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의 살아가는 힘을 믿는다
이상권 지음, 이원우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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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린시절을 과연 잊을 수 있을까. 어린시절 뛰놀았던 그 동산과 들판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시절에 묻어있던 순수와, 엄마 젖무덤 같은 따스함과, 아련한 꿈의 느낌을 지울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우리는 과거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그 시절의 자연과 어울린 추억은 생득경험이 아니라 유전자 변화로 전이된 느낌까지 들 정도다. 유전자에 각인된 과거 경험은 잠잠해 있다가도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정화시키고 심신을 고요히 침잠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기쁨이자 천형(天刑)이다. 돌아갈 곳 없어도 과거의 경험은 자궁의 모태와도 같이 우리를 다독거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나 깊이 각인된 그 경험은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은 지문이 되어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천형이 되기도 한다. 그 과거의 끈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과거를 향한 기억은 일견 보수적이고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상황에 따라 진보로 바뀌기 마련이다. 우리는 과거에 각인된 생활로 인해 파괴의 발목을 그나마 붙들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이 그리는 장밋빛 미래에 결여되어 있을 수 있는 단점을 과거의 기억에 준거하여 찾아내고 이를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서 끊임없이 보완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반합이 항상 이성적인 지그재그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를 슬프게 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권씨의 『들꽃의 살아가는 힘을 믿는다』는 ‘과거’를 얘기하고 있되 ‘미래’를 얘기하고 있다. ‘들꽃’을 얘기하고 있되 그를 통해 ‘생명’을 말하고 있다.

이상권씨가 머위, 창포, 삐비, 감꽃, 꽈리, 질경이 등 우리 삶 속에 그대로 젖어들어 있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거기에 깃든 옛이야기들을 조용조용 읊조리면, 엄마의 자장가처럼 느껴지면서 읽는 이의 옛 추억들도 한올 한올 풀려 나온다. 그렇게 착 가라앉고 조용해진 마음의 여진은 한동안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콘크리트 건물 숲에 둘러싸인 풀 하나에도 정이 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그 풀들은 과거에는 우리의 생활 그 자체였다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지금처럼 객체로 물러나 있거나 관조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태체험을 간다 해도 그 풀들은 관찰대상 그 이상을 넘어서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생활 자체였다. 삶이 진하게 묻어나 있었다. 감꽃 목걸이에서 감꽃을 빼어먹다가 배가 아프기도 하고, 생가지 나무로 군불 때다가 매운 연기 마시기도 하고, 간식거리 없어 궁한 뱃속 삐비 뽑아 먹으며 달래기도 하는, 그렇게 그 풀들은 삶과 어울려 곁에 있었다.

그런 옛 이야기를 아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어진다. 그것은 극성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감성교육을 해야된다는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습성을 다음 대에 물려주려는 자연적인 동물학적 현상이 아닐까 싶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동물학적 현상 때문에 비이성적이 되기도 하는 과학의 수레바퀴를 어느 측면에서는 제어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동물학적 감수성을 쉽게 잊기도 한다. 리피터(Repeater)라는 IT기기가 있다. 약해진 전자신호를 증폭하여 더욱 멀리 전송하도록 하는 기기다. 그런 리피터처럼 우리는 과거의 그 기억들의 파장을 증폭시킬 필요가 있다. 도심의 삭막한 빌딩과 찌든 공기로 인해 나날이 위축되고 퇴화하고 흐릿해져 가는 기억들을 먼지 걷어내고 다시 색칠해가면서 증폭시켜야만 한다. 그 증폭기 없이는 우리는 자손에게 과거의 기억들을 물려주려 하는, 그리하여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그러한 동물학적 행동이 점차 퇴화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추억에 너무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꽃의 살아가는 힘을 믿는다』와 같은 증폭기가 더욱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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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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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머니의 익숙한 흥얼거림이 들려온다. 그리고는 곧 내레이터의 '잃어버린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라는 말이 이어진다. 그러면서 여운이 인다. 잃어버리는 게 그 흥얼거림만일까. 그 무수한 방언들, 오묘한 형용사들, 그리고 욕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누가 아껴 사용할까.

그러나 이것은 전 세계적인 언어의 실종에 비하면 에피소드도 되지 않는다. 유럽이 접촉하기 전 오스트레일리아에는 250종 이상의 언어가 분포했으나, 지금은 500명 넘게 쓰는 언어가 10%도 안되는 18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나마 21세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는 언어는 2~3개 정도로 예측되고 있다. 세계 인구의 90%가 세계 언어의 2%도 안되는 100개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니 '파레토의 80/20 법칙'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우리가 생물다양성의 파괴, 소수 문화의 핍박을 얘기하는 동안에도 언어는 그 이상의 고통 속에서 훨씬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은 이 언어의 사멸에 주목하며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글랜빌 프라이스는 이를 '언어 살해'라고까지 표현했다. 멕시코의 경우 16세기 초에 2,500만 명이던 인구가 유럽인의 점령이 이어지면서 불과 60년 이후에는 200만 명으로 축소되었다. 그들은 사라지면서 그들의 언어까지 가지고 갔다. 개발을 절대명제로 떠받들 때 우리는 환경이 파괴되어 가는 것을 몰랐듯이, 특정 문화의 우월적 지위를 떠받드는 동안 언어가 사멸해가고 있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은 언어의 가치를 재조명했다. 단지 언어학적인 가치나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보는 것을 넘어, 언어의 다양성을 문화적 다양성의 척도로 보고 있으며, 언어의 다양성을 잃는 것은 생물다양성을 위협하는 것으로까지 조명하고 있다.

'각 언어마다 세계를 보는 자신만의 창이 있다. 모든 언어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언어가 스스로 일구어 낸 모든 문화의 기념비와도 같다. 인간 정신의 무궁한 창의성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월한 언어란 없으며, 모두 현실을 비추는 창이라는 시각은, '언어 사멸'을 낳은 인류의 오만 중심부로 뛰어드는 칼날에 다름 아니다.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의 가치를 존중하는 마음이 결여된 것이 문제였기에 우리는 지금 언어의 풍성함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더 나아가,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은 언어 다양성이 나타나는 지역과 생물 다양성이 나타나는 지역이 일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파푸아뉴기니에 860개 언어가 있는 등 열대지방의 주요 17개국에 전 세계 언어의 60%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저자는 '언어는 인간이 자연환경과 그 환경에 상호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축적하고, 유지하고, 전승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세계의 생물학적 다양성의 상당 부분은 아직 목록도 작성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언어적 다양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생물다양성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저자의 가장 큰 걱정거리다. 필리핀 하우누족은 1,500종의 식물을 구별하는데 이는 서구의 과학에 따른 분류보다 4백종 이상 웃돈다고 한다. 언어의 사멸은 곧 인류가 알고 있는 지식 총량의 절대적인 감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언어들이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희미한 깜박거림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우월적 언어, 우월적 문화가 있다는 유령이 돌아다니는 한 등불은 하나 하나 안타까운 숨을 거두고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은 짙어져만 갈 것이다. 저자는 안정적인 다중언어 사용을 하나의 대안으로 얘기하고 있다. 그것이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지식총량을 넓혀주고, 그럼으로써 생물다양성을 더욱 보존할 수 있는 길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 책에 언급된 한 아메리카 원주민 대릴 베이브 윌슨의 말은 큰 여운이 남는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백인들의 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영원히 살아남으려면 우리말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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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보낸 산야초 이야기 지리산에서 보낸 시리즈
전문희 지음, 김문호 사진 / 화남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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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 안의 매화차 사진 한 장. 찻잔 속에서 꽃망울을 톡 터뜨리고 있다. 꽃잎이 망가지지 않게 한 송이 한 송이 조심스럽게 따서 젓가락으로 집어 한지 위에 넌 후 시루에 살짝 쪄내기를 세 번 반복했다던 매화꽃이기에, 찻잔 안에서 그 빛 그대로 그 모양 그대로 되살아나 있다.

차의 향은 덖기 전 생잎의 상큼한 향내를 많이 품고 있을수록 좋다고 한다. 그 향내만이 아니라 빛과 모양마저 찻잔 안에 옮겨졌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이상의 즐거움이 따로 있었다.

<지리산에서 보낸 산야초 이야기>의 저자 전문희씨는 산야초차를 마실 때마다 그것을 채집한 장소, 그 때의 아름다운 풍경, 자신의 심경, 나무와 산이 어우러져 내는 바람소리가 다시 떠오른다고 한다. 산야초를 통해 자연의 생명력을 전달받을 뿐만 아니라, 산야초차 향을 통해 산 내음까지 느끼는 저자에게 산야초차는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한 방법처럼 보인다.

저자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지리산에서 새 삶을 얻었다. 우리 산야에 가까이 다가서면 설수록 자연은 그 속살을 내비쳤고, 저자는 그 속살을 헤치면서 차츰 주변의 산야초로 우리 차를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책에 소개된 백초차, 칡꽃차, 으름차, 연잎차, 뽕잎차, 인동초차 등 수많은 우리 차는 그렇게 몸으로 건져 올린 소중한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 삶에서 어느 순간 괴리되어버린 산야초를 복원해내고 있다. 우리 삶에 가까이 있었던 여러 나무와 꽃들을 알아보고, 가까이 두고, 지켜보는 것만이 복원은 아닐 것이다. 채취하고 섭취하면서 음미하는 것이 그저 관상하는 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복원일 수 있다. 그러할 때 오히려 우리 가까이 다가오게 된다. 황대권씨가 야생초를 복원해냈다면, 전문희씨는 산야초와 그것으로 만든 산야초차를 복원해낸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전통찻집 메뉴판 위에 올려져 있는 여러 차는 이제 더 이상 ‘건강’이나 ‘전통’의 의미로만 읽힐 수 없다. 그 차에는 우리 산야의 바람과 햇볕이 묻어나 있고 그렇기에 ‘자연’의 의미로 느껴질 것만 같다.

차를 만들고 음미하는 것이 자연과의 교감을 나누는 과정일 수밖에 없기에 이 책은 단순히 차에 대해서만 써놓은 책이 아니다. 저자가 지리산과, 그 자락에서 자라나는 여러 나무와 꽃들과, 또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몇몇 사람들에 대한 얘기들을 풀어놓고 있기도 하다. 산야초차는 그 속에서 나오는 얘기이지 이들과 분리되어 나올 수 있는 얘기도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의 진솔한 삶은 다른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 그 변화는 서서히 오되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저자의 진솔한 삶, 그 자체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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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의 탄생
니겔 로스펠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지호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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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아이를 데리고 갈 때마다 가슴 한켠에서는 일말의 자책감이 항상 남는다. 그것은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얘기할 때와 비슷한 심정이다. 아이에게 저 방책과 해자 건너편의 진실에 대해서 얘기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근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동물원은 기본적으로 갇힌 동물들의 슬픔과 ‘마주 대해서는’ 그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는 법이다. 마술사의 마술이 탄로나지 않을 때 관객은 즐거워 하듯, 동물원 역시 동물의 고통을 적당히 외면할 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동물원은 기본적으로는 동물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었다. 동물원의 역사를 봐도 그곳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그럴지라도 동물원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진화해오지 않았나 하는 일말의 희망은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동물원의 탄생』은 그 희망의 씨앗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이 책은 현대동물원의 시조격인 하겐베크 동물원과 그 동물원을 만든 칼 하겐베크에 관한 글이다. 하겐베크 이전에도 물론 동물원은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동물 전시는 거의 예외 없이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주인의 부와 권력을 강조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그러다 20세기 초반 하겐베크혁명이 일어난다. 하겐베크는 동물들의 점프능력에 대한 통계를 바탕으로 그 시대 동물공원의 필수품이라 여겨졌던 창살과 울타리가 없는 동물 우리를 고안해낸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해자(垓字)방식이 1907년에 탄생한 것이다.

사람들은 창살 뒤의 좁은 방 안에 갇힌 동물을 보기 싫어하며, 대신 동물이 자연 상태에서 살고 있는 듯한 전시를 더 좋아한다. 하겐베크는 동물의 존엄성을 자각했기 보다는 이 점을 충실히 따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실제 ‘창살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진 순간에도 동물들은 ‘살육으로부터의 해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겐베크 회사는 어미를 죽인 다음 어린 코끼리나 호랑이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얻은 동물도 사냥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금방 목숨을 잃기도 했다. 어떤 동물 운송기를 보면 아프리카 내륙에서 홍해까지 걸어나오는데 54일이 걸렸는데,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동물은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하겐베크 이후 동물원의 역사는 100년을 더 흘러왔다. 이에 대해 이 책의 저자 ‘니겔 로스펠스’는 동물 전시 측면에서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만 더욱 정교해지고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고 말한다. 더 나은 자연이 창조되었고 관리시스템 역시 진화했다.

그렇다고 동물을 위한 멋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이런 유형의 전시들이 추구하던 바는 관람객들의 즐거움이었지 동물을 위함이 아니었다”고 말함으로써 현대동물원의 한계에 따끔한 일침을 놓고 있다.

요즘 동물원을 보면 ‘보호’와 ‘교육’의 측면을 더욱 강조하는 듯 하다. 보호를 위해서 동물원을 더욱 쾌적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교육을 위해 체험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내놓고 있다. 실제 요즘은 직접 동물을 만질 수 있고, 먹이도 줄 수 있는 ‘체험’을 주제로 한 전문 동물원이 늘어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고상한 ‘체험’에도 ‘인간 중심 정신’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동물원은 변화 발전해왔지만, 그 근본적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하겐베크혁명은 전시방법의 혁명일 뿐 근본정신을 뒤흔든 혁명은 아니다. 진정한 혁명은 동물원이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동물의 입장을, 그리하여 자연의 입장을 고려하기 시작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다음에 동물원에 가거들랑 ‘아이들의 웃음’만이 아니라 ‘동물들의 모습’도 진지하게 바라볼 일이다. 사람들이 동물들의 슬픔을 ‘마주 대하기’ 시작할 때 동물원은 서서히 변해갈 것이다. 그것이 변화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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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수잔네 파울젠 지음, 김숙희 옮김, 이은주 감수 / 풀빛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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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물어본다. '왜 녹색꽃은 없을까?' 한참을 생각한 아이가 '안 예쁠 것 같으니까.'라고 답을 한다. 참으로 우리는 인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은연중 배어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 녹색꽃이 없을까. 식물은 꽃마저 녹색이면 화수분을 옮길 벌이나 나비를 끌어들일 수 없으니 자연히 눈에 뜨이는 색깔로 꽃을 꾸밀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아이는 꽃의 입장이 아니라 우리의 입장에서 안 예쁠 것 같기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아이의 답변을 들으면서 원래 인간은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 발달'도 자기중심에서 차차 사회 도덕과 규율을 체화해가는 방향으로 발달이 이루어지듯, '자연 발달'도 애초에는 자기중심, 인간중심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자연 교육도 한번 곱씹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자연을 접하고 하고, 식물과 동물의 이름과 속성을 알게 해준다고 해도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무너뜨려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효과도 없지 않을까 싶은 거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자연에 대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진리다. <식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의 저자 수잔네 파울젠은 '곤충들을 잘 아는 생물학자나 생화학자의 눈에는 녹색은 전쟁의 색이며 꽃 핀 자연은 독의 전쟁터이다'라고 얘기한다.

식물들은 저항한다. 가시, 침, 찌르는 털로만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왜 과일이나 야채맛이 다양할까. 그것은 인간에게 다양한 맛을 주기 위함이 물론 아니다. 식물이 그들의 적에 대해 벌이는 화학방어전이다. 식물이 왕성하게 성장하는 시기는 그들의 적에게도 호기임에 틀림없기에 식물은 그 시기에 자신의 방어능력을 최대화시킨다. 떡갈나무는 대략 8월경에 자신들을 빨아먹고 찌르고 쏠아먹는 적에 대해 맹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하는데, 잎 속에 유피제(탄닌) 용량을 급속히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저항한다고 한다. 이 결과 떡갈나무에서는 오히려 8월에 나비나 곤충의 수가 적게 발견되는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생물학자로 빈대 전문가인 슬라마는 미국에 가져간 1,215마리의 빈대 중 단 한 마리를 제외한 나머지가 유충으로 머무른 것에 의아하게 생각했다. 원인은 유충들을 위해 펴놓았던 필터 용지가 문제였다. 그 종이는 발삼전나무로 만들었는데, 그 나무는 빈대의 애벌레 성장을 가로막는 호르몬을 만들어내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자연세계를 접하면 놀랍기 그지없다. 저 평화로운 들판은 그저 평화로울 수만은 없는 식물들의 피눈물 나는 삶의 공간이며, 저 조그만 식물 역시 자신의 생존조건을 최적화시키는 싸움을 끊임없이 전개하는 생명체로 그저 하찮게 볼 수만은 없는 존재로 보인다. 자연교육은 자연에 대한 호기심, 또는 지식 전달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종착지일 수는 없다. 인간의 처지에서가 아니라 다른 생명체의 처지에서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가지지 않는 한 그것은 섣부른 지적 충만감에 그칠 수 있다.

디지털리스라는 꽃이 있다. 일명 여우꼬리라고 불리는 이 꽃은 길쭉한 꽃봉오리가 아래로 축 처져 있다. 꽃이 예쁜데다 층층이 열려 벌의 눈길을 끌기는 쉬우나 문제는 벌이 꿀을 먹으려면 꽃 안쪽으로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미끄러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디지털리스라는 꽃은 꽃봉오리 안쪽에 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작은 돌기들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오묘한 자연의 진리를 접하면서 '참으로 신기한 꽃도 다 있구나' 하고 그쳐버린다면 그것은 지적 충만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에서 생존을 위해 지난한 진화과정을 겪어왔을 디지털리스의 삶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신기함을 넘어 존경스러움까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너른 들판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그 들판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개체의 지난한 삶까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욕심일까. 이 책은 '식물이 우리에게 무엇이길' 바라기 이전에 식물은 '식물 그 자체로 먼저 존재해왔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좋은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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