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할아버지, 할머니의 익숙한 흥얼거림이 들려온다. 그리고는 곧 내레이터의 '잃어버린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라는 말이 이어진다. 그러면서 여운이 인다. 잃어버리는 게 그 흥얼거림만일까. 그 무수한 방언들, 오묘한 형용사들, 그리고 욕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누가 아껴 사용할까.

그러나 이것은 전 세계적인 언어의 실종에 비하면 에피소드도 되지 않는다. 유럽이 접촉하기 전 오스트레일리아에는 250종 이상의 언어가 분포했으나, 지금은 500명 넘게 쓰는 언어가 10%도 안되는 18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나마 21세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는 언어는 2~3개 정도로 예측되고 있다. 세계 인구의 90%가 세계 언어의 2%도 안되는 100개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니 '파레토의 80/20 법칙'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우리가 생물다양성의 파괴, 소수 문화의 핍박을 얘기하는 동안에도 언어는 그 이상의 고통 속에서 훨씬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은 이 언어의 사멸에 주목하며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글랜빌 프라이스는 이를 '언어 살해'라고까지 표현했다. 멕시코의 경우 16세기 초에 2,500만 명이던 인구가 유럽인의 점령이 이어지면서 불과 60년 이후에는 200만 명으로 축소되었다. 그들은 사라지면서 그들의 언어까지 가지고 갔다. 개발을 절대명제로 떠받들 때 우리는 환경이 파괴되어 가는 것을 몰랐듯이, 특정 문화의 우월적 지위를 떠받드는 동안 언어가 사멸해가고 있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은 언어의 가치를 재조명했다. 단지 언어학적인 가치나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보는 것을 넘어, 언어의 다양성을 문화적 다양성의 척도로 보고 있으며, 언어의 다양성을 잃는 것은 생물다양성을 위협하는 것으로까지 조명하고 있다.

'각 언어마다 세계를 보는 자신만의 창이 있다. 모든 언어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언어가 스스로 일구어 낸 모든 문화의 기념비와도 같다. 인간 정신의 무궁한 창의성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월한 언어란 없으며, 모두 현실을 비추는 창이라는 시각은, '언어 사멸'을 낳은 인류의 오만 중심부로 뛰어드는 칼날에 다름 아니다.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의 가치를 존중하는 마음이 결여된 것이 문제였기에 우리는 지금 언어의 풍성함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더 나아가,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은 언어 다양성이 나타나는 지역과 생물 다양성이 나타나는 지역이 일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파푸아뉴기니에 860개 언어가 있는 등 열대지방의 주요 17개국에 전 세계 언어의 60%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저자는 '언어는 인간이 자연환경과 그 환경에 상호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축적하고, 유지하고, 전승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세계의 생물학적 다양성의 상당 부분은 아직 목록도 작성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언어적 다양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생물다양성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저자의 가장 큰 걱정거리다. 필리핀 하우누족은 1,500종의 식물을 구별하는데 이는 서구의 과학에 따른 분류보다 4백종 이상 웃돈다고 한다. 언어의 사멸은 곧 인류가 알고 있는 지식 총량의 절대적인 감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언어들이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희미한 깜박거림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우월적 언어, 우월적 문화가 있다는 유령이 돌아다니는 한 등불은 하나 하나 안타까운 숨을 거두고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은 짙어져만 갈 것이다. 저자는 안정적인 다중언어 사용을 하나의 대안으로 얘기하고 있다. 그것이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지식총량을 넓혀주고, 그럼으로써 생물다양성을 더욱 보존할 수 있는 길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 책에 언급된 한 아메리카 원주민 대릴 베이브 윌슨의 말은 큰 여운이 남는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백인들의 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영원히 살아남으려면 우리말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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