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 20년 前 종이자료를 꺼내며…







 



방학을 한 김에 자료 정리에 들어갔다. 재놓기만 한 종이자료를 잘 분류해서 책처럼 만드는 일과 1만여 권의 책에 나만의 분류번호를 만들어 붙이는 일이다. 종이자료는 주로 20여 년 전 유학시절 때 집에다 복사기까지 사다 놓고 저널논문과 단행본을 복사한 것이었다. 양이 제법 되어서 4cm 두께의 파일박스 400개를 사서 라벨을 붙이고 담았다.

그러다 문득 이 자료들 가운데 죽기 전에 한 번도 안 읽어볼 것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가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내 전공은 건축역사이지만 소속이 공대라서 더 그랬다. 옆 교수들을 보면 최신 컴퓨터 몇 대 가지고 훌륭한 연구들을 척척 해내고 중학교 다니는 딸내미는 인터넷 검색만으로 거의 모든 과제를 다 처리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50평짜리 시골 아파트를 전세 내서 서재로 쓰면서 5톤 트럭 3대분의 책을 짊어지고 2~3년마다 쫓겨나듯 이사를 다니는 수고를 하며 살고 있다. 종이자료 정리하는 걸 옆에서 본 누군가가 말했다. 자기라면 파일박스 400개 살 돈으로 스캐너를 사서 그 자료를 스캔받겠다고.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면서 시대에 너무 뒤떨어져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종이자료를 주제별로 분류하기 위해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주옥같은 연구물들이라서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학문세계가 몇 단계는 성숙해지는 느낌이었다. 종이의 촉감을 지문 끝으로 비벼대는 쾌감도 제법 컸다.

온라인 자료만 잘 검색해도 웬만한 일이 꾸며지고 심지어 학자 흉내까지도 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피라미드의 맨 끝 최고수가 되기 위한 진짜 고급 자료는 아직 모두 세계 유수의 도서관들 저 구석에 먼지를 가득 뒤집어쓰고 꽁꽁 숨어있다.

지금이야 집에 앉아서도 쉽게 책을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지만, 활자매체를 만들어내는 일 자체가 큰 노동이었던 수십 년 전, 심지어 100여년 전 연구물들을 훑어보노라면 활자 하나하나가 화살이 되어 내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나라와 인종을 떠나서 이렇게 힘들게 연구를 한 꼿꼿한 선배들의 결과물들을 복사기 몇 번 돌려서 쉽게 손에 넣는 호사를 누려놓고도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저런 불평만 하고 있는지 내 자신이 창피해졌다.


임석재 건축가ㆍ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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