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외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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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는 세상을 좁게 한다. 우리는 간혹 우연한 경험에 의거하여 "세상은 참으로 좁다"는 것을 실감하는데, 이는 결국 네트워크의 문제에 다가서게 한다. 이 네트워크를 얘기할 때 흔히 '에르되스 넘버' 사례를 든다. 유명한 수학자인 에르되스와 공동 저작을 하면 이 넘버는 1이고, 에르되스 넘버가 1인 사람과 공동 저작을 하면 이 넘버는 2가 된다. 이 넘버가 작을수록 명예로운 셈인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수학자들은 2에서 5 정도의 비교적 작은 에르되스 넘버를 갖고 있다.

미국 영화배우 '케빈 베이컨 넘버'도 많이 얘기되고 있다. 이 영화배우와 같은 영화에 출연하면 넘버가 1이 되고, 넘버가 1인 영화배우와 같이 출연한 영화가 있으면 넘버가 2가 되는 식인데, 대부분의 영화배우들이 2 내지 3의 넘버를 보이고 있다. 이는 케빈 베이컨이 그만큼 유명한 배우라는 뜻이 아니라, 웬만한 영화배우일지라도 그런 식으로 2 내지 3개의 링크가 거치면 해리슨 포드나 줄리아 로버츠와 연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연구는 63억명의 인류라는 거대한 집단 마저도 대부분 6단계의 링크 안에 들어온다는 연구로 이어진다. 대한민국의 어느 마을에 사는 아주머니가 미국 대통령과도 6단계 정도를 거치면 연결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보면 세상은 좁은 정도가 아니라 작은 울타리 안으로 느껴질 정도다.

<링크>의 초반은 이런 흥미진진한 얘기부터 풀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링크>를 세인의 흥미진진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얇을 수 있는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내는 책이라고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이 책의 부제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이 얘기하듯, 이 책은 네트워크가 이 세상을 해석하는데 얼마나 유용한 도구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이 책은 네트워크 과학의 단서를 사회관계의 링크에서 풀고 있다. 왜 이렇게 몇 번의 링크를 거치면 세상 사람들은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인가. 이 책의 저자 바라바시는 많은 사람들이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고, 이 클러스트 간에 한 번의 링크라도 이어진다면 링크는 크게 확장될 수 있다는 얘기를 꺼낸다. 그리고 우리 세계에는 이런 확장력을 가진 커넥터들이 있고, 이들이 네트워크의 허브가 된다는 것을 설명한다. 예컨대 세상은 고속버스 노선도처럼 격자모양의 그물망처럼 이어진 것이 아니라 항공 노선도처럼 소수의 노드에 항공노선이 집중되고, 일부 주요 거점 노드에 약간의 노드들이 연결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즉 링크의 갯수를 많이 가지고 있는 노드는 극히 적고, 링크의 갯수를 작게 가지고 있는 노드는 무수히 많게 된다. 결국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규분포를 이루는 종형곡선보다는 멱함수(로그곡선)을 그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 80/20의 파레토법칙이나 지니계수 역시 멱함수를 따르고 있다.

그러면 이 네트워크 구조를 밝히는 것이 무엇에 도움이 될까. 저자는 이를 경영, 경제, 의학, 인터넷 등 다방면에 걸쳐 적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에이즈의 확산 역시 이런 멱함수를 따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확산추세가 누그려뜨려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에이즈의 전파에는 소수의 허브가 큰 역할을 하고 있기에 이 소수에 치료 역량을 집중시켜야 확산을 급격히 격감시킬 수 있으나, 치료는 복지의 문제로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때문에 확산추세를 떨어뜨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마케팅에서 오피니언 리더를 활용하는 것이나, 2000년 5월의 러브 버그 처럼 인터넷에서 바이러스가 유포되는  것이나 모두 이러한 네트워크 구조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네트워크 위상구조를 밝히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몸의 세포가 타 세포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 역시 멱함수 구조를 가지고 있어,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 역시 네트워크 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이에 대한 구조를 파악하면 혁신적인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허브 역할을 하고 있는 p3 단백질에 이상이 생기면 암에 걸릴 가능성이 아주 높아지는데, p3 단백질의 네트워크 구조를 개인별로 파악해낸다면 부작용이 전혀 없이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에도 적용 가능하다. 최근 연쇄도산의 경우 역시 경제의 허브에 이상이 생길 때 그 영향력이 아주 커질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경제구조 내부에 존재하는 네트워크 위상구조에 대한 파악이 잘 되어 있다면 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수십억년 동안 진화해 온 인간세포의 네트워크나 인간관계의 네트워크나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네트워크 역시 진화의 산물이고 안정적 구조를 향해 내달려 왔다는 것이다. 네트워크는 넓은 세상을 좁게 사는 길이자, 먼 길을 가깝게 해주는 길일 수 있다. 그 길을 의학에 적용하면 치료의 길이가 짧아지고, 인간관계에 적용하면 관계가 가깝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링크>는 주변의 다양한 범주를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도와주는 네트워크과학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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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 이반 일리히 전집 3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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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라이언은 <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을 통해서 우리 인류 모두가 지구를 덜 망치고 오래도록 함께 쓸 수 있는 물건 7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가장 먼저 자전거가 소개되고, 연이어 콘돔, 천장선풍기, 빨랫줄, 타이국수, 공공도서관, 무당벌레 등이 ‘7가지’에 선정되었다. 우리는 자전거의 장점을 익히 알고 있는데다, 라이언이 자전거문명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라이언의 얘기에 공감을 하며 부담감도 크게 가지지 않는다. 이반 일리히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를 접할 때 독자들은 보통 라이언식의 접근방식을 기대할 것이다. 원제인 ‘Energy and Equity'(에너지와 공정성)를 의역한 제목도 그에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리히는 우리 문명의 근원적인 문제점으로까지 깊이 파고들기 시작한다.<행복은...>은 <학교 없는 사회>, <병원이 병을 만든다>와 더불어 일리히의 현대문명 비판서라 할 수 있다. 그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는 강제적인 학교교육이 학습을 위한 환경을 파괴한다고 주장했고,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는 의술이 자본주의와 손을 잡으면서 ‘인간의 자율적인 치료’가 망쳐졌다고 주장했다. 이의 연장선에서 <행복은…>에서 일리히는 단순한 자전거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에너지 사용의 문제점을 거론하고 있다. 학교, 병원에 이어 교통수단이라는 자본주의의 성공적인 사회적 산물에 비판적 메스를 댄 것이다.

일리히는 미국에서는 총 에너지 사용량의 25%에서 40% 사이가 수송수단에 의해 소비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미국 보통 사람이 하루에 일어나 있는 16시간 중에서 차를 운전하거나 그것을 운전하기 위하여 필요한 재원을 모으기 위해 소비한 시간을 따지면 무려 4시간이나 된다.

일리히는 ‘1인당 소비하는 에너지가 어떤 적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어떤 사회의 정치체제나 문화적 환경도 필연적으로 타락하게 된다’면서 에너지 사용량을 낮추어야만 한다고 얘기한다. 이를 교통문제에 적용하면 ‘속도’를 낮추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속도가 어떤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수송은 교통을 방해하고 이로 인해 시간 부족이 증대하기 시작하고, 특히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사회가 질곡으로 치닫는다고 진단한다. 그 한계는 대략 시속 15마일 정도되는 속도이고, 이러한 속도를 유지할 때 자율적 이동체계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를 위한 최적의 교통수단은 자전거이다.

일리히는 단지 교통을 환경적 시각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체제의 문제, 인류의 삶의 양식의 문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얘기했듯, 그 해결방식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 논의하고 있다. 우리가 이반 일리히의 지적을 편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다. 현재의 교통수단과의 ‘조화’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역’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히는 이상적인 교통체제로 ‘자동차화된 수송의 속도가 수송을 자율적 이동의 보조에 멈추게 하는 정도의 것에 한정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는 자율적 이동의 우월적 지위가 보장되는 한도 아래서 자동차 등에 의존하는 타율적 이동이 존재토록 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최적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의 한도를 정치적으로 결정지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율적 교통수단으로부터 ‘독립’해야만 할뿐더러 부(富)로부터 의연해야만 한다.

그러나 역사는 이반 일리히가 1970년대 주장한 이후 탈산업화가 아니라 초산업화를 향해 치달았다. 뒤로 돌리면 절대 앞으로 가지 않는 자전거 페달처럼, 에너지 사용 및 수송 속도는 다른 문명 이기(利器)처럼 극심한 불가역성의 성질을 보여주기만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의 심각성’으로 인해, 이반 일리히의 30년 전의 외침을 현재에서도 불러내 음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전거’에는 낭만적 감성이 깃들어 있지만, ‘교통’, ‘속도’에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환경은 이제 ‘자전거’를 넘어 ‘속도’의 문제에 대한 인류의 결단을 요구하는 쪽으로 흐르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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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 - 작은 것들 속에 깃든 신의 목소리
조안 엘리자베스 록 지음, 조응주 옮김 / 민들레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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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는 그동안의 생태적 접근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바퀴벌레, 모기, 파리 등 우리가 해충이라고 분류할 뿐만 아니라 극히 혐오하는 곤충에게마저 그 곤충의 유익성을 얘기하고 그러한 곤충들과 같이 공존하는 방식을 얘기하고 있는데, 이는 거의 충격적이다. 해충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데 많은 영감을 받기도 했다. 다만, 곤충과 대화하기나 교감 나누는 대목은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다. 다음글은 이 책에서 언급한 해충(?) 중 가장 감명을 받은 모기에 관한 내용을 주로 하여 느낀 점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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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모기의 계절이 왔다. 어릴적에는 모기향이나 쑥불로 모기를 쫓거나, 모기장을 쳐서 물리는 것을 방지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모기를 박멸하는 방식으로 방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모기는 더 이상 추억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여름밤 야외에 설치하는 전기 살충기가 있다. 날벌레가 다가가면 파찌직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타 죽어버린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 것을 보며 희열을 느낀 경험이 있다. 그 살충기는 이 세상의 무수한 적들을 무찌르는 신개발 병기처럼 느껴졌고, 날벌레가 쉬지도 않고 파열음을 낼 때마다 조자룡이 필마단기로 적군을 헤집고 활약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전기 살충기로 연간 약 7백억 마리의 곤충이 생명을 잃는데, 이 중 우리의 피를 빨아먹는 곤충은 4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곤충학자는 이 살충기는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 말고는 별 쓸모없다고 얘기했는데, 우리들 가슴을 너무 아프게 찌르는 말이다.

우리는 모기를 생태계를 같이 이루는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다. 모기는 우리와 절대 공존할 수 없는 곤충이고, 사람이 사는 곳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할 존재로까지 취급하고 있다. 이 순간에도 모기를 죽이는 살충제가 엄청나고 뿌려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모기만이 아니라 주변의 생태계까지 파괴되고 있다. 실제 미국 플로리다에서는 80만 헥타르의 면적에 연간 10~15만 kg의 펜티온을 뿌리고 있는데, 이는 지난 2000년에 철새들의 떼죽음을 초래하기도 했다.

왜 우리들은 모기를 박멸하려 하는가. 왜 거의 적개심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실제 모기에 의해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가 하면 별로 그렇게 보여지지는 않는다. 간혹 뇌염모기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하지만 극히 예외적이고 예보 시스템도 비교적 잘 되어 있다. 우리의 적개심은 실상 우리가 모기에 물리기 싫어서이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라면 우리의 적개심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이 생태계에서 다른 동물과 공존하지 않으려 하는 지나친 오만에 불과하다. 모기는 이 생태계에서 없어지면 안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의 저자 조안 엘리자베스는 모기 애벌레는 물고기, 제비, 박쥐 같은 동물의 먹이가 될 뿐만 아니라 화분 매개 역할을 하고 있어, 모기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든다면 생태계의 균형추가 흔들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전염병에 걸릴 위험을 줄이는 장기적 전략은 (모기를 박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물다양성을 보존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모기에 대한 이유 없는 적개심을 거두어야 한다. 모기 역시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태계의 한 부분을 떠받들고 있는 존재라는 자각을 해야 한다.

벌레를 죽이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있다면 다른 대안을 찾아야만 한다. 캠핑 갔을 때 몰려오는 모기를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간혹 이러한 모기를 잡다가 놓치면 마치 자신을 언제 헤칠지도 모르는 원수를 놓아준 것마냥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방인은 모기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다. 모기가 사는 곳으로 찾아들어간 우리이고, 그렇게 모기 한 마리 더 죽인다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다. 쫓거나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러한 방법을 취하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고, 오붓한 대화를 즐겁게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파리채의 원리는 간단하다. 나는 선조들이 쑥불을 피우거나 모기장을 치는 것은 발견?발명해도 파리채는 생활필수품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 마냥 대단하게만 느껴진다. 모기를 전자파로 쫓는다, 모기를 죽이는 향을 피워낸다 하는 것 모두 좋은 대안은 아니다. 이 여름 선조들의 지혜를 이어받아 모기장으로 이겨내면 어떨까. 간혹 모기에게 물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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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리 2004-07-27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기라면 질색을 하고 파리만 봐도 손부채로 쫓아야 하는 우리 아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네요. 이주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시장인가? 정부인가?
김승욱 외 지음 / 부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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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말 한국 바둑을 풍미했던 조훈현과 서봉수. 아마 그 대립각이 아니었다면 그 둘의 발전은 물론 한국 바둑의 발전 역시 다소는 더뎌졌을 지도 모른다. 대립각은 항상 긴장감을 낳고, 그 긴장감은 발전을 이끄는 피댓줄이 되곤 한다.

철학에 있어서 평등과 자유가 그 대립각을 이루었다면, 경제에 있어서는 시장과 정부가 대립각을 이루어 왔다. 그것이 때로는 고전학파와 케인즈학파간의 대립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진보와 보수로 표현되기도 한다.

다니엘 예르긴은 20세기 현대사를 시장과 정부가 서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싸웠던 시기로 명명하면서, 국가 주도 경제가 쇠퇴하고 시장 경제가 승리한 시기로 조명하였다. 20세기는 '시장경제의 승리'로 저물었지만, 그것은 결과일 뿐 그 과정에는 시장과 정부의 숨막히는 시소게임이 있었다. 시장경제 역시 그 숨막히는 접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조탁시켜왔다는 점에서 어쩌면 20세기는 시장이냐, 정부냐에 대한 시험대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역동적인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과 정부의 대립각은 20세기를 거쳐오면서 많은 댓가를 치른 실험 속에서 결론에 도달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 두 명제는 이슈에 따라, 시기에 따라, 계급 역관계에 따라 수시로 다른 모습으로 대립이 형상화된다. 이 책 서문에서 예를 들고 있는 해외 원정출산이라는 문제 하나만을 봐도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즉, 개인의 선택이라는 시장기능중시자의 주장과 국민의 위화감 조장을 막아야 한다는 정부개입중시자의 주장은 아마 많은 시간이 흘러도 어느 한쪽의 주장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추는 어느 쪽으로 흐르는가 하면 세월이 지나면 다른 쪽으로 흐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영원한 화두인 시장-정부의 대립각을 다루었다. 이 문제를 접근하기 위한 몇가지 전제되는 논의를 먼저 시작하고는, 소득분배, 복지, 경제안정, 경제성장, 구조조정, 금융시장, 노사관계, 공기업, 환경오염, 농업, 주택문제 등 총 11개의 주제에 대해서 시장기능중시자와 정부개입중시자 간의 주장을 정리해놓고 있다. 어느 한쪽의 주장에 기울지 않고 이를 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리하고자 한다는 점이 이 책의 큰 특징이다. 그리고 매 장마다 시장기능중시자와 정부개입중시자 간의 입장을 표로 간략하게 정리해놓고 있다. 개론서를 원하는 사람이나, 토론 기초자료를 원하는 사람에게 특히 만족할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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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하여 나는 무엇이 될까 - 시인 정호승이 쓴 작은 사랑이야기
정호승 지음, 우승우 그림 / 해냄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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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을 보면 '따뜻한 이야기' 보다는 항상 '각박하고 험한 이야기'가 더 자주 언론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편이다. 그렇기에 '미담기사'는 편집자 입장에서는 항상 반기는 기사 소재가 되곤 한다.

그러나 따뜻한 이야기가 원래 드문 것은 아니다. 그것을 꼭 기승전결의 논리구조를 갖추고 있는 이야기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아이의 순진무구한 말 한마디에서도, 어른들의 인생이 묻어나는 경험담 한마디에서도, 선인들의 명언 한마디에서도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그러한 따뜻한 이야기를 접하면 산속 옹달샘에서 솟는 샘물을 만난 듯 하고, 무더운 여름날 느티나무 아래로 부는 선선한 바람을 쐬는 듯도 하다.

그 따뜻함 속에 잔잔한 인생의 진리마저 담겨져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신작 이야기책인 『너를 위하여 나는 무엇이 될까』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들이 그렇다. 정 시인은 모두 48편의 짧은 사랑이야기를 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었다.

‘아버지와 신발’을 보면 항상 한두 치수 큰 고무신을 사주시는 아버지 얘기가 나온다. 먼 훗날 아버지는 그 이유가 단지 신발을 알뜰하게 신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자기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바쁘게 세상을 사는 것보다는, 조금 헐거운 신발을 신고 좀 여유 있게 걸어 다니며 세상을 사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 아버지의 이유였다. 신발 하나에서 여유로운 인생이라는 화두를 건져 올리는 정 시인의 '사물을 새롭게 보는 눈'이 묵중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가장 아름다운 꽃’이란 이야기도 그렇다. 이것은 임신 중에 남편을 잃고 세상을 원망하게 된 아내의 이야기다. 어느 날 시아버지는 이 안쓰러운 며느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정원의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하느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꺾어 천국을 장식한단다. 얘야. 이제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정 시인의 따뜻한 이야기는 남다른 점이 있다. 전개되는 이야기 내용 자체가 따뜻하다기보다는,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가 껴안고 살아가야 할 삶의 화두를 따뜻하게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그 화두에 대한 답을 짧은 이야기를 통해서 간단하게 내놓을 때 읽는 독자는 잠시 "아!" 하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 자체가 따뜻하다는 것과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따뜻함을 이끌어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주변에서 삶의 따뜻함을 건져올릴 수 있다라는 생각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글이 10매 내외의 짧은 글이라 읽기에 부담이 없지만, 그렇다고 내용마저 그런 것은 아니다. 책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정 시인이 얘기하는 사랑은 항상 희생을 다른 한 면으로 하고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의 대가가 항상 옳게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군밤장수를 찾습니다’ 등과 같은 글에서는 남을 도와준 대가로 피해를 입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렇다고 그러한 ‘희생 위의 사랑’이 씁쓸하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그러한 숨어있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 세상이 그나마 밝은 것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정 시인 글의 힘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올 여름, 무더위를 이기는 방법은 여럿 있을 것이다. 그 중 청량제 같은 따뜻한 글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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