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노인의 움막엔 다시 연기가 오르고…

정용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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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주
치악산 겨울 숲에 싸락눈이 내린다. 물을 길어다 솥에 붓고 아궁이에 장작을 태우며 부엌문 밖으로 내리는 적막과 고요의 흰 가루들을 본다. 아궁이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싸락눈, 문득 미당 서정주의 시 구절 하나 생각난다.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그 암무당 손때 묻은 징채 보는 것 같군'

내 움막 500m 아래쯤에 유일한 이웃인 노 부부가 염소를 키우며 살고 있다. 할아버지의 연세는 올해 일흔여덟이다. 처음 내가 이곳으로 온 6년 전에 할아버지는 염소 사료 두 포대를 지고 거뜬하게 산길 2km를 앞서 걸어가시고 나는 한 포대를 지고 낑낑거리며 뒤를 따랐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굴뚝에 흰 연기를 피워 올리며 이 숲에 살았다.

그러던 할아버지께 운명이 보내준 선물이 찾아왔다. 스무 살 무렵 사고를 당해 정신을 다친 딸을 마음에 묻었던 할아버지가 며칠 전 음성의 한 요양원에서 그 딸을 찾았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미 쉰이 넘은 딸이 "아부지!" 하면서 헤죽이 웃더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마당 화덕에 산당귀를 끓이고 시내에 나가서 과자와 빵을 한 아름 사왔다. 좋아하시던 술도 끊고 주름진 얼굴에는 깊은 삶의 애착이 드러났다. 더 오래 살아야 할 삶의 무게가 늙은 어깨에 얹어진 것이다.

평소에 가끔 내 움막으로 오는 오솔길을 비틀비틀 올라오셔서 "야 이놈아 술 한잔 내 와라!" 하기도 하고 삼짇날이나 음력 9월 9일에는 몇 개의 과일과 포를 가지고 바위 아래 터에서 기도를 드리던 노인. 그 가슴 깊은 곳에서 마르지 않고 흘러간 슬픔의 샘을 이제서 나는 들여다본다. 그분의 굴뚝에도 지금 느리게 저녁 군불 때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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