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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쉽고 재미있다>는 것은 참 끌어내기 힘든 결과다. <쉽고 재미있고 감동적이다>는, 생각컨데 쉽고 재미있는 것 보다 두 배는 힘들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제, 쉽고 재미있고 감동적인데다 매우 독특하기까지 한 책을 한 권 만났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 알라딘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던 탄성이 아니라면, 절/대 집어들 일이 없었을 것이다. 수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무용담인냥 떠드는 일화 중 하나를 밝히자면, 백 점 만점에 5점도 받아본 일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야기 속의 수학은 내가 알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딱딱하고, 지루하고, 정확하며, 차가운'이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박사가 사랑하는 수학은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많은 여지를 품은 인간적인 것이다.
쓰다듬기 좋은 평평한 머리, 루트라니. 그 지긋지긋하던 기호가 이렇게 근사한 별칭이 될 줄이야...
서로의 약수의 합을 두고 마주 선 우애수, 자신의 약수의 합이 그 자신인 완전수, 박사가 그토록 사랑한 소수들의 변덕스러운 매력! 새로이 발견된 '수학'이, 외롭고 병든 노박사와 미혼모 파출부, 그의 아들이라는 묘한 가족 구성원 속에 부드럽게 스며있다. 수학을 매개로 한 기억과 사랑, 그것은 일상 속에 노곤하고 흡족하게 녹아든다.
무엇보다도 독특한 인물설정이 돋보인다.
교통사고로 47세에서 기억이 멈춰버린 노 박사. 80분 밖에 기억이 유지되지 않는 병. 수학과 아이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배후에 깔린 형수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까지.
나의 부족한 문장으로 펼쳐놓으니 도저히 한데 버무릴 수 없을 것 같아 고개를 설레설레 젓게 되건만, 작가는 여유있고 부드럽게 모든 것을 소화해 냈다. 박사는 그렇게나 독특한데도 불구하고, 마치 이웃집에 살고있을것만 같은 생생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그런 박사와 맞물리는 파출부와 루트 또한 더할 나위가 없다. 조금은 허무주의자 같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 파출부, 또 조숙하고 명민한 그녀의 아들은 박사에게 운명지워진 우애수인 것처럼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맞아떨어진다.
휘몰아치듯 읽게 되거나 눈물을 펑펑 쏟을만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마치 갓 나온 따끈한 식빵을 뜯어먹는 것처럼 수월하게 책장을 넘기고 나면, 어쩐지 뱃 속이 든든해지는...공기 중에 고소한 냄새가 남아있는 것만 같은, 그런 재미를 준다.
보드랍고 배부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