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3
홍성욱 지음 / 책세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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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민단체에서 RFID가 가지는 문제점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각 상품마다 '전자꼬리표'가 달리면 개인의 사생활 보호가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는 취지다.

GPS 관련해서도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될 수 있다는 주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는 영화의 소재로도 많이 등장할 정도다. 윌 스미스와 진 해크먼이 주연한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도 그 하나다. 이 영화는 발달한 GPS 기술이 어떻게 특정 목적을 가진 집단에 의해 악용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보기술이 발달하면서 감시와 프라이버시 침해문제는 더불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도대체 이 연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했고, 어떤 문제가 벌어지고 있고, 대안은 무엇인가.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은 이를 체계적으로 접근한 책이다.

저자인 홍성욱 교수(토론토대)는 논의를 18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공리주의 철학자 벤덤은 1791년 수용된 죄수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시설인 원형감옥(파놉티콘, Panopticon)을 제안했다. 푸코는 이를 군주권력에서 규율권역으로 변화한 상징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파놉티콘에 어린 '감시'는 벤덤의 구상이 좌절되면서 끝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시대에서도 이러한 효율적 통제에 대한 고민은 작업장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자본주의 작업장은 고민이 있다. 그냥 단순한 '시선'을 통한 감시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로써는 숙련노동자의 교묘한 태업 등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 등을 분석한다.

그렇다면 현대는 어떤가. 저자는 감시와 프라이버시의 침해가 현대에 이르러서는 중대한 변환을 일으킨다고 보고 있다. 가장 주요하게는 정보사회의 발달로 '전자 파놉티콘'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감시가 범사회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되고, 간수가 '중앙'탑에 숨어서 주변의 감방을 감시했던 파놉티콘과는 달리 전자파놉티콘에는 '중앙'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졌다고 말한다. 즉, 중앙의 감시탑은 네트워크의 그물망으로 분산되었고, 그로 인해 감시가 전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편리함은 항상 감시와 붙어다닌다고 경고한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통과시킨 반테러법안에서 법원의 허가 없이도 경찰이나 FBI가 카니보어(인터넷 패킷을 가로채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개인의 전자메일을 검사할 수 있도록 했으며, UPS는 지난 15년간의 고객 사인을 이미 디지털화했고, 2001년초 미국 수퍼볼 경기장에서는 10만명의 입장객 얼굴을 비디오 카메라로 찍어 미리 준비된 위험 인물 리스트와 즉각적으로 비교하는 기술을 선보였다고 한다. 이쯤되면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현상은 현실의 반영일 뿐이라는 느낌이다.

이의 폐해를 막고자 역감시, 역파놉티콘 역시 세력을 얻어가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은 언론, 시민운동, 인터넷에 의한 활동이다. 정보공개법과 같은 제도적 장치도 이러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편리'에 익숙해져있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그 기술이 가져오는 삶의 질 향상에만 환호를 보낸다. 그 폐해는 환호성이 잦아들 즈음에서야 공론화되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이미 편리에 따른 기대의식으로 우리들의 무게중심이 이동한 뒤이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편리는 아무런 댓가없이 주어지지 않는다. 편리의 달콤함에 젖어 이성의 방어기재를 허술하게 열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술의 궤적을 결정하는 것은 항상 기술과 사회 세력들의 다양한 개입 사이의 상호작용이다."라는 저자의 말은 음미해볼만 하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는 추동력만큼이나 그 기술의 다른 측면에도 우리의 주의를 기울어야 할 것이다.

달은 항상 우리에게 앞면만 보여준다. 우리는 그런 달을 보고 달의 모습을 다 보았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빅 브라더는 절대권력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전자파놉티콘의 기재 속에 숙주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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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문학자의 문화로 읽는 중국
박영환 지음 / 동아시아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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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21세기를 읽는 키워드 중 하나다.  그러나 중국이 가지는 무게에 비해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은 사실 너무 표면적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그것은 그만큼 체제가 다르고, 그만큼 최근에서야 교류가 재개되었고, 그만큼 중국이 한 나라이되 너무 광활하게 크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은 다양한 각도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정운영교수는 몇 년 전 경제르뽀 식으로 <중국경제산책>을 내놓았고, 기타 많은 서적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문화란 영역은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비교적 잡기 쉽고 또 영역 또한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느 인문학자의 문화로 읽는 중국>은 사람들의 손이 쉽게 갈 것이다. 더군다나 저자가 중국문학을 전공한 인문학자이자 중국과 국교 수립 이후 중국에서 학위를 받은 최초의 유학생이고, 이러한 저자가 경험을 토대로 썼다고 하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문화비평과 여행기의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책이다. 1장에서 얘기하고 있는 미국과 북한에 대한 중국의 태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의미, 장쩌민, 파륜궁에 대한 얘기 등은 흥미있으면서 그 이면에서는 중국의 문화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는 4장에서도 비슷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그뿐. 2장에서는 중국 생활을 하면서, 또는 중국 여행을 하면서 겪는 중국생활상에 대한 소묘로 이어지고, 3장에서는 중국 고전문학을 통해서 중국을 얘기하고 있다.

문화라는 한 주제만을 가지고도 파헤칠 것이 무궁무진할 듯한 중국인데, 저자는 문화를 정치경제학적으로도 약간, 여행기로서 약간, 고전문학으로서 약간 등 조금씩 맛만 보여주고 있다.

<중국경제산책>을 읽을 때는 변화하는 중국, 고뇌하는 중국, 구와 신이 공존하는 중국, 여러 면의 중국 등 복잡다단한 중국의 면모가 얽기고설키면서 그래도 하나의 막연한 상으로 다가왔다. 문화로 읽는 중국 역시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변화, 고뇌, 구와 신의 공존 등 중국 문화의 속살을 찾기는 어려웠다. 내가 너무 기대를 많이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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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니 2004-07-05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에서 낸 닭털 같은 나날 한번 읽어 보셔요. 1992년 무렵이 배경이지만 상당히 중국의 속살을 짚어낸것 같습니다. 저두 서평을 올려 놓았지요^^
우리나라의 속살을 이처럼 다룬 소설 혹시 알고 계시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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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 소, 풀이 각각 그려진 그림이 3장 있다. 이중 2개를 하나로 묶으라면 어느 것끼리 묶을 것인가. 이에 대해 미국의 어린이들은 동물이라는 ‘분류학적’인 측면에서 닭과 소를 묶는 경향을 보이고, 중국의 어린이들은 ‘관계성’을 들어 소와 풀을 묶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시험을 해보았더니 한결같이 소와 풀을 한 범주로 묶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일까? <생각의 지도>는 이런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 차이를 흥미진진하게 파고든다. 미국 미시간대 심리학과 석좌교수인 리처드 니스벳은 미국, 중국, 일본, 한국 등 많은 동서양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험한 결과에 기초해서 지금까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사고구조의 차이를 심도있게 분석했다.


그 차이는 단지 몇몇 생활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근본적 시각차이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를 들어, 어느 살인사건에 대한 원인을 묻는 질문에 미국 대학생들은 살인자의 개인적인 속성에 중요성을 더 많이 부여한 반면, 중국의 학생들은 상황적 변수를 더 중요시했다. 동양은 ‘상황론’에 익숙한 반면, 서양인은 ‘본성론’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동양인들은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고 본다. 전체 맥락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사건들 사이의 관계성을 파악하는 데 익숙하며, 세상이 복잡하고 매우 가변적인 곳이라 믿는다. 반면 서양인들은 전체 맥락보다는 부분 부분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따라서 세상은 단순한 곳으로 지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를 몇몇 실험을 통해서도 보여준다. 단어를 보여줄 때 사회적 배경이 있는 그림을 함께 제공해주면 단어에 대한 기억력이 미국인보다 중국인들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양은 동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반면 서양을 명사를 통해 보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도 신선하다. 이는 서양인이 동양인에 비해 사물을 범주화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뜻이다. 동양의 어린이의 경우 서양의 어린이보다 동사를 훨씬 많이 자연스럽게 사용한다는 시험결과도 제시한다. 동사는 대화 맥락 가운데서 의미가 쉽게 변하기도 하는 반면 명사는 대체적으로 의미가 고정적이라는 측면을 비추어본다면, 앞에서 얘기한 동양인들이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는 분석 내용과 일면 상통한다.


그 외에도 동양에서는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치는 반면 서양에서는 홀로 사는 삶을 가르친다는 분석이나, 동양에서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화라고 생각하는 반면 서양에서는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한다는 분석, 또 동양에서는 경험을 중시하는 반면 서양에서는 논리를 중시한다는 분석 등도 저자는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를 촌락생활에서 찾고 있다. 동양의 촌락생활은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조화와 화목을 중시하는 행위 규범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들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인류가 ‘차이’나 ‘다름’에 대해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을 하는데 소홀해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차이에 대한 무지가 다른 문화에 대한 말살로 나타나고, 맹목적인 타 문화에 대한 추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분석 없이 문화의 우월성을 논하거나 문화적 상대주의를 논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 중 누가 옳은가? 이에 대해 저자는 극단적인 문화 상대주의는 편리한 해결책일 뿐 최선이 아니라고 한다. 후꾸야마의 ‘문명의 종말’ 방식이나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로 가는 방식이 아니라 제 3의 방식을 제시한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의 문화를 수용하여 중간쯤에서 수렴하는 것이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 가장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바람은 단순한 이상이 아닐 것이다. 최근 서양에서 동양 철학이나 삶의 방식이 조용히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것은 단지 동양에 대한 ‘신비’가 아니라 동양의 삶의 방식에서도 인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의 지도>는 ‘차이’를 넘어 ‘이해’로 나아가기 위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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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체성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01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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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신라시대의 김유신과 현대인 사이에는 외양상의 동일성 또는 유사성이 유지된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면 같은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테세우스의 배'는 어떤가. 한 조각이 떨어져나가 다른 조각으로 대체해 나가다가 결국 모든 조각을 다른 조각으로 대체했다면 그것은 원래의 배와 동일한 것인가?

저자인 탁석산씨는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거론하기에 앞서, 먼저 '보편성'이라는 허상을 깨는 것에 도전한다. 보편 개념은 우리가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일 뿐 보편성이란 '없다'는 것이다. 바다의 색은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냥 편의상 바다는 파란색이라고 추상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중요하다. 한국의 정체성이라 할 때 이는 한국인을 의미하는 것인지, 또는 개별 개인들의 총합을 얘기하는 것이지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탁석산씨는 예를 들어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는 '세계적'이란 말 자체에서 보편이 사용되고 있다. 보편은 편의상 부르는 것일뿐 허상이다는 명제에 따르면 탁석산씨는 '세계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고 미국적이거나 한국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결국 '세계적=미국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한국적인 것으로 세계에 진출하려는 방향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홍콩의 예처럼 세계적(=미국적)인 것을 홍콩의 영화에 담아내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탁석산씨는 제안한다. 한국적인 것을 세계화하지 말고 세계적(=미국적, 일본적)인 것을 한국적인 것에 흡수하는 것이 더 옳지 않겠는가고.

이제 다시 본론. 그렇다면 정체성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탁석산씨는 그 기준으로 현재성, 대중성, 주체성, 3가지를 들고 있다.

'현재성'은 시원(始原)이 중요하지 않고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고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원된 과거나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과거는 정체성의 대상이 되지만, 전통이 현재성을 상실한다면 훈고학이 될 뿐이라는 지적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대중성'에 대한 접근도 신선하다. 우선 다수가 좋아하고 염원하고 편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는 시대정신이 녹아 있는 것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소수의 한국인이 부르는 판소리보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조용필이나 이미자의 노래가 보다 더 한국적인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또 하나의 기준이 '주체성'이다. 집단은 여러 가지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현상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는데 이를 통해 정체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탁석산씨가 얘기하고 있는 정체성 판단 기준은 참으로 현실적이다.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판소리, 한복, 전통예절에 대한 채무의식이나 부담의식을 한편으로는 덜어주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어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의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귀속되고자 하는 부담이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 해서 현대인의 부담이 완전 해방된 것은 결코 아니다. 탁석산씨의 주장을 곰씹어보면 판소리, 한복, 전통예절 등이 그 자체로 '한국적'인 것이 될 수 없다면, 한편으로는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의 혼돈에 빠지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성'이 그냥 과거에 의해서 편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시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기에 '만들어가야 한다'는 부담 또한 가질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항상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현실에 대해 사유한다. 우리는 그 덕분에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훌륭한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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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역사
페터 벤데 엮음, 권세훈 옮김 / 시아출판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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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역사>는 영국혁명(1640-1660)에서부터 동독의 89혁명까지 근현대사를 관통한 17개의 혁명을 17명의 저자들이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각각 별개의 혁명을 기술하고 있는 듯 하지만, 이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혁명은 이전의 혁명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어 보이며, 결국 하나의 혁명은 구슬 하나처럼 바늘에 꿰어 역사라는 목걸이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혁명의 역사'는 혁명을 기술한 것일 뿐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혁명의 역사로 이루어졌음을 은연중 얘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영국혁명, 명예혁명, 미국혁명을 거쳐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거친 숨소리가 느껴진다. 마치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 클라이막스는 단순히 끝나지 않고 7월혁명, 독일혁명으로 숨고르기를 하며 이어진다.

시대에 따라 혁명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19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근대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혁명을 넘어서 계급혁명으로 치닫는다. 사회주의자들은 그 첫 관문으로 파리코뮌을 들고 있으며, 그 첫 관문은 이어 20세기 첫 벽두에 볼세비키혁명으로 완성되는 듯 하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혁명의 양상은 아주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때로는 민족주의적인 방향에서, 때로는 농민 중심적 계급주의적인 방향에서, 종교적인 측면에서, 또는 자유민주주의의 회복 측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혁명이라는 깃발이 내걸린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혁명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혀지고 있으며, 결국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혁명의 연장선 상 위에 위치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20세기에 나타난 혁명의 다양성은 과거가 곧 미래를 명쾌하게 제시할 것이라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게 해준다. 한편으로는 후쿠야마의 "인류의 역사는 자유주의의 실현을 향한 일관된 진전"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들간의 충돌로 나아간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는 여전히 이 양자의 해석 사이나 이 범주를 벗어난 또 다른 지점에서 21세기를 진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각 혁명에 대해 기술할 때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술보다는 그 혁명의 해석에 보다 초점이 맞춰져있는 관계로 쉽게 재미를 가지고 빠져들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단점은 대체적으로 저자들이 혁명을 바라볼 때 그 관점이 대체로 우파쪽에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파리코뮌이나 볼세비키혁명의 역사성에 대한 편협한 접근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동의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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