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초 편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야생초 편지 2
황대권 지음 / 도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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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은 흔히들 소외의 공간, 억압의 공간으로 상징된다. 그러나 어느날 깊은 우물물 속에서 무심히 길어 올린 두레박물이 시리도록 찬 청정수가 되어 우리 온몸을 소스라치게 깨울 때 우리는 흠칫 놀란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비쳐지는 밝은 미소, 가장 단절된 곳에서 이어낸 하나 되는 삶, 가장 억압된 곳에서 그려낸 자유, 가장 소외된 곳에서 얘기하는 사랑이 강한 대비가 되고, 큰 울림이 되어 우리를 쩌릿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청정수를 접할 때 감옥을 과연 ‘닫힌 공간’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밖으로 닫혀 있기에 안으로는 무한히 열려 있을 수 있는 세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감옥이 성찰의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둠과 상실과 고립 속에서 격랑은 거친 물결처럼 일기 마련이고, 이를 인고의 세월 속에서 정제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성찰일 것이다. 격랑이 잦아들면 강물 바닥이 훤히 드러나며 고요를 찾게 된다. 신영복씨의 강물 바닥에는 ‘인간’이 있었다면, 『야생초 편지』의 황대권씨의 바닥에서는 ‘야생초’가 빙긋 웃고 있었다.

윤구병씨는 『잡초는 없다』에서 잡초에 대한 농사철학을 얘기한 바 있다. 마늘밭을 온통 풀밭으로 바꾸어놓은 그 괘씸한 잡초들을 죄다 뽑아 던져 썩혀버렸는데, 사실은 그 풀들이 잡초가 아니라 별꽃나물과 광대나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후회하면서 터득한 철학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굳은 자가당착 때문에 폭군처럼 사물을 지배하고 절대권력자처럼 사물을 재단해 왔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면 제거대상이 될 뿐이다. 그리고 사물의 가치는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 용도를 가지고 있느냐로 재단하고 이를 기준으로 줄을 세운다.

황대권씨는 감옥 안에서 잡초를 비로소 야생초로 받아들이고 야생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감옥에 갇힌 지 5년 동안은 억울한 간첩죄에 온몸으로 몸부림치며 지내다가 급기야 몸마저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그는 자연요법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교도소 안에서조차도 미천한 존재로 치부 받아 항상 제거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잡초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관심이 거듭된 관찰을 낳으면서 점차 생태주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특별히 허락을 받아 안동교도소 운동장 한 구석에 야생초 화단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화단을 구분 짓기 위해 쌓아놓은 작은 돌 몇 개로는 사회의 인식을 방어하기에는 어려웠다. 교도소 구내 청소하는 사람들은 가꾸고 있는 야생초를 마구 뽑아버리기도 했으며, 같이 밭을 일구는 동료는 상추 성장에 방해가 되는 야생초를 솎아 내버리기 일쑤였다. 상추나 비름이나 명아주나 모두 같은 야채로 보이는 황대권씨 입장에서는 넘어야 할 ‘의식의 옹벽’이었다. 반면 이렇게 가꾸어낸 야생초로 만든 모듬풀 물김치, 들풀모듬 무침, 야초차, 들품모듬 잼 등은 옹벽을 넘는 전령이 되기도 했다.

황대권씨가 옥중편지 글 사이에 그려놓은 야생초 그림은 잡초에 대한 ‘복권’ 그 자체다. 잡초가 언제 그런 섬세한 필치 속에 자신을 표현한 적이 있었던가. 황대권씨의 손 끝에서는 잡초의 미세한 떨림, 수줍은 모습, 그리고 자랑하고 싶었던 숨겨진 아름다움이 하나 하나 살아났으며, 그것은 곧 잡초의 야생초로의 복권이자 탈피를 알려주는 기쁨의 타종이 되었다.

글과 그림 속에서 살아난 야생초는 식용이나 약용이라는 실용적 의미로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황대권씨는 야생초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종의 다양성을 유지시키며, 자연과 공생하면서 삶의 총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황대권씨가 감옥 안에서 끌어올린 야생초 사랑은 안일한 사회를 일깨우는 경종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야생초와의 공생’을 쉽게 떠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감옥에서 걸어나온 야생초 사랑이 온 산야를 사랑으로 감싸, 사람과 자연의 즐거운 공생을 꾀할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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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짐 콜린스 지음, 이무열 옮김 / 김영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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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콜린스는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Built to Last)의 저자로 이미 국내에 알려져 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약 100년에 걸쳐 장수하는 기업을 업종별로 18개 선정하고, 해당 기업과 대비되는 또 18개의 기업을 선정하여 성공하는 기업의 특징을 밝혀내었다.

그 뒤 6년 뒤인 2001년에 짐 콜린스는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를 내놓았다. 분석 방법도 비슷하다. 다만 분석의 주안점이 다를 뿐이다. 그가 착안한 점은 “좋은 것(Good)은 큰 것(Great, 거대하고 위대한 것)의 적이다”라는 점이다. 좋은 성과에서 큰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어떤 ‘블랙박스’가 있을 듯 한데, 그 블랙박스를 찾아 떠나는 연구라 할 수 있다. 즉, 좋은 조직을 줄곧 큰 성과를 내는 위대한 조직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쓴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계열적인 측면에서 보면, 전작이 기업의 탄생에서 영속적 발전까지 그린 반면, 신작은 도약시점 전후에 무엇이 있었냐를 그리고 있어 전작이 좀 더 긴 시간을 조망하고, 신작이 변화의 시간을 압축적으로 조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짐 콜린스의 분석 방법은 독특하다. Good to Great에서도 Good에서 Great로 도약한 기업 11개를 업종별로 찾아낸다. 그리고 그 업종에서 도약에 실패한 고만고만한 비교기업 11개를 또 찾아낸다. 그리고 양 비교그룹을 도약시점 전후 15년 정도를 훑으면서 ‘도대체 무엇이 있었나’를 심혈을 기울이며 ‘증거’를 찾아나선다. 이점이 짐 콜린스의 분석 방법의 장점이다. 실제 사례의 풍부한 경험을 통해서 이론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 때문에 짐 콜린스의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물론 경영전략을 다룬 미국發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경험사례에 의거한 일반화 논리가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있었나. 짐 콜린스는 6가지 법칙을 얘기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위대한 기업의 6가지 법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법칙들은 하나의 명제로만 볼 때는 극히 상식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콜린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새로운 답을 찾을 수 있다.

먼저, 그는 <단계5의 리더십>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단계5의 리더들은 차세대의 후계자들이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는데 반해서, 자기 중심적인 단계4의 리더들은 후계자들을 실패의 늪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자의 대표적 인물로 잭 웰치나 아이카코카를 거론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우리의 상식과 잠시 혼선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또 좋은 회사를 위대한 회사로 키운 CEO 11명 중 10명은 회사 내부 출신인 반면, 비교 기업들은 6배나 자주 외부 CEO 영입을 시도했다는 대목에서도 우리는 잠시 의아해할 수 있을 것이다.

콜린스는 그 외에 <사람 먼저, 그 다음에 할 일을>,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라>, <고슴도치 컨셉>, <규율의 문화>, <기술의 가속페달> 등의 원리를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는 ‘Built to Last'와 비슷한 내용도 있고, 새로운 내용도 있다. 저자는 근작이 전작의 서문격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이 두 책을 비교하며 서로 간의 상관관계를 애써 밝히는 것은 크게 의미 있지 않을 듯 싶다. 두 책에서 거론하는 비교기업들이 거의 중복되지 않은데다, 각각의 사례는 각각 나름의 진리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짐 콜린스 책을 읽다보면 위대한 기업의 내부 목소리에만 의존해서 쓸 경우 ‘결과론에 의거한 과거 역사에 대한 포장’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조그만 아쉬움이 약간은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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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걸린 웹 - 웹의 권력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로라 J. 구락 지음, 강수아 옮김 / 들녘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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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20세기에 이르러 신천지를 찾았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2세기에 걸쳐 창성했던 지구상 탐험으로 이제는 더 이상 발견할 신대륙이 없을 것만 같았는데, 20세기에 신천지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이 신천지에 ‘Cyber Space'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구상의 발견’에는 지형적 한계에 봉착했지만, ‘Cyber Space'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무정형성에 의거해 그 한계가 없이 무한정 아메바처럼 확장할 것처럼 보였다. 실제 그 신천지에는 초기에 법도, 사회적 권력도, 때로는 사회적 이성도 미치지 못함으로써 신천지에 도착한 소수그룹에 의해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무정형성은 혹자에 의해서는 장밋빛으로 그려지기도 했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혼돈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Cyber Space의 확장은 언제까지나 현실세계와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도 없었고, 현실세계의 세력군의 진입은 결국 Cyber Space의 방향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미줄에 걸립 웹>은 이에 대해 이런 화두를 던진다. “테크놀로지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그 방향타는 누가 잡고 있는가?”

그리고 먼저, 기술결정론에 반기를 들면서 이 책의 원제인 사이버리터러시(Cyberliteracy)를 얘기한다. 사이버리터러시는 ‘사이버(Cyber)’와 글을 읽고 해독하는 능력을 뜻하는 ‘리터러시(Literacy)'를 결합한 신조어다. 이는 사이버스페이스 하면 떠올리는 웹 영상, 빠른 데이터 연결 이상의 것을 내다보는 비판적인 태도를 뜻한다. 기술결정론에 대한 도전이자 의식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는 것이다. 물론 사용자가 이를 위해서는 정보기술을 결정짓는 경제적, 정치적 힘을 이해해야 한다.

“과학기술에서의 다윈주의는 소비자의 힘이 자연선택의 힘과 맞먹으며, 결합이 있는 제품은 사람들이 구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진화 계보에서 떨어져나갈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인터넷의 미래 모습과 기능을 결정하는 것은 인터넷 기업, 통신 및 케이블 업체, 연예 및 미디어 그룹, 정부 관리 등이다. 우리가 행동주의적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연구, 교육, 그리고 우리가 지지하는 기술에 도사리고 있는 결정주의에 도전하는 열혈 사이버스페이스 시민이 되지 않는다면 다른 가능성들은 점차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즉, 이 책은 Cyber Space가 인터넷 기업이나 통신업체 등에 의해 주도되면서 기술결정론에 빠지지 않도록 이용자가 사이버리터러시를 가지고 비판적으로 대응하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Cyberliteracy를 거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영역을 설정하고 그 방향성을 제시한다. 테크노레이지(technorage), 젠더, 유머 및 혹스(hoax, 날조), 프라이버시와 저작권, 전자상거래, 인터넷중독 등이 그 영역들이다.

그 영역들을 언급하며 저자는 테크노레이지(technorage) 맞선 법률의 제정을 검토할 것을 역설하고, 성 차별적인 플레이밍에 대해 도전할 것을 주문하며, 혹스/유머 등에서 정보의 질을 판별하는 능력을 배양시킬 것 등을 얘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이버스페이스가 현실과 괴리되어 존재하는 개념으로 들리는 한 우리에게 유해하며, 따라서 “생각은 세계적으로 하되 먹는 것은 지금 이 곳에서”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사이버리터러시. 새로운 신조어이면서 주장하는 바가 명확히 드러나 고개가 끄떡거려지지만,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다소 실망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도덕적 윤리 같기도 하고, 일상적인 네티켓 같기도 하고, 그래서 무얼 하라는 것인지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세계를 장밋빛 환상으로 보거나 반대로 폄하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행동주의적 입장에서 보고 있는 관점만은 유념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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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팅 게임 - Science Pioneer(위대한 과학의 개척자들) 1
체리 루이스 지음, 조숙경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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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지위는 상승했는가. 인간의 인식의 지평은 넓어졌지만, 아쉽게도 우주의 무대 중앙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던 지위에서는 내려와야만 했다. 인간의 지위에 대한 첫번째 반격은 지동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것에 의해 우주가 인간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한 행성에 실려 돌고 도는 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말았다.

두번째 반격은 진화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고매한 정신적 존재가 한 미물에서부터 진화되어 왔음을 인정하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세번째 반격은 프로이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우주의 중심이 아니든, 진화의 산물이든 인간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훌륭히 구축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뛰어난 인간마저 의식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무의식세계의 지배를 한편으로 받고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또 하나의 흠집이었음에 자명하다. 더 이상 추락할 여지가 없을 것으로 보였는데, 여기에 또 하나의 충격이 가해진다. 그것은 바로 '지구의 나이' 논쟁이다.

19세기만 해도 지구의 나이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성경의 창세기에 근거해 시간을 추산한 결과 지구의 나이를 6천년으로 보았다. 과학자 진영에서도 지구의 나이는 길게 봐야 2천만년으로 보고 있었다. 열역학을 확립한 캘빈은 지각의 표면이 식는 시간을 계산하여 2천만년을 주장했고, 이 분야에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2천만년의 시간은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구상에서 인간의 지위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인간은 지구가 생긴 이래 상당한 기간이 지나서 출현했지만, 그래도 지구 나이에 비해 지배하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기에 '지배자'로서의 풍모에 손상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윈이 남부 잉글랜드의 한 계곡을 조사하면서 침식에 의해 암석의 돔이 노출되기까지는 최소한 3억년이 걸렸다는 계산을 내놓았을 때는 한때 '출렁'거렸다. 그러나 다윈은 지질학자들의 반박에 즉각 휘말렸고, 결국 다윈의 '우연한 계산'은 철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세기말 원자의 핵, 라듐의 라돈으로의 붕괴, 헬륨 등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면서 '지구 시계'가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1903년 소디와 러더퍼드는 '붕괴 사슬'을 확립해냈고, 그 뒤 10년 뒤 아서 홈즈는 이 방법으로 지구의 암석을 분석하는 방법을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지구의 나이' 논쟁은 중요한 분기점을 통과했고, 20세기 중반, 인류는 드디어 지구에게 46억년이라는 나이를 부여하였다.

46억년이라는 나이로 인해 인류는 지구의 자정 직전에 태어난 미미한 존재이자, 지구의 일시적인 지배자로 머무를 수도 있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구의 나이’를 찾는 여행은 단지 지구의 존재위치를 자리매김 해주기 위한 과학자의 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위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여행은 고행이 필요했다. 수많은 지질학자, 생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들이 이 여행에 동행했다. 이들 가운데 지구의 나이를 찾는 마라톤에서 ‘마(魔)의 고개’를 넘은 사람이 바로 아서 홈즈였다. 비록 1953년에 지구의 나이를 정확하게 이끌어낸 과학자는 패터슨에게로 돌아갔지만, 패터슨은 그의 스승인 아서 홈즈의 어깨 위에 올라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데이팅 게임>은 아서 홈즈에 관한 책이다. 지구의 나이를 찾아 나선 한 숨은 과학자의 일정을 다룬 책이다. 인간은 지구의 나이를 정확히 계산해 낸 패터슨만 기억할지 모르지만, 지구는 자신의 나이를 찾아준 은공을 아서 홈즈에게 돌릴 지도 모른다.

20세기 들어 숨 가쁘게 진행되었던 ‘데이팅 게임’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 게임은 러더퍼드, 아서 홈즈, 패터슨 등의 과학자들을 승자의 반열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지만 최후의 승자의 몫은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할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지구다. 그리고 인간은 시상대에서 조용히 내려와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서는 지구를 향해 뜨거운 박수를 쳐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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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0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0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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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 만리장성이 있다면 서양에는 로마가도가 있다. 만리장성의 경우 기원전 3세기의 진시황시대 및 16세기의 명나라시대에 건설된 것까지 합치면 무려 5천km. 그럼 로마 가도는? 기원전 3세기부터 5백년 동안 건설한 도로 총길이는 지선도로를 뺀 간선도로만 해도 8만km에 이르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가도의 연장선에 있는 다리 역시 3천개를 구축했는데 그중 3백개는 지금도 사람이나 자동차가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로마의 테베레강에 놓인 11개의 다리 가운데 5개는 2천년 뒤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가도도 가도지만 수도(水道)도 놀랍다. 로마 관광사진에 큰 다리처럼 나오는 수도는 그저 로마인의 전시행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들여다보면 로마의 인프라가 얼마나 견고한지 그 힘이 느껴진다. 기원전 4세기에 첫 시공된 수도는 모두 11개가 건설되었다. 그 중 기원전 2세기에 건설된 마르키아 수도를 보면 총 길이가 92km인데 그 중 81km가 지하로 흐르고 11km가 지상으로 흐른다. 그 지상의 11km 중에는 9.6km가 고가 수로로 되어 있다. 90여km 떨어진 수원에서 로마시내까지 물이 흘러들도록 하기 위해서는 완만한 경사를 계속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서 산을 뚫고, 고가 수로를 놓은 것이다. 현대 산업의 동맥이 고속도로라면 고대 로마의 동맥은 이 수로였던 것이다. 지금 고속도로에 자동차가 흐르듯이 2천년 전 로마는 수도에 물이 끊이지 않고 흘렀던 것이다. 마르키아 수도의 경우 하루 수송량이 185,600㎥(현대인 37만명이 소비할 수 있는 양)였으니 로마는 이 풍부한 ‘수혈’을 통해 화려한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로마의 수도는 로마 제국 각지에서 건축되었다. 속주민에게 로마의 힘을 자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프라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로마 수도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옛 영광을 웅변해주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얘기를 『로마인 이야기 10』에서 쓰고 있다. 그동안 9권까지 쓰면서 묵혀 두었던 로마의 인프라에 관한 얘기를 이 한 권에 모두 털어놓은 것이다. 그러니 9권까지 따라오지 못했던 독자들도 10권만은 별도로 읽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진정한 위대성은 인프라 구축에 있다고 하면서 이의 방대함과 견고성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좀 다른 면에서 볼 필요도 있을 듯하다. 1세기경에 로마 인구는 무려 1백만명이었다. 잘 뻗은 가도는 물자의 집중도 야기하며 로마의 팽창을 가속화시켰을 것이다. 로마는 이러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도 수도와 같은 여러 인프라를 만들었을 것이다. 로마를 중심으로 방사선처럼 뻗어가는 로마의 수도는 로마 문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2천년 전의 로마인은 현대 최고 문명인들이 사용하는 만큼의 물을 소비할 정도였다. 그러나 성장과 풍족함은 항상 문제를 가리거나 희석화시켜버리곤 한다. 이러한 인프라는 로마를 인구압의 문제로 몰아넣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현대도 1백만명 정도의 도시라면 수많은 문제가 나타나는데 로마라고 해서 그렇지 않을리는 없다. 그러나 풍성함만을 알았던 ‘자신있는’ 로마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던 듯 하다.

항상 ‘적극적인 방법’이 최선은 아닌 것이다. 도심 주차난이 심각할 때 도심에 주차장을 늘리는 ‘적극적인 방법’이 오히려 주차장을 줄여버리고 주차료를 높이는 ‘소극적인 방법’보다 못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로마가 멸망하고 인구가 3만으로 줄어들었을 때 로마의 수도는 제 할 일을 못찾고 방치되고 말았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 로마의 인구 집중이 어떤 문제를 야기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수도를 늘려나가는 정책은 문명에 대한 과신이었다는 생각만은 든다. 아직도 도처에 남아있는 수도의 웅장함 속에서 왠지 문명의 그늘이 느껴지는 것은 내가 속이 좁아서일까. 2천년 전의 문명에 대해 감탄사만을 연발할 때 우리는 현재 우리의 문제점도 읽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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