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에 걸린 웹 - 웹의 권력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로라 J. 구락 지음, 강수아 옮김 / 들녘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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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20세기에 이르러 신천지를 찾았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2세기에 걸쳐 창성했던 지구상 탐험으로 이제는 더 이상 발견할 신대륙이 없을 것만 같았는데, 20세기에 신천지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이 신천지에 ‘Cyber Space'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구상의 발견’에는 지형적 한계에 봉착했지만, ‘Cyber Space'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무정형성에 의거해 그 한계가 없이 무한정 아메바처럼 확장할 것처럼 보였다. 실제 그 신천지에는 초기에 법도, 사회적 권력도, 때로는 사회적 이성도 미치지 못함으로써 신천지에 도착한 소수그룹에 의해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무정형성은 혹자에 의해서는 장밋빛으로 그려지기도 했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혼돈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Cyber Space의 확장은 언제까지나 현실세계와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도 없었고, 현실세계의 세력군의 진입은 결국 Cyber Space의 방향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미줄에 걸립 웹>은 이에 대해 이런 화두를 던진다. “테크놀로지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그 방향타는 누가 잡고 있는가?”

그리고 먼저, 기술결정론에 반기를 들면서 이 책의 원제인 사이버리터러시(Cyberliteracy)를 얘기한다. 사이버리터러시는 ‘사이버(Cyber)’와 글을 읽고 해독하는 능력을 뜻하는 ‘리터러시(Literacy)'를 결합한 신조어다. 이는 사이버스페이스 하면 떠올리는 웹 영상, 빠른 데이터 연결 이상의 것을 내다보는 비판적인 태도를 뜻한다. 기술결정론에 대한 도전이자 의식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는 것이다. 물론 사용자가 이를 위해서는 정보기술을 결정짓는 경제적, 정치적 힘을 이해해야 한다.

“과학기술에서의 다윈주의는 소비자의 힘이 자연선택의 힘과 맞먹으며, 결합이 있는 제품은 사람들이 구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진화 계보에서 떨어져나갈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인터넷의 미래 모습과 기능을 결정하는 것은 인터넷 기업, 통신 및 케이블 업체, 연예 및 미디어 그룹, 정부 관리 등이다. 우리가 행동주의적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연구, 교육, 그리고 우리가 지지하는 기술에 도사리고 있는 결정주의에 도전하는 열혈 사이버스페이스 시민이 되지 않는다면 다른 가능성들은 점차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즉, 이 책은 Cyber Space가 인터넷 기업이나 통신업체 등에 의해 주도되면서 기술결정론에 빠지지 않도록 이용자가 사이버리터러시를 가지고 비판적으로 대응하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Cyberliteracy를 거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영역을 설정하고 그 방향성을 제시한다. 테크노레이지(technorage), 젠더, 유머 및 혹스(hoax, 날조), 프라이버시와 저작권, 전자상거래, 인터넷중독 등이 그 영역들이다.

그 영역들을 언급하며 저자는 테크노레이지(technorage) 맞선 법률의 제정을 검토할 것을 역설하고, 성 차별적인 플레이밍에 대해 도전할 것을 주문하며, 혹스/유머 등에서 정보의 질을 판별하는 능력을 배양시킬 것 등을 얘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이버스페이스가 현실과 괴리되어 존재하는 개념으로 들리는 한 우리에게 유해하며, 따라서 “생각은 세계적으로 하되 먹는 것은 지금 이 곳에서”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사이버리터러시. 새로운 신조어이면서 주장하는 바가 명확히 드러나 고개가 끄떡거려지지만,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다소 실망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도덕적 윤리 같기도 하고, 일상적인 네티켓 같기도 하고, 그래서 무얼 하라는 것인지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세계를 장밋빛 환상으로 보거나 반대로 폄하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행동주의적 입장에서 보고 있는 관점만은 유념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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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팅 게임 - Science Pioneer(위대한 과학의 개척자들) 1
체리 루이스 지음, 조숙경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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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지위는 상승했는가. 인간의 인식의 지평은 넓어졌지만, 아쉽게도 우주의 무대 중앙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던 지위에서는 내려와야만 했다. 인간의 지위에 대한 첫번째 반격은 지동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것에 의해 우주가 인간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한 행성에 실려 돌고 도는 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말았다.

두번째 반격은 진화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고매한 정신적 존재가 한 미물에서부터 진화되어 왔음을 인정하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세번째 반격은 프로이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주의 중심이 아니든, 진화의 산물이든 인간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훌륭히 구축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뛰어난 인간마저 의식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무의식세계의 지배를 한편으로 받고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또 하나의 흠집이었음에 자명하다. 더 이상 추락할 여지가 없을 것으로 보였는데, 여기에 또 하나의 충격이 가해진다. 그것은 바로 '지구의 나이' 논쟁이다.

19세기만 해도 지구의 나이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성경의 창세기에 근거해 시간을 추산한 결과 지구의 나이를 6천년으로 보았다. 과학자 진영에서도 지구의 나이는 길게 봐야 2천만년으로 보고 있었다. 열역학을 확립한 캘빈은 지각의 표면이 식는 시간을 계산하여 2천만년을 주장했고, 이 분야에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2천만년의 시간은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구상에서 인간의 지위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인간은 지구가 생긴 이래 상당한 기간이 지나서 출현했지만, 그래도 지구 나이에 비해 지배하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기에 '지배자'로서의 풍모에 손상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윈이 남부 잉글랜드의 한 계곡을 조사하면서 침식에 의해 암석의 돔이 노출되기까지는 최소한 3억년이 걸렸다는 계산을 내놓았을 때는 한때 '출렁'거렸다. 그러나 다윈은 지질학자들의 반박에 즉각 휘말렸고, 결국 다윈의 '우연한 계산'은 철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세기말 원자의 핵, 라듐의 라돈으로의 붕괴, 헬륨 등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면서 '지구 시계'가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1903년 소디와 러더퍼드는 '붕괴 사슬'을 확립해냈고, 그 뒤 10년 뒤 아서 홈즈는 이 방법으로 지구의 암석을 분석하는 방법을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지구의 나이' 논쟁은 중요한 분기점을 통과했고, 20세기 중반, 인류는 드디어 지구에게 46억년이라는 나이를 부여하였다.

46억년이라는 나이로 인해 인류는 지구의 자정 직전에 태어난 미미한 존재이자, 지구의 일시적인 지배자로 머무를 수도 있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구의 나이’를 찾는 여행은 단지 지구의 존재위치를 자리매김 해주기 위한 과학자의 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위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여행은 고행이 필요했다. 수많은 지질학자, 생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들이 이 여행에 동행했다. 이들 가운데 지구의 나이를 찾는 마라톤에서 ‘마(魔)의 고개’를 넘은 사람이 바로 아서 홈즈였다. 비록 1953년에 지구의 나이를 정확하게 이끌어낸 과학자는 패터슨에게로 돌아갔지만, 패터슨은 그의 스승인 아서 홈즈의 어깨 위에 올라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데이팅 게임>은 아서 홈즈에 관한 책이다. 지구의 나이를 찾아 나선 한 숨은 과학자의 일정을 다룬 책이다. 인간은 지구의 나이를 정확히 계산해 낸 패터슨만 기억할지 모르지만, 지구는 자신의 나이를 찾아준 은공을 아서 홈즈에게 돌릴 지도 모른다.

20세기 들어 숨 가쁘게 진행되었던 ‘데이팅 게임’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 게임은 러더퍼드, 아서 홈즈, 패터슨 등의 과학자들을 승자의 반열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지만 최후의 승자의 몫은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할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지구다. 그리고 인간은 시상대에서 조용히 내려와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서는 지구를 향해 뜨거운 박수를 쳐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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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0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0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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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 만리장성이 있다면 서양에는 로마가도가 있다. 만리장성의 경우 기원전 3세기의 진시황시대 및 16세기의 명나라시대에 건설된 것까지 합치면 무려 5천km. 그럼 로마 가도는? 기원전 3세기부터 5백년 동안 건설한 도로 총길이는 지선도로를 뺀 간선도로만 해도 8만km에 이르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가도의 연장선에 있는 다리 역시 3천개를 구축했는데 그중 3백개는 지금도 사람이나 자동차가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로마의 테베레강에 놓인 11개의 다리 가운데 5개는 2천년 뒤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가도도 가도지만 수도(水道)도 놀랍다. 로마 관광사진에 큰 다리처럼 나오는 수도는 그저 로마인의 전시행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들여다보면 로마의 인프라가 얼마나 견고한지 그 힘이 느껴진다. 기원전 4세기에 첫 시공된 수도는 모두 11개가 건설되었다. 그 중 기원전 2세기에 건설된 마르키아 수도를 보면 총 길이가 92km인데 그 중 81km가 지하로 흐르고 11km가 지상으로 흐른다. 그 지상의 11km 중에는 9.6km가 고가 수로로 되어 있다. 90여km 떨어진 수원에서 로마시내까지 물이 흘러들도록 하기 위해서는 완만한 경사를 계속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서 산을 뚫고, 고가 수로를 놓은 것이다. 현대 산업의 동맥이 고속도로라면 고대 로마의 동맥은 이 수로였던 것이다. 지금 고속도로에 자동차가 흐르듯이 2천년 전 로마는 수도에 물이 끊이지 않고 흘렀던 것이다. 마르키아 수도의 경우 하루 수송량이 185,600㎥(현대인 37만명이 소비할 수 있는 양)였으니 로마는 이 풍부한 ‘수혈’을 통해 화려한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로마의 수도는 로마 제국 각지에서 건축되었다. 속주민에게 로마의 힘을 자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프라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로마 수도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옛 영광을 웅변해주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얘기를 『로마인 이야기 10』에서 쓰고 있다. 그동안 9권까지 쓰면서 묵혀 두었던 로마의 인프라에 관한 얘기를 이 한 권에 모두 털어놓은 것이다. 그러니 9권까지 따라오지 못했던 독자들도 10권만은 별도로 읽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진정한 위대성은 인프라 구축에 있다고 하면서 이의 방대함과 견고성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좀 다른 면에서 볼 필요도 있을 듯하다. 1세기경에 로마 인구는 무려 1백만명이었다. 잘 뻗은 가도는 물자의 집중도 야기하며 로마의 팽창을 가속화시켰을 것이다. 로마는 이러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도 수도와 같은 여러 인프라를 만들었을 것이다. 로마를 중심으로 방사선처럼 뻗어가는 로마의 수도는 로마 문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2천년 전의 로마인은 현대 최고 문명인들이 사용하는 만큼의 물을 소비할 정도였다. 그러나 성장과 풍족함은 항상 문제를 가리거나 희석화시켜버리곤 한다. 이러한 인프라는 로마를 인구압의 문제로 몰아넣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현대도 1백만명 정도의 도시라면 수많은 문제가 나타나는데 로마라고 해서 그렇지 않을리는 없다. 그러나 풍성함만을 알았던 ‘자신있는’ 로마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던 듯 하다.

항상 ‘적극적인 방법’이 최선은 아닌 것이다. 도심 주차난이 심각할 때 도심에 주차장을 늘리는 ‘적극적인 방법’이 오히려 주차장을 줄여버리고 주차료를 높이는 ‘소극적인 방법’보다 못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로마가 멸망하고 인구가 3만으로 줄어들었을 때 로마의 수도는 제 할 일을 못찾고 방치되고 말았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 로마의 인구 집중이 어떤 문제를 야기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수도를 늘려나가는 정책은 문명에 대한 과신이었다는 생각만은 든다. 아직도 도처에 남아있는 수도의 웅장함 속에서 왠지 문명의 그늘이 느껴지는 것은 내가 속이 좁아서일까. 2천년 전의 문명에 대해 감탄사만을 연발할 때 우리는 현재 우리의 문제점도 읽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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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우리 나무
박상진 지음 / 눌와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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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조선시대 고가구전 관람을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가구에 대한 지식이 조그마한 역사지식과 고향마을 집의 옛 기억에 대한 것밖에 없는지라 1층을 둘러보는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다 2층을 둘러보던 중에 관람객에게 고가구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는 안내자를 만났는데, 그 때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재질과 양식, 기법 등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너무나도 새록새록 다가오는 것이다. 그야말로 ‘알면 보이고 보이면 애정이 가게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 모든 게 그렇다. 그 사람이 어떤 사물에 대해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방법은 그 사물에 대해 얼마나 세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로 대별될 수 있다. 그 분야 사물이나 사람의 이름을 꿰고 있다는 것, 이것은 단순한 지식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대개는 많이 안다는 것은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동일어가 되기 십상이다.

그 애정이란 게 희한하다. 어제 아무 생각없이 보던 돌도 어느날 사랑스럽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것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어느날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낸 후 그 책은 마치 큐피드화살처럼 많은 사람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지난번 갔던 소쇄원도 이제 다른 모습으로 보이고 ‘사랑’까지 하게된 것이다.

그 소쇄원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들고 와서 꼼꼼히 둘러보던 사람들을 본 기억이 있는데, 얼마전 경복궁에 갔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어느 30대 여인 두 명이 『궁궐의 우리 나무』란 책을 들고 와서 떨어진 낙엽을 주워들고 일일이 대조하며 나무에 대한 사랑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도 알아야지만 ‘사랑’이 가게되는 법이다. 나무가 거리의 소품이자 아파트단지의 장식물로 전락해버려 사실 의도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눈에 잘 다가오지 않는다. 『궁궐의 우리 나무』의 저자 박상진씨는 그런 나무에게 눈길을 돌릴 수 있는 ‘나무 사랑법’을 얘기하고 있다.

굳이 궁궐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궁궐에는 조선시대 건물만 옛것이 아니다. 거기에 심어져 있는 나무도 옛것이다. 우리 고유의 정신은 건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도 깃들어 있는 것이다. 궁궐에 가거든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지만 말고, 몇십년, 몇백년 전에도 묵묵히 서 있었던 나무 숨결도 어루만져볼 일이다.

우리 나무를 얘기하되, 많은 사람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궁궐에 있는 나무를 얘기하고, 또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궁궐에 있는 모든 나무들의 생태지도(地圖)를 상세히 그려놓고 있는 점에서 저자의 ‘나무사랑법’을 엿볼 수 있다.

나무에 대한 얘기를 구구절절이 써 놓았어도 실제 그 나무를 봤을 때 알아볼 수 없다면 저자의 ‘나무사랑’은 전이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하면서 출석부를 통해 이름을 외우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궁궐의 우리 나무』는 아이 사진이 부착된 것은 물론 아이 자리 위치까지 기록되어 있는 출석부와 같다.

사실 예전에는 나무를 책을 통해서 익힐 필요가 없었다. 그저 산천에서 뛰어 놀면서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도상(圖上) 훈련을 통해서 익힌 다음에야 나무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예전에는 물놀이 하면서 익힌 수영이었지만, 이제는 체육교실에 가서 배워야지만 할 수 있듯이 말이다.

『궁궐의 우리 나무』는 나무에 대한 지식을 주는 책이라고만 할 수 없다. 설사 그 출발이 ‘지식’에 대한 욕구이었을지언정 그 끝은 ‘사랑’으로 끝날 것이다. 그 출발은 책에서 시작하겠지만, 그 끝은 주변의 나무를 둘러보는 것으로 끌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주위에는 예전에는 몰랐지만 정말 사랑스러운 나무들이 숨쉬고 있었다는 색다른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에 대한 사랑, 그것은 나무에 대해서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람 사귀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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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신경림 지음 / 우리교육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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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는 1998년도에 나온 책인데 TV를 통해 소개되면서 4년만에 빛을 보았다. 독자 입장에서는 교과서 등에서 보았던 주옥같은 시를 좀 더 폭넓고 의미있게 다시금 되집어보는 즐거운 여행이겠지만, 저자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시의 원류를 찾아나선 의미있는 여행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시를 읽으려면 시인을 읽어야 하고, 시인을 읽으려면 시인이 자라난 환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기저에 흐르는 주장이고, 그렇기에 책 제목 역시 ‘시인을 찾아서’이다.

우리는 그동안 시를 잘못 읽어왔다. 그 주범은 학교교육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학교교육에 대해 다시 한번 울분을 토하지 않을 수 없었고, ‘활어(活魚)의 시’를 ‘사어(死魚)의 시’로 읽어버리며 보낸 젊은 시절이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감수성이 가장 높을 때 ‘감수’는 ‘점수’에 억눌려 고사하고 말았고, 그게 억울한 것이다.

우리는 정지용의 ‘고향’을 읽을 때 충북 옥천의 정지용 고향마을을 그리지 않고 음미한다. 박목월의 ‘나그네’가 조치훈의 ‘완화삼’의 화답시라는 것을 모르고서 우리는 ‘나그네’를 읽었다. 신석정의 시를 읽으면서 그의 ‘참여정신’을 읽지 않고 ‘목가적’인 것만 읽으면 시를 읽고도 반쪽만 읽은 셈이 된다. 4행으로 간결하면서도 서정을 응축하여 노래한 ‘감자꽃’은 권태응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저 재미있는 동시로만 들릴 뿐이다. ‘오-매 단풍 들것네’를 노래했던 김영랑의 생가 툇마루에 앉은 신경림 시인의 간접적 경험을 통해 듣는 ‘오-매 단풍 들것네’는 다른 느낌일 수밖에 없다. 종교인(불교)-시인-민족운동가로서 한용운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용운 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지언정 한용운의 시 그 자체에 온전히 젖어들 수 없다. ‘깃발’로만 알려졌던 유치환이 지식인 행세에 부끄러워 하거나 왜 저항하지 않느냐는 시어를 토해내는 것을 읽지 못한다면 ‘깃발’이 제대로 읽혀질 수 없을 수도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육사, 윤동주 시인일지라도 교과서 밖으로 걸어나온 그들의 시를 읽는 것은 다른 느낌이고,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한직, 백석, 신동문의 시와 시인을 접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시를 거슬러가는 여행이자 시인을 찾아나서는 여행은 그 시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이다. 우리가 얘기하는 고향은 사실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의 정체성이다. 그것은 단지 그리움이나 과거로 좁게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을 때 내가 자란 곳, 내가 나온 초등학교, 동산을 가로질러 그 초등학교로 가는 산길, 뛰놀던 앞산과 뒷산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자란 곳을 단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나’이기 때문이다. 절친한 친구가 아버지 상을 당하여 전남 시골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문상중에 홀로 나와 조용히 그 동네를 거닌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실 그 친구를 깊이 ‘음미’해보기 위해서다. 택리지에서 산세와 물세로 그 고장 사람을 평하는 것은 어쩌면 ‘과학’이다.

요즘 고향을 가면 예전의 흔적이 점차 희미해지는 현실을 접하면서 사진에서 자신의 모습이 희미해지는 ‘백 투더 퓨처’의 한 장면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 없어지는 고향이 나 자신의 존재마저 흐릿하게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변하되 그 숨결은 남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굳이 생태계 보전이니 파괴의 불가역성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받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시인들, 그 시인들이 다시 돌아오면 그 때 그 시어들을 쏟아낼 수 있을까. 풍덩댈 물오리 없는 고향땅에서 권태응 시인은 ‘오리’를 또 써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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