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 세상을 보는 글들 14
레이첼 카슨 지음, 표정훈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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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지가 뽑은 20세기를 변화시킨 100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열성적인 생태주의자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의 저자로 많이 알려져 있다. 환경학 관련 고전으로 손꼽히는 책이자, 2003년 환경정의 추천도서로도 선정된 책이다. 『침묵의 봄』은 40년 전에 쓰여진 책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유독성 화학 물질과 이로 인한 생태계 파괴의 실상을 너무나도 사실성 있게 얘기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거의 전율을 느낄만한 파괴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능히 짐작이 갈 정도다.

 그러나 최근 레이첼 카슨의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를 접하고나서 그녀를 『침묵의 봄』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62년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출간할 당시 언론과 농약제조업자들은 카슨을 향해 “자신이 저주하는 살충제보다 더 독한 여자”라는 비난을 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을 읽다 보면, 카슨이 살충제에 대해 저주를 할 수 있었던 밑바닥에는 자연을 껴안는 풍부한 감성과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자연…』은 카슨이 1956년 한 잡지에 “당신의 자녀가 자연에서 놀라움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라”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생후 20개월 된 조카 아들 로저와 비를 맞고, 밤바다를 거닐고, 숲속을 산책하며 느낀 감성을 문학적 감수성으로 펼쳐낸 글들이다.

문학적으로도, 자연환경에 대한 감수성으로도 우리를 충분히 감동케 하지만, 이보다도 울림을 주는 것은 카슨의 자연에 대한 태도이다.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자연과 관련한 사실들은, 말하자면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씨앗은 나중에 커서 지식과 지혜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서 느끼는 이런 저런 감정과 인상은 그 씨앗이 터잡아 자라날 기름진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유년 시절은 그런 기름진 땅을 준비할 시간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 새로운 것, 미지의 것에 대한 흥분과 기대/공감/동정/존경/사랑……. 이런 감정들이 기름진 땅을 이루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사물에 대한 지식을 올바르게 추구할 수 있다. 한번 형성된 그러한 기름진 땅은 어린아이의 곁을 평생 떠나지 않는 착한 요정이 될 것이다."

카슨은 로저에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다만 함께 즐거워하고, 흥분하고, 웃었을 뿐이다. 자연을 가르치려 하거나 설명하는 대신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자연과 사귀라고 권하고 있다. 심지어는 이름을 알고 식별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그처럼 가치 없는 목적도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자연에 대한 감성’이라는 착한 요정을 가슴 속에 품길 바라며, 그러한 경이의 감정이 언제까지나 아이의 마음 속에서 계속해서 울리길 기원하기도 한다.

카슨의 자연에 대한 태도, 아이를 자연으로 이끄는 철학은 『침묵의 봄』 만큼이나 40년이 훨씬 지난 현재에도 큰 일깨움을 주고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침묵의 봄』은 상식이 되어갔지만, 카슨의 자연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가르침’이다.

아직도 이 땅의 많은 어른들은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아이에게 심어주기(?) 위해 아이에게 끊임없이 설명하고 아이를 이곳 저곳으로 이끌고 다닐 것이다. 유독성 화학 물질이 범람하면 봄이 돌아와도 우리의 들판은 침묵할 수 있듯, 자연을 대한 느낌 대신 설명이 앞서는 한 아이들 가슴 속의 요정들 역시 끝내 침묵하고 말 것이다. 자연에 대해 설명하려는 강박증은 어린이에 대한 믿음의 결여와 어른들의 흐려진 순수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한 카슨의 얘기가 계속 귓전에 맴돈다.

 "어린이 앞의 세상은 신선하고, 새롭고, 아름다우며, 놀라움과 흥분으로 가득하다. 어른들의 가장 큰 불행은 아름다운 것,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추구하는 순수한 본능이 흐려졌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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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니어링의 지혜의 말들
헬렌 니어링 지음, 권도희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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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라온 환경, 인상, 대화도 중요하겠지만, 그 못지 않게 그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 책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헬렌 니어링의 지혜의 말들』은 그런 의미에서 여러 선인들의 지혜의 말들이자, 헬렌 니어링의 생각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헬렌 니어링은 『조화로운 삶』, 『소박한 밥상』으로 이미 국내에 널리 알려진 자연주의자이자 생태주의자이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 스코트 니어링은 문명화된 뉴욕을 떠나 버몬트의 한적한 시골에서 직접 돌집을 짓고 땀 흘려 농사를 지으며 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고 사는 법을 몸소 실천했다. 그들의 검소하고 단순하게 사는 삶(Simple Life)은 20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많은 반향을 일으켰고, 이제는 전세계에 걸쳐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헬렌 니어링은 1년 중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시간은 6개월로 줄이고 나머지 6개월은 여가 시간으로 정했다. 그 기간에 연구, 여행, 글쓰기, 대화, 가르치기를 했다. 『…지혜의 말들』은 헬렌 니어링이 읽은 수 천 권의 책 중에서 적어둔 수많은 글들을 거르고 걸려서 모아놓은 책이다.

인용된 책들을 보면 우선 헬렌 니어링의 독서량에 놀란다. 기원전 2500년 전의 고대 중국, 기원전 1세기 로마의 키케로 등 고대에서부터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두루 두루 섭렵했다. 고대 철학가의 책은 물론 중세의 어느 먼지 쌓인 요리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에서 진리를 찾고자 하는 헬렌 니어링의 탐구열이 경건하게 느껴진다.

이 책은 ‘전원생활의 기쁨’, ‘건강과 부와 지혜’, ‘검소한 생활과 절약’ 등 모두 17개의 주제별로 인용문들을 분류했다. 주제만 보아도 헬렌 니어링이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인용된 책은 유기농 원예, 자연요법에서부터 점성술에 이르기까지 분야는 다양해도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헬렌 니어링이 삶이 그러했던 ‘검소하게 단순하게 사는 삶’이다. 헬렌 니어링의 삶을 그녀의 책을 통해서 읽는 것과 그녀가 인용한 문구를 통해서 접하는 것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책에 나온 한 인용구를 다시 인용해본다.

“우리에게 진짜로 유용한 것은 전부 적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들이고,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은 불필요한 것들뿐이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불멸의 신들에 의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 만족과 마음의 평화는 도시의 웅장한 궁전보다 시골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더 잘 자란다.” - 악셀 문테

『…지혜의 말들』을 읽다 보면 자신의 삶을 자신이 읽은 책에 밑줄을 그음으로써 남기고 싶은 욕구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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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4 13: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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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의 살아가는 힘을 믿는다
이상권 지음, 이원우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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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린시절을 과연 잊을 수 있을까. 어린시절 뛰놀았던 그 동산과 들판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시절에 묻어있던 순수와, 엄마 젖무덤 같은 따스함과, 아련한 꿈의 느낌을 지울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우리는 과거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그 시절의 자연과 어울린 추억은 생득경험이 아니라 유전자 변화로 전이된 느낌까지 들 정도다. 유전자에 각인된 과거 경험은 잠잠해 있다가도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정화시키고 심신을 고요히 침잠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기쁨이자 천형(天刑)이다. 돌아갈 곳 없어도 과거의 경험은 자궁의 모태와도 같이 우리를 다독거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나 깊이 각인된 그 경험은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은 지문이 되어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천형이 되기도 한다. 그 과거의 끈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과거를 향한 기억은 일견 보수적이고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상황에 따라 진보로 바뀌기 마련이다. 우리는 과거에 각인된 생활로 인해 파괴의 발목을 그나마 붙들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이 그리는 장밋빛 미래에 결여되어 있을 수 있는 단점을 과거의 기억에 준거하여 찾아내고 이를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서 끊임없이 보완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반합이 항상 이성적인 지그재그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를 슬프게 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권씨의 『들꽃의 살아가는 힘을 믿는다』는 ‘과거’를 얘기하고 있되 ‘미래’를 얘기하고 있다. ‘들꽃’을 얘기하고 있되 그를 통해 ‘생명’을 말하고 있다.

이상권씨가 머위, 창포, 삐비, 감꽃, 꽈리, 질경이 등 우리 삶 속에 그대로 젖어들어 있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거기에 깃든 옛이야기들을 조용조용 읊조리면, 엄마의 자장가처럼 느껴지면서 읽는 이의 옛 추억들도 한올 한올 풀려 나온다. 그렇게 착 가라앉고 조용해진 마음의 여진은 한동안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면 콘크리트 건물 숲에 둘러싸인 풀 하나에도 정이 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그 풀들은 과거에는 우리의 생활 그 자체였다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지금처럼 객체로 물러나 있거나 관조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태체험을 간다 해도 그 풀들은 관찰대상 그 이상을 넘어서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생활 자체였다. 삶이 진하게 묻어나 있었다. 감꽃 목걸이에서 감꽃을 빼어먹다가 배가 아프기도 하고, 생가지 나무로 군불 때다가 매운 연기 마시기도 하고, 간식거리 없어 궁한 뱃속 삐비 뽑아 먹으며 달래기도 하는, 그렇게 그 풀들은 삶과 어울려 곁에 있었다.

그런 옛 이야기를 아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어진다. 그것은 극성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감성교육을 해야된다는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습성을 다음 대에 물려주려는 자연적인 동물학적 현상이 아닐까 싶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동물학적 현상 때문에 비이성적이 되기도 하는 과학의 수레바퀴를 어느 측면에서는 제어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동물학적 감수성을 쉽게 잊기도 한다. 리피터(Repeater)라는 IT기기가 있다. 약해진 전자신호를 증폭하여 더욱 멀리 전송하도록 하는 기기다. 그런 리피터처럼 우리는 과거의 그 기억들의 파장을 증폭시킬 필요가 있다. 도심의 삭막한 빌딩과 찌든 공기로 인해 나날이 위축되고 퇴화하고 흐릿해져 가는 기억들을 먼지 걷어내고 다시 색칠해가면서 증폭시켜야만 한다. 그 증폭기 없이는 우리는 자손에게 과거의 기억들을 물려주려 하는, 그리하여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그러한 동물학적 행동이 점차 퇴화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추억에 너무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꽃의 살아가는 힘을 믿는다』와 같은 증폭기가 더욱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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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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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머니의 익숙한 흥얼거림이 들려온다. 그리고는 곧 내레이터의 '잃어버린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라는 말이 이어진다. 그러면서 여운이 인다. 잃어버리는 게 그 흥얼거림만일까. 그 무수한 방언들, 오묘한 형용사들, 그리고 욕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누가 아껴 사용할까.

그러나 이것은 전 세계적인 언어의 실종에 비하면 에피소드도 되지 않는다. 유럽이 접촉하기 전 오스트레일리아에는 250종 이상의 언어가 분포했으나, 지금은 500명 넘게 쓰는 언어가 10%도 안되는 18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나마 21세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는 언어는 2~3개 정도로 예측되고 있다. 세계 인구의 90%가 세계 언어의 2%도 안되는 100개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니 '파레토의 80/20 법칙'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우리가 생물다양성의 파괴, 소수 문화의 핍박을 얘기하는 동안에도 언어는 그 이상의 고통 속에서 훨씬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은 이 언어의 사멸에 주목하며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글랜빌 프라이스는 이를 '언어 살해'라고까지 표현했다. 멕시코의 경우 16세기 초에 2,500만 명이던 인구가 유럽인의 점령이 이어지면서 불과 60년 이후에는 200만 명으로 축소되었다. 그들은 사라지면서 그들의 언어까지 가지고 갔다. 개발을 절대명제로 떠받들 때 우리는 환경이 파괴되어 가는 것을 몰랐듯이, 특정 문화의 우월적 지위를 떠받드는 동안 언어가 사멸해가고 있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은 언어의 가치를 재조명했다. 단지 언어학적인 가치나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보는 것을 넘어, 언어의 다양성을 문화적 다양성의 척도로 보고 있으며, 언어의 다양성을 잃는 것은 생물다양성을 위협하는 것으로까지 조명하고 있다.

'각 언어마다 세계를 보는 자신만의 창이 있다. 모든 언어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언어가 스스로 일구어 낸 모든 문화의 기념비와도 같다. 인간 정신의 무궁한 창의성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월한 언어란 없으며, 모두 현실을 비추는 창이라는 시각은, '언어 사멸'을 낳은 인류의 오만 중심부로 뛰어드는 칼날에 다름 아니다.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의 가치를 존중하는 마음이 결여된 것이 문제였기에 우리는 지금 언어의 풍성함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더 나아가,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은 언어 다양성이 나타나는 지역과 생물 다양성이 나타나는 지역이 일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파푸아뉴기니에 860개 언어가 있는 등 열대지방의 주요 17개국에 전 세계 언어의 60%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저자는 '언어는 인간이 자연환경과 그 환경에 상호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축적하고, 유지하고, 전승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세계의 생물학적 다양성의 상당 부분은 아직 목록도 작성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언어적 다양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생물다양성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저자의 가장 큰 걱정거리다. 필리핀 하우누족은 1,500종의 식물을 구별하는데 이는 서구의 과학에 따른 분류보다 4백종 이상 웃돈다고 한다. 언어의 사멸은 곧 인류가 알고 있는 지식 총량의 절대적인 감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언어들이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희미한 깜박거림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우월적 언어, 우월적 문화가 있다는 유령이 돌아다니는 한 등불은 하나 하나 안타까운 숨을 거두고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은 짙어져만 갈 것이다. 저자는 안정적인 다중언어 사용을 하나의 대안으로 얘기하고 있다. 그것이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지식총량을 넓혀주고, 그럼으로써 생물다양성을 더욱 보존할 수 있는 길임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 책에 언급된 한 아메리카 원주민 대릴 베이브 윌슨의 말은 큰 여운이 남는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백인들의 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영원히 살아남으려면 우리말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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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보낸 산야초 이야기 지리산에서 보낸 시리즈
전문희 지음, 김문호 사진 / 화남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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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안의 매화차 사진 한 장. 찻잔 속에서 꽃망울을 톡 터뜨리고 있다. 꽃잎이 망가지지 않게 한 송이 한 송이 조심스럽게 따서 젓가락으로 집어 한지 위에 넌 후 시루에 살짝 쪄내기를 세 번 반복했다던 매화꽃이기에, 찻잔 안에서 그 빛 그대로 그 모양 그대로 되살아나 있다.

차의 향은 덖기 전 생잎의 상큼한 향내를 많이 품고 있을수록 좋다고 한다. 그 향내만이 아니라 빛과 모양마저 찻잔 안에 옮겨졌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이상의 즐거움이 따로 있었다.

<지리산에서 보낸 산야초 이야기>의 저자 전문희씨는 산야초차를 마실 때마다 그것을 채집한 장소, 그 때의 아름다운 풍경, 자신의 심경, 나무와 산이 어우러져 내는 바람소리가 다시 떠오른다고 한다. 산야초를 통해 자연의 생명력을 전달받을 뿐만 아니라, 산야초차 향을 통해 산 내음까지 느끼는 저자에게 산야초차는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한 방법처럼 보인다.

저자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지리산에서 새 삶을 얻었다. 우리 산야에 가까이 다가서면 설수록 자연은 그 속살을 내비쳤고, 저자는 그 속살을 헤치면서 차츰 주변의 산야초로 우리 차를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책에 소개된 백초차, 칡꽃차, 으름차, 연잎차, 뽕잎차, 인동초차 등 수많은 우리 차는 그렇게 몸으로 건져 올린 소중한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 삶에서 어느 순간 괴리되어버린 산야초를 복원해내고 있다. 우리 삶에 가까이 있었던 여러 나무와 꽃들을 알아보고, 가까이 두고, 지켜보는 것만이 복원은 아닐 것이다. 채취하고 섭취하면서 음미하는 것이 그저 관상하는 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복원일 수 있다. 그러할 때 오히려 우리 가까이 다가오게 된다. 황대권씨가 야생초를 복원해냈다면, 전문희씨는 산야초와 그것으로 만든 산야초차를 복원해낸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전통찻집 메뉴판 위에 올려져 있는 여러 차는 이제 더 이상 ‘건강’이나 ‘전통’의 의미로만 읽힐 수 없다. 그 차에는 우리 산야의 바람과 햇볕이 묻어나 있고 그렇기에 ‘자연’의 의미로 느껴질 것만 같다.

차를 만들고 음미하는 것이 자연과의 교감을 나누는 과정일 수밖에 없기에 이 책은 단순히 차에 대해서만 써놓은 책이 아니다. 저자가 지리산과, 그 자락에서 자라나는 여러 나무와 꽃들과, 또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몇몇 사람들에 대한 얘기들을 풀어놓고 있기도 하다. 산야초차는 그 속에서 나오는 얘기이지 이들과 분리되어 나올 수 있는 얘기도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의 진솔한 삶은 다른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 그 변화는 서서히 오되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저자의 진솔한 삶, 그 자체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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