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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수잔네 파울젠 지음, 김숙희 옮김, 이은주 감수 / 풀빛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아이에게 물어본다. '왜 녹색꽃은 없을까?' 한참을 생각한 아이가 '안 예쁠 것 같으니까.'라고 답을 한다. 참으로 우리는 인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은연중 배어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 녹색꽃이 없을까. 식물은 꽃마저 녹색이면 화수분을 옮길 벌이나 나비를 끌어들일 수 없으니 자연히 눈에 뜨이는 색깔로 꽃을 꾸밀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아이는 꽃의 입장이 아니라 우리의 입장에서 안 예쁠 것 같기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아이의 답변을 들으면서 원래 인간은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 발달'도 자기중심에서 차차 사회 도덕과 규율을 체화해가는 방향으로 발달이 이루어지듯, '자연 발달'도 애초에는 자기중심, 인간중심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자연 교육도 한번 곱씹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자연을 접하고 하고, 식물과 동물의 이름과 속성을 알게 해준다고 해도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무너뜨려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효과도 없지 않을까 싶은 거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자연에 대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진리다. <식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의 저자 수잔네 파울젠은 '곤충들을 잘 아는 생물학자나 생화학자의 눈에는 녹색은 전쟁의 색이며 꽃 핀 자연은 독의 전쟁터이다'라고 얘기한다.
식물들은 저항한다. 가시, 침, 찌르는 털로만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왜 과일이나 야채맛이 다양할까. 그것은 인간에게 다양한 맛을 주기 위함이 물론 아니다. 식물이 그들의 적에 대해 벌이는 화학방어전이다. 식물이 왕성하게 성장하는 시기는 그들의 적에게도 호기임에 틀림없기에 식물은 그 시기에 자신의 방어능력을 최대화시킨다. 떡갈나무는 대략 8월경에 자신들을 빨아먹고 찌르고 쏠아먹는 적에 대해 맹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하는데, 잎 속에 유피제(탄닌) 용량을 급속히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저항한다고 한다. 이 결과 떡갈나무에서는 오히려 8월에 나비나 곤충의 수가 적게 발견되는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생물학자로 빈대 전문가인 슬라마는 미국에 가져간 1,215마리의 빈대 중 단 한 마리를 제외한 나머지가 유충으로 머무른 것에 의아하게 생각했다. 원인은 유충들을 위해 펴놓았던 필터 용지가 문제였다. 그 종이는 발삼전나무로 만들었는데, 그 나무는 빈대의 애벌레 성장을 가로막는 호르몬을 만들어내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자연세계를 접하면 놀랍기 그지없다. 저 평화로운 들판은 그저 평화로울 수만은 없는 식물들의 피눈물 나는 삶의 공간이며, 저 조그만 식물 역시 자신의 생존조건을 최적화시키는 싸움을 끊임없이 전개하는 생명체로 그저 하찮게 볼 수만은 없는 존재로 보인다. 자연교육은 자연에 대한 호기심, 또는 지식 전달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종착지일 수는 없다. 인간의 처지에서가 아니라 다른 생명체의 처지에서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가지지 않는 한 그것은 섣부른 지적 충만감에 그칠 수 있다.
디지털리스라는 꽃이 있다. 일명 여우꼬리라고 불리는 이 꽃은 길쭉한 꽃봉오리가 아래로 축 처져 있다. 꽃이 예쁜데다 층층이 열려 벌의 눈길을 끌기는 쉬우나 문제는 벌이 꿀을 먹으려면 꽃 안쪽으로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미끄러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디지털리스라는 꽃은 꽃봉오리 안쪽에 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작은 돌기들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오묘한 자연의 진리를 접하면서 '참으로 신기한 꽃도 다 있구나' 하고 그쳐버린다면 그것은 지적 충만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에서 생존을 위해 지난한 진화과정을 겪어왔을 디지털리스의 삶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신기함을 넘어 존경스러움까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너른 들판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그 들판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개체의 지난한 삶까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욕심일까. 이 책은 '식물이 우리에게 무엇이길' 바라기 이전에 식물은 '식물 그 자체로 먼저 존재해왔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좋은 책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