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신경림 지음 / 우리교육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는 1998년도에 나온 책인데 TV를 통해 소개되면서 4년만에 빛을 보았다. 독자 입장에서는 교과서 등에서 보았던 주옥같은 시를 좀 더 폭넓고 의미있게 다시금 되집어보는 즐거운 여행이겠지만, 저자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시의 원류를 찾아나선 의미있는 여행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시를 읽으려면 시인을 읽어야 하고, 시인을 읽으려면 시인이 자라난 환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기저에 흐르는 주장이고, 그렇기에 책 제목 역시 ‘시인을 찾아서’이다.

우리는 그동안 시를 잘못 읽어왔다. 그 주범은 학교교육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학교교육에 대해 다시 한번 울분을 토하지 않을 수 없었고, ‘활어(活魚)의 시’를 ‘사어(死魚)의 시’로 읽어버리며 보낸 젊은 시절이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감수성이 가장 높을 때 ‘감수’는 ‘점수’에 억눌려 고사하고 말았고, 그게 억울한 것이다.

우리는 정지용의 ‘고향’을 읽을 때 충북 옥천의 정지용 고향마을을 그리지 않고 음미한다. 박목월의 ‘나그네’가 조치훈의 ‘완화삼’의 화답시라는 것을 모르고서 우리는 ‘나그네’를 읽었다. 신석정의 시를 읽으면서 그의 ‘참여정신’을 읽지 않고 ‘목가적’인 것만 읽으면 시를 읽고도 반쪽만 읽은 셈이 된다. 4행으로 간결하면서도 서정을 응축하여 노래한 ‘감자꽃’은 권태응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저 재미있는 동시로만 들릴 뿐이다. ‘오-매 단풍 들것네’를 노래했던 김영랑의 생가 툇마루에 앉은 신경림 시인의 간접적 경험을 통해 듣는 ‘오-매 단풍 들것네’는 다른 느낌일 수밖에 없다. 종교인(불교)-시인-민족운동가로서 한용운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용운 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지언정 한용운의 시 그 자체에 온전히 젖어들 수 없다. ‘깃발’로만 알려졌던 유치환이 지식인 행세에 부끄러워 하거나 왜 저항하지 않느냐는 시어를 토해내는 것을 읽지 못한다면 ‘깃발’이 제대로 읽혀질 수 없을 수도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육사, 윤동주 시인일지라도 교과서 밖으로 걸어나온 그들의 시를 읽는 것은 다른 느낌이고,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한직, 백석, 신동문의 시와 시인을 접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시를 거슬러가는 여행이자 시인을 찾아나서는 여행은 그 시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이다. 우리가 얘기하는 고향은 사실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의 정체성이다. 그것은 단지 그리움이나 과거로 좁게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을 때 내가 자란 곳, 내가 나온 초등학교, 동산을 가로질러 그 초등학교로 가는 산길, 뛰놀던 앞산과 뒷산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자란 곳을 단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나’이기 때문이다. 절친한 친구가 아버지 상을 당하여 전남 시골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문상중에 홀로 나와 조용히 그 동네를 거닌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실 그 친구를 깊이 ‘음미’해보기 위해서다. 택리지에서 산세와 물세로 그 고장 사람을 평하는 것은 어쩌면 ‘과학’이다.

요즘 고향을 가면 예전의 흔적이 점차 희미해지는 현실을 접하면서 사진에서 자신의 모습이 희미해지는 ‘백 투더 퓨처’의 한 장면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 없어지는 고향이 나 자신의 존재마저 흐릿하게 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변하되 그 숨결은 남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굳이 생태계 보전이니 파괴의 불가역성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받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시인들, 그 시인들이 다시 돌아오면 그 때 그 시어들을 쏟아낼 수 있을까. 풍덩댈 물오리 없는 고향땅에서 권태응 시인은 ‘오리’를 또 써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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