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의 성 -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성의 인류학, 개정판
헬렌 피셔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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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드 보부아르는 1949년에 발표한 ‘제2의 성’에서 ‘여성이란 순전히 경제 및 사회적 세력들의 산물이며,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감안한다면 가히 혁명적 접근이었을 것이다. 차별과 그 차별을 낳는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엄중하게 지배하고 있었기에,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부차적인 모순으로 취급되곤 했다.

그러나 이제 여성은 태어나기도 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데 어느 정도 수렴해가고 있다. 물론 이런 인식의 보편화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여전히 ‘제2의 성’에 머물러 있다. 왜 여성이 제2의 성에 머물러 있고, 또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제1의 성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해석은 근대에 들어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이에 대한 인류학자 헬렌 피셔가 『제1의 성』에서 접근한 방식은 매우 신선하다.

『제1의 성』의 저자는 먼저 남녀의 차이에 대해 주목한다. 예를 들면 여성들은 일직선이 아니라 거미집식으로, 서로 관련 있는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남성들은 초점을 한 곳에 집중하고, 구획을 짓고, 항목별로 차곡차곡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이를 거미집 사고와 계단식 사고로 이름 지어 대별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낳은 열쇠를 저자는 수십, 수백만년 동안의 진화 과정에서 찾고 있다. 위험한 야수를 뒤쫓을 때 남성들은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던 반면, 선조 여성들은 매우 위험스런 조건에서 어른의 손길을 오랜 동안 필요로 하는 아기들을 키우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결정과정에서도 항상 여러 복잡한 변수를 생각하고, 또 말도 모르고 의존도가 높은 갓난 아기들의 요구사항을 끊임없이 읽어내다 보니 짐작이 발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사고방식이 다르게 진화해 온 것인데, 남성이 제1의 성인 시대에서 여성의 사고방식은 종종 덜 논리적이고, 덜 이성적이고, 덜 구체적이고, 심지어 덜 지적이라고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사회관계에서도 그대로 투영된다. 사회관계에서 남성들은 자신을 계급구조의 틀에 넣으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여성들은 협동과 조화, 즉 지지라는 네트워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진화과정에서의 차이를 전두엽 앞쪽 피질의 구조가 남성과 여성 간에 어떤 차이가 있고, 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과학적 근거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차이로 인해 여성이 앞으로는 ‘제1의 성’으로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인류의 진화과정을 통해 얻는 언어와 관련된 재능, 타인의 몸짓과 자세, 얼굴 표정 그리고 다른 언어적인 단서를 읽을 줄 아는 능력, 섬세한 감수성, 감응력, 우수한 촉각․후각․미각․청각, 인내력,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거나 생각하는 능력, 어떠한 이슈든 넓게 전후 맥락으로 보는 폭넓은 시각, 장기적인 기획을 선호하는 경향, 네트워킹과 협상에 뛰어난 재능, 보살핌을 베풀려는 충동, 협력과 의견 일치를 옹호하고 다른 사람을 이끌 때도 평등주의 원칙을 택하려는 성향 등을 이 사회는 점점 더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들 들면 기업체들이 상하 계급적인 관리 구조를 해체하고 평등주의적인 팀 플레이를 강조하고 나섬에 따라 네트워킹과 의견 일치를 잘 이끌어내는 여성들의 능력은 앞으로 더더욱 중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1의 성』의 접근법은 신선하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언급할 때 우리 사회는 보통 우성과 열성의 관점에서 구조화한다. 그러나 그 구조화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남성관에 의한 구조화일 수밖에 없다.

인류는 정주생활이 시작된 최근 1만여년 동안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집중해서 돌파하려는 ‘계단식 사고’ 방식에 좀 더 치우쳐 왔다.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환경문제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환경문제 또한 남성-여성의 문제 등 여러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거미집 사고’일 것이다. 최근에 급격하게 한 쪽으로 치우친 추를 바르게 되돌리는 작업은 여러 영역에서 진행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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