 츠바이크가 쓰면 달라진다. 그는 우연의 순간이 오지만 그 우연의 순간을 잡는 사람은 '준비된 천재'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인간의 삶으로 아주 드물게만 내려오는 이런 위대한 순간은 그 운명의 순간을 장악하지 못한 인물에게는 모질게 복수하는 법이다. 이런 위대한 운명의 순간은 언제나 천재를 원하고 그를 불멸의 모범으로 만들어주지만 유순한 자는 경멸하며 밀쳐버린다.'

예컨데 두르슈미트의 책에는 역사 인식이 없다. 다만 '전투 해설'만이 있을 뿐이다. 축구공이 어디로 흐르고 있고 지금 어느 쪽이 비었으니 어느 쪽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전투 해설말이다. 그가 쓴 것은 '전쟁사'가 아니라 '전투사'일 뿐이고, 선정된 10개의 전투는 역사의 향방을 바꾼 전투라기보다는 해설하기에 인상적인 전투였을 뿐이다.

역사 인식은 애초에 두르슈미트가 접근하고자 하는 방향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으니, 지도자의 자질을 거론한 측면에서라도 무언가 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도 역시 부족하다. 축구 해설가가 어느 한 편 입장에 서서 해설하면 해설이 잘 될 리가 없다. 워털루 전투를 예로 봐도 두르슈미트는 애초에 그루쉬의 입장에 서서 볼 생각이 없었다. 그 것 또한 츠바이크와 다른 점이다. 이미 손을 들어줄 사람을 선택하고 해설하기 시작한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이다.

차라리 츠바이크의 책을 다시 한번 더 읽어싶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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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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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라는 이름만으로도 펼쳐들게 된다. 손해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다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완서님의 특유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기대하면서 읽기 시작했으나 장을 거듭할수록 맛갈스런 대화는 오고가나 그 속에 박완서님의 그 '시선'은 보이지 않는다. 심영빈-유현금-한광이라는 초교시절 동창생의 끊이지 않는 인연이 요즘 부는 '아이러브스쿨 신드롬'에 걸맞는 적절한 소재 선택인 듯 싶으면서도 그 내용이 색달라보이지 않는다.

박완서님은 작가의 말에서 '환자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의사와, 가족애를 빙자하여 진실을 은폐하려는 가족과, 그것을 옹호하는 사회적 통념과의 갈등', 그리고 '궁긍적으로는 자본주의(돈)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라고 했으나,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자본주의(돈)에 대한 시선이 너무나도 통속적인 감이 있다.

글을 읽어가면서 이것은 박완서님의 글이 아니다, 무언가 은희경씨의 느낌이 묻어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결론 부분에 가서는 그 뜬금없는 형의 등장과 형의 문제 해결이 그마나 남아있는 이 책의 '맛'을 말끔하게 씻어줘버렸다. 형의 성격은 소설 내내 냉정하고, 이기적이고, 이지적이고, 말 수가 적은 인물로 묘사되다가, 종반에는 가족을 생각할 줄 알고,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알고, 남에 대한 뜻 깊은 배려를 할 줄 알고, 동생에게 자신의 속 뜻을 조곤조곤 얘기할 줄 아는 인물로 나온다. 이러한 변화는 '반전'이 아니라 '배반'이다.

이 책에는 심영빈-아내-유현금 간의 갈등과 심영빈의 아내와 어머니 간의 갈등, 그리고 가장 크게는 심영묘(영빈의 동생)와 시댁 간의 갈등이 중심축을 이룬다. 이 갈등이 종반부로 가면서 더욱 커져가다가 첫번째 갈등은 심영빈 아내와 유현금, 그리고 또 다른 동창생인 한광을 만나게 하는 주말연속극적인 설정으로 해소하더니, 두번째와 세번째 갈등은 심영준(영빈의 형)의 뜬금없는 원맨쇼로 해결하고는 서둘러 소설을 끝맺어버린다.

박완서님이 주말연속극을 겨냥하고 썼다면 이해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박완서님의 소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설을 한 이선옥 문학평론가나 뒤에 축사를 붙인 현기영/신경숙 소설가는 칭찬 일변도다. 그렇게 보였기에 그렇게 평론했다면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나 비판에 대한 불모지적인 풍토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빨리 다음의 박완서님의 근작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읽었던 10여권의 박완서님의 책에서 느꼈던 향을 이 책으로 인해서 조금 버렸고, 이 버린 맛대로 그냥 입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박완서님의 책으로 이 버린 맛을 빨리 헹구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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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현암사 동양고전
오강남 옮기고 해설 / 현암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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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읽다보면 그 시대적 상황에 대해 먼저 알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시대적 상황이라 하면 사상적 밑바탕으로 공자의 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역사적 밑바탕으로 그가 살았던 전국시대, 더 거슬러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특히 공자의 사상에 대한 이해에 상당히 목말랐다. 장자가 가장 영향을 받은 인물은 노자보다 오히려 공자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자신의 사상을 전개할 때 공자에 의지해 전개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자에 호가호위하면서 논리를 전개하기도 한다.

흔히들 장자, 그리고 노장사상이라 하면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경구를 연상하게 만든다. 암기식 정규 교육의 훌륭한(?) 자산으로 남아있는 글귀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을 '공간으로서의 자연'을 연상하기도 하지만, <장자>를 읽다보면 그 자연이 아니라 '이치로서의 자연'임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노장사상이 9세기 당나라 시대의 선승들에게 계승되면서 이러한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지만, 장자 사상의 근원적 가치는 단지 속세를 떠난 자기 수양과정으로만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개인의 자유(또는 개인의 초월), 그리고 상호의존성에 의거한 비본질론적인 철학으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공자는 유가적 견지에서 덕목과 규범을 앞세운다. '성인의 가르침'이라는 절대적 권위을 얘기한다. 제도나 이념, 도덕, 명분 등을 내세운다. 반면 장자는 이러한 것을 부정한다. 오히려 개인의 소요유(消遙遊)를 얘기한다. 보편적,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상대적, 시각주의적 진리를 앞세운다.

이러한 도를 설명하는데 장자 철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상관개념이 들어간다. 현대식으로 옮기면 변증법의 상호침투, 상대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있음은 없음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美 또한 醜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는 상관개념에 의하면 유가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가치의 중요성의 의미가 삭감되어버린다. 이러한 상관개념을 발전하면 도대체 보편타당한 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철학으로 발전되고, 그러다보면 도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한다는 도의 보편주의에 다다르게 된다.

서로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며 아웅다웅하는 제가백가가 쟁명하는 시대에 가히 경침을 울릴 수 있는 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상대의 논리를 억누르면서 이기는 철학이라면, 장자는 상대의 논리를 인정하면서 이기는 철학이라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과연 백가쟁명의 시대에 개인의 자유, 초월을 내세우는 태도가 옳았느냐는 것을 논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느낌이 든다. 장자의 무위의 정치가 과연 옳았는지 조금 갸우뚱해진다. 정치로 나아가려는 안회를 말리는 공자 얘기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서 공자는 장자 자신을 의미한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여기서 공자(곧 장자)는 개인의 도 닦는 것이 먼저라면서 '심재(心齋)'하라고 안명론의 입장에서 가르치고 있다.

군웅할거 시대에 개인의 자유, 개인의 성찰을 그 무엇보다도 우위에 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공자의 철학은 현실정치에 훨씬 걸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노자든, 장자든 누구나 고전을 쉽게 접목시켜 해설해놓았다고 한다. 그 '쉽다'라는 것에 함정이 있다는 느낌이다. 시오노 나나미도 역사를 볼 때는 과거 사람들의 눈으로 먼저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고전을 쉽게 접목시킨다는 서적들의 대부분은 현대적 사례에 맞춰 해설하는 것에 연연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장자의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제대로 장자를 볼 때 오히려 현대로의 접맥이 훨씬 수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쉽게 접맥시킨다는 책들이 그 당시 얘기를 하지 않은 채 자구의 해설과 현대의 재미있는 사례 끌어들이기에 급급한 해설로 치우치고 있는 점이 우리의 고전 읽기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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