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의 성 -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성의 인류학, 개정판
헬렌 피셔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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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49년에 발표한 ‘제2의 성’에서 ‘여성이란 순전히 경제 및 사회적 세력들의 산물이며,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감안한다면 가히 혁명적 접근이었을 것이다. 차별과 그 차별을 낳는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엄중하게 지배하고 있었기에,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부차적인 모순으로 취급되곤 했다.

그러나 이제 여성은 태어나기도 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데 어느 정도 수렴해가고 있다. 물론 이런 인식의 보편화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여전히 ‘제2의 성’에 머물러 있다. 왜 여성이 제2의 성에 머물러 있고, 또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제1의 성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해석은 근대에 들어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이에 대한 인류학자 헬렌 피셔가 『제1의 성』에서 접근한 방식은 매우 신선하다.

『제1의 성』의 저자는 먼저 남녀의 차이에 대해 주목한다. 예를 들면 여성들은 일직선이 아니라 거미집식으로, 서로 관련 있는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남성들은 초점을 한 곳에 집중하고, 구획을 짓고, 항목별로 차곡차곡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이를 거미집 사고와 계단식 사고로 이름 지어 대별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낳은 열쇠를 저자는 수십, 수백만년 동안의 진화 과정에서 찾고 있다. 위험한 야수를 뒤쫓을 때 남성들은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던 반면, 선조 여성들은 매우 위험스런 조건에서 어른의 손길을 오랜 동안 필요로 하는 아기들을 키우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결정과정에서도 항상 여러 복잡한 변수를 생각하고, 또 말도 모르고 의존도가 높은 갓난 아기들의 요구사항을 끊임없이 읽어내다 보니 짐작이 발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사고방식이 다르게 진화해 온 것인데, 남성이 제1의 성인 시대에서 여성의 사고방식은 종종 덜 논리적이고, 덜 이성적이고, 덜 구체적이고, 심지어 덜 지적이라고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사회관계에서도 그대로 투영된다. 사회관계에서 남성들은 자신을 계급구조의 틀에 넣으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여성들은 협동과 조화, 즉 지지라는 네트워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진화과정에서의 차이를 전두엽 앞쪽 피질의 구조가 남성과 여성 간에 어떤 차이가 있고, 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과학적 근거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차이로 인해 여성이 앞으로는 ‘제1의 성’으로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인류의 진화과정을 통해 얻는 언어와 관련된 재능, 타인의 몸짓과 자세, 얼굴 표정 그리고 다른 언어적인 단서를 읽을 줄 아는 능력, 섬세한 감수성, 감응력, 우수한 촉각․후각․미각․청각, 인내력,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거나 생각하는 능력, 어떠한 이슈든 넓게 전후 맥락으로 보는 폭넓은 시각, 장기적인 기획을 선호하는 경향, 네트워킹과 협상에 뛰어난 재능, 보살핌을 베풀려는 충동, 협력과 의견 일치를 옹호하고 다른 사람을 이끌 때도 평등주의 원칙을 택하려는 성향 등을 이 사회는 점점 더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들 들면 기업체들이 상하 계급적인 관리 구조를 해체하고 평등주의적인 팀 플레이를 강조하고 나섬에 따라 네트워킹과 의견 일치를 잘 이끌어내는 여성들의 능력은 앞으로 더더욱 중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1의 성』의 접근법은 신선하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언급할 때 우리 사회는 보통 우성과 열성의 관점에서 구조화한다. 그러나 그 구조화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남성관에 의한 구조화일 수밖에 없다.

인류는 정주생활이 시작된 최근 1만여년 동안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집중해서 돌파하려는 ‘계단식 사고’ 방식에 좀 더 치우쳐 왔다.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환경문제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환경문제 또한 남성-여성의 문제 등 여러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거미집 사고’일 것이다. 최근에 급격하게 한 쪽으로 치우친 추를 바르게 되돌리는 작업은 여러 영역에서 진행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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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의 박물관 이스탄불 기행 - 세계 인문 기행 5 세계인문기행 5
진순신 지음, 성성혜 옮김, 이희수 감수 / 예담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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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제목을 먼저 음미해서는 안된다. 원제는 ‘Savages and Civilization'인데, 한국어판으로 되면서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짜릿한 선택적 어구가 그 뒤에 붙었다. 그러나 제목처럼 이 책은 자극적이지도 않으며, 숨 가쁜 논쟁이 이어지는 책도 아니다.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은 긴 호흡을 요하고 있다. 잭 웨더포드는 각 장마다 세계의 한 곳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 곳은 아프리카의 말리가 되기도 하고, 러시아의 바이칼호가 되기도 하고, 아메리카의 볼리비아가 되기도 한다. 원주민의 삶을 자세히 투영해보거나, 야만과 문명의 양상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한올 한올 풀어가고 있다.

이 책은 그러면서도 인류문명을 시대순으로 얘기하고 있다. 현재의 땅에 서서 현실을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인류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현재 우리 세계에 아직도 여러 문명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의 단증이기도 하다.

저자는 크게 역사를 3단계로 나눈다. 고대문명에서 15세기경까지 이르는 부족문화와 다양성의 문화가 존재하는 시기다. 원시시대부터 유목민문화, 정착생활, 세계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진보를 가져오는 원동력은 서로 다른 문화집단 간의 역동적인 긴장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나, 각 문화집단은 그 나름대로 제 기능을 훌륭히 수행해왔다는 것을 얘기한다. 나아가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일으켰다는 것 또한 놓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농경은 채집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지만, 기대 수명이 짧아지고 키가 작아지며 질병이 많아지고 영양 상태가 나빠지며 주기적으로 기근을 겪는 등의 대가를 치렀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 다음이 근대의 국민문화와 세계 질서가 대두되는 시기다. 그러나 국민문화와 세계 질서는 접촉이 있을 때마다 부족민과 다른 문명을 끊임없이 파괴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세계의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문화를 창조하려고 애썼으나, 근대의 국민주의 문화는 그들이 지배한 넓은 지역에서 획일성을 강요한다.

획일성은 파괴를 낳는다. 유럽에서 싹튼 세계문명은 유럽을 빠져나와 카나리아 제도, 카리브해 원주민, 아메리카 주민, 폴리네시아 원주민 사회를 깡그리 말살해갔다. 현대 세계는 반대나 변이나 일탈을 거의 용납하지 않았고, 특정 사회체제에 맞는 획일적인 주민들을 요구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세계문화의 혼란기에 접어들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 혼란의 정체는 지금이 위기의 끝에 서 있다는 진단과 일맥상통한다. 역사적으로 전쟁이나 역병, 환경교란 등의 이유로 비교적 갑자기 무너진 문명의 예가 많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단일한 지구 문명으로 통일되어 있어 단지 한 문명의 몰락이 아니라 세계문화의 몰락으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저자는 더욱 심각성을 두고 있다. 한 부분의 멸망은 연쇄 반응을 일으켜 지구 전체를 휩쓸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최근 1만년이라는 기간은 채집으로부터 모종의 어마어마하게 뛰어난 생활방식으로 옮겨 가는 과도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낙관적으로 보든, 비관적으로 보든,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의 커다란 한 시대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문명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이 순간, 저자는 우리 문명 스스로 아마겟돈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난제는 획일적으로 살지 않으면서 조화롭게 사는 것, 즉 상업, 대중문화, 통신 등과 같은 세계적인 힘에 의해 통일되면서도 종교나 민족성 등과 같은 분야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평화로이 유지하는 것이다.”라고 답하고 있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닥칠 위험이 있는 문제들을 우리가 극복하려면 모든 문화가 지니고 있는 모든 지식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클라이브 폰팅은 ‘녹색세계사’를 통해 세계사를 환경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바 있다.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은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을 통해 언어의 다양성 말살이 우리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 책도 비슷한 맥락에 서 있다. 문명의 발달과정이 파괴의 역사를 걸어왔다는 지점에서는 환경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고, 문명의 다양성 입장에 굳건히 서서 문화 또는 문명의 획일성이 문명의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얼마전만 해도 문화적 상대성은 상대편 문화에 대한 똘레랑스를 뜻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관점은 다소 점잖은 태도로 느껴진다. 상대방이 없으면 자신도 없다는 절박감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제목은 수정되어야 한다. 야만과 문명은 분리된 다트판으로 우리가 화살을 던져 살아남을 쪽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다. 둘 다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해야 하며 그 관점에서 그 둘은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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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잭 웨더포드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이론과실천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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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을 먼저 음미해서는 안된다. 원제는 ‘Savages and Civilization'인데, 한국어판으로 되면서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짜릿한 선택적 어구가 그 뒤에 붙었다. 그러나 제목처럼 이 책은 자극적이지도 않으며, 숨 가쁜 논쟁이 이어지는 책도 아니다.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은 긴 호흡을 요하고 있다. 잭 웨더포드는 각 장마다 세계의 한 곳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 곳은 아프리카의 말리가 되기도 하고, 러시아의 바이칼호가 되기도 하고, 아메리카의 볼리비아가 되기도 한다. 원주민의 삶을 자세히 투영해보거나, 야만과 문명의 양상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한올 한올 풀어가고 있다.

이 책은 그러면서도 인류문명을 시대순으로 얘기하고 있다. 현재의 땅에 서서 현실을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인류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현재 우리 세계에 아직도 여러 문명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의 단증이기도 하다.

저자는 크게 역사를 3단계로 나눈다. 고대문명에서 15세기경까지 이르는 부족문화와 다양성의 문화가 존재하는 시기다. 원시시대부터 유목민문화, 정착생활, 세계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진보를 가져오는 원동력은 서로 다른 문화집단 간의 역동적인 긴장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나, 각 문화집단은 그 나름대로 제 기능을 훌륭히 수행해왔다는 것을 얘기한다. 나아가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일으켰다는 것 또한 놓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농경은 채집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지만, 기대 수명이 짧아지고 키가 작아지며 질병이 많아지고 영양 상태가 나빠지며 주기적으로 기근을 겪는 등의 대가를 치렀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 다음이 근대의 국민문화와 세계 질서가 대두되는 시기다. 그러나 국민문화와 세계 질서는 접촉이 있을 때마다 부족민과 다른 문명을 끊임없이 파괴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세계의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문화를 창조하려고 애썼으나, 근대의 국민주의 문화는 그들이 지배한 넓은 지역에서 획일성을 강요한다.

획일성은 파괴를 낳는다. 유럽에서 싹튼 세계문명은 유럽을 빠져나와 카나리아 제도, 카리브해 원주민, 아메리카 주민, 폴리네시아 원주민 사회를 깡그리 말살해갔다. 현대 세계는 반대나 변이나 일탈을 거의 용납하지 않았고, 특정 사회체제에 맞는 획일적인 주민들을 요구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세계문화의 혼란기에 접어들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 혼란의 정체는 지금이 위기의 끝에 서 있다는 진단과 일맥상통한다. 역사적으로 전쟁이나 역병, 환경교란 등의 이유로 비교적 갑자기 무너진 문명의 예가 많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단일한 지구 문명으로 통일되어 있어 단지 한 문명의 몰락이 아니라 세계문화의 몰락으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저자는 더욱 심각성을 두고 있다. 한 부분의 멸망은 연쇄 반응을 일으켜 지구 전체를 휩쓸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최근 1만년이라는 기간은 채집으로부터 모종의 어마어마하게 뛰어난 생활방식으로 옮겨 가는 과도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낙관적으로 보든, 비관적으로 보든,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의 커다란 한 시대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문명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이 순간, 저자는 우리 문명 스스로 아마겟돈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난제는 획일적으로 살지 않으면서 조화롭게 사는 것, 즉 상업, 대중문화, 통신 등과 같은 세계적인 힘에 의해 통일되면서도 종교나 민족성 등과 같은 분야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평화로이 유지하는 것이다.”라고 답하고 있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닥칠 위험이 있는 문제들을 우리가 극복하려면 모든 문화가 지니고 있는 모든 지식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클라이브 폰팅은 ‘녹색세계사’를 통해 세계사를 환경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바 있다. 다니엘 네틀과 수잔 로메인은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을 통해 언어의 다양성 말살이 우리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 책도 비슷한 맥락에 서 있다. 문명의 발달과정이 파괴의 역사를 걸어왔다는 지점에서는 환경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고, 문명의 다양성 입장에 굳건히 서서 문화 또는 문명의 획일성이 문명의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얼마전만 해도 문화적 상대성은 상대편 문화에 대한 똘레랑스를 뜻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관점은 다소 점잖은 태도로 느껴진다. 상대방이 없으면 자신도 없다는 절박감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제목은 수정되어야 한다. 야만과 문명은 분리된 다트판으로 우리가 화살을 던져 살아남을 쪽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다. 둘 다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해야 하며 그 관점에서 그 둘은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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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역사 세계신화총서 1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감수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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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열풍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어른들은 이윤기씨의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담론 등을 중심으로, 아이들은 만화 그리스로마신화로 꾸준한 관심을 끌고 있다. 신화의 ‘신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가 첨단과학시대에도 왜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걸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도, 아이들의 신화에 대한 관심에 제대로 응대 해주기 위해서도 신화의 역사를 들여다봄직 할 것이다.

신화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류가 상상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신화는 싹 텄을 것이다. 인류는 죽음을 그리고, 동물을 등장시키고,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논하면서 신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신화는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았다. 인류가 생명의 유한함을 인식하거나 절망에 빠질 때, 그 사실과 타협하기 위한 일종의 대응논리로 만든 것이 신화라고 『신화의 역사』 저자(카렌 암스트롱)는 말한다. 결국 그 당시 마주한 환경과 이웃, 관습에 대한 태도를 설명하거나 곤경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용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은 단지 재미가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은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살아가면서 미지의 세계와 만날 때 이러한 영웅신화는 지침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헤라클레스는 필요에 의해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애초에 신화는 초자연적인 것도 아니었고, 신들의 세계와 인간 세계 사이에 큰 간격도 없었다.

저자는 이러한 신화가 역사의 발달 속에서 어떤 모습을 지녀왔는가를 얘기하고 있다. 신화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을 끼친 요소를 뽑으라면 단연 과학(또는 로고스)이라고 할 것이다. 신화와 과학은 역사 발달 과정에서 공존과 배척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형성해왔다고 할 것이다. 종교, 철학, 국가, 문명의 발달과정에서 신화는 이들과 거리를 두기도 하고, 서로 영역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신화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기도 했다. 그러다가 근대의 발달 이후로 신화의 영역과 위상은 축소되어왔다.

이에 대해 저자는 신화와 과학(또는 로고스)은 둘 다 인류의 영역을 확장시켜준다는 견해를 편다. 신화와 로고스는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고, 서로 다른 영역이기에 인간은 두 가지 사유방식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사회에서 사냥 원정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로고스가 필요했지만, 동물을 죽인다는 복잡한 심경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신화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우리가 물질적으로는 더 세련된 삶을 살고 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신화의 영역을 축소시킴으로써 퇴보했을지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대인은 미술이나 록 음악, 마약, 과장된 영화 등에서 ‘영웅’을 찾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 양자가 조화되는 삶이야말로 지구를 살리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단지 신화가 어떻게 탄생해서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거론하는데 지나는 것이 아니라, 현대문명의 문제점 및 방향까지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신화의 현대적 해석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로마사에 대해 접근할 때 우리 현대의 기준을 가지고 자를 재려 해서는 안된다”는 시오노 나나미의 말은 신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노예제도를 현대의 민주주의라는 자에 의해 재단할 수 없듯이, 신화 역시 현대과학에 의거해 판단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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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라이프 - 우리가 꿈꾸는 또 다른 삶
쓰지 신이치 지음, 김향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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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라이프’라는 단어에는 벌써 많은 얘기가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언뜻 가깝고 친근한 단어처럼 느껴지지만, 이 단어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음미해본다면 멀고 무겁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이 단어에는 현재를 부정하고 현재를 탈출하고자 하는 심리를 자극하는 마력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행동화까지 이끄는 용기까지는 쉽게 주지 못하는 듯 하다.

그것은 현재의 우리의 삶은 복잡다단한 네트워크와 사슬로 묶여 있어 조그마한 고리 하나도 자유롭게 떼어내기 어렵다는 것과 긴밀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또한 슬로 라이프를 현재의 부정이나 탈출을 넘어 대안적 세계관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 이의 방향으로 단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슬로 라이프는 현재의 주류문화, 주류가치관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식으로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세계관 또는 삶의 양식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계 일본인인 쓰지 신이치(한국명 이규)의 『슬로 라이프』는 이점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슬로 라이프’라는 말은 저자가 처음 세상에 퍼뜨린 말이기도 하다. 저자는 1999년 ‘나무늘보 친구들’이라는 NGO를 결성해 슬로 라이프를 되찾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오고 있기도 하다.

‘슬로’ 또는 ‘심플’이라는 사상은 부분적으로는 이 세상의 키워드가 되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슬로푸드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슬로푸드는 패스트푸드의 생산양식이나 소비양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아무리 논리적 우월성을 띠었다 해도 항상 소수파의 입장이 될 것이다. 패스트푸드는 단순히 시간이 걸리지 않아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패스트푸드를 음식이나 요리법뿐만 아니라, 음식을 둘러싼 사람들의 생활, 인간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산업 구조 등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양식이자 사상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결국 슬로푸드운동은 대안적인 음식에 대한 운동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양식에 대한 운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광란의 속도에 휩싸여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미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1990년대 미국인 근로자들은 1970년대에 비해 연평균 142시간을 더 일하고 있다. 현대과학기술이 오히려 사람들을 더 바쁘게 만들고 있다는 역설이다. 자신의 다이어리에 빼곡히 일정이 적혀있지 않으면 그 여백으로부터 황소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아서 불안해서 못 견디는 ‘여백증후군’도 있다.

이러한 것이 발생하는 기본적인 정서가 ‘공포’라고 저자는 얘기한다. 경쟁을 떠받치고 있는 근원적인 공포가 제거되지 않는 이상, 경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대사회는 안심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고, 자유와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도록 부추겼으며, 그 너머에 도달해야만 안심이 있는 것처럼 믿게 했다. 슬로 라이프란 바로 이러한 안심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안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자는 ‘씨앗이 자라나는 속도’를 넘어선 곳에는 공포만 있을 뿐 안심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자연의 시간에 인간의 삶을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중심적 시간을 자연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이제까지의 방식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을 자연의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차원에서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발상법인 ‘시간이 돈’이라는 말 대신에, 모든 것을 시간으로 환산하는 ‘돈이 시간’이라는 말로 발상을 전환하자거나, 생산자와 소비자가 제휴하여 유기농업을 키워 온 것처럼, 유기공업을 키워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저자의 제안이 신선하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에 의해서 걷기, 게으름, 패스트푸드, 반세계화, 경쟁, 슬로 러브, 지구 온난화, 비폭력, 전쟁, 진보, 남북문제, 언플러그, 비전화(非電化), 친환경주택, 육식, 에코 투어리즘, 슬로 카페, 슬로 섹스 등 모든 사회현상을 걸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장시간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어슬렁어슬렁 보내는 사람들에게 슬로 라이프는 구세주 철학인가? 안타깝게도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진짜 슬로 라이프는 자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활기차고도 역동적인 생활 방식에 있다도 못을 박고 있으니 단순히 게으른 사람에게는 슬로 라이프가 탈출구가 되지는 못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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