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우산 들고 다니는 걸 되게 싫어한다. 예를 들어, 일기예보에서 "오늘 비 올 확률은 90%"라고 해도, 지금 당장 비가 오지 않으면 우산은 안 들고 나간다. 왜? "귀찮으니까!"

토요일에도 그랬다. 비뿐이 아니라 태풍이 온다고 하는데, 나는 배짱 좋게도 우산 없이 그냥 나갔다. 낮동안은 괜찮았지. 이동거리도 얼마 없었고, 이 사람 저 사람 우산에 끼어서 머리만 들이밀면 무난한, 그 정도의 비만 내렸다. 문제는 집에 갈 때였는데...택시 탈 때 까지는 같이 나온 수니나라님이 우산을 씌워 주셨고, 지하도를 건너서 삐죽 고개를 내밀어 보니....비가 뭐, 그럭저럭 그칠 분위기였다. 바로 코 앞에 우산 가판대가 있었지만, 집에 넘쳐나는 우산을 떠올리며 '잠깐 맞으면 버스 탈건데 뭘.'하고 걸었다.(지금 생각해보니...사실은, 우산 사는 것도 귀찮았던 모양.TT)

참, 우리집은 인천. 서울역과 인천을 오가는 <삼화고속>이라는 버스가 있다. 덕분에 신촌에서 우리 집까지는 30~40분 밖에 안 걸린다. 헌데 이 버스...주말에는 줄이 무지 길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관교 방면 버스가 막 떠났는지 10명 안 되는 사람들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줄 끝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잠시 후.....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허억.....스타일 구겨질까봐 의연히 참았다. 열심히 버스만 기다리는 척 목을 빼고.....헌데, 비가 계속 많이 온다. 아직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질 정도는 아니지만....뒤를 흘깃 돌아보니 어느새 내 뒤로 많은 사람이 서 있다. 쪽 팔렸다.(비속어지만...'부끄럽다'는 이 상황을 정확히 묘사해 주지 못한다.TT) 우산 가판대와는 꽤 떨어져 있어서, 뒷 사람에게 "잠시만..."하고 후딱 뛰어갔다 올 거리가 아니었다. 이를 어쩐다.....한참 난감해하고 있는데, 어? 비가 멈췄나? 눈동자만 굴려 하늘을 보니, 우산 모서리가 보인다. 뒤에 선 커플의 우산이 내 머리에 걸쳐있다.

처음엔 그냥, 줄 서느라 붙어 선 차에 우산 귀퉁이에 무임승차 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각도와 공간을 계산해 봐도 그게 아닌 것 같다. 내 바로 뒤에는 커플이 서 있었는데, 처음엔 작은 노란 우산이었다가 내가 얼굴에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맞고 몇 번 움찔거리자 남자가 들고 있던 골프 우산으로 바꿔 쓰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무심한 척 우산을 기울이고 서 있는 그들이 고맙고 예뻤지만....더더욱 쪽팔렸다. TT 한 걸음 뒤로 가면 우리 서로 좋으련만, 차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뻣뻣이 서서, 쪽팔림으로 굳어 가고 있었다. '이걸 어째.....고맙다고 해? 모른척 말어? 고맙다 하자니 민망하고...그냥 있자니 미안하고....' 10분여간의 고민 끝에, 나는 용기를 냈다. 한껏 괜찮은 척, 한껏 해사한 척, 한껏 당당한 척 홱 고개를 돌리고

"어머나, 덕분에 비를 안 맞고 있네요. 고맙습니다. (방긋~~~!)"

커플 중 남자가 대답한다. "뭘요, 우산이 커서요.(싱긋~~~!)"

으아아아...... 짜식.........괜찮은 놈이로세!!!!! 나는 마음 속으로 이 커플이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행복하게 살라고 축복을 퍼부었다.

얼마 후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했는데 여전히 비는 온다. 나만 내려라...나만 내려라....기원했건만, 내려서 또각또각 걸으며 뒤를 흘깃 보니, 허억, 그 시각에 열 명 가까운 사람들이 내려 내 뒤를 따르고 있다. 비 온지 한참되었는데....우산도 없이....멀쩡한 처자가.....하얀 스커트를 차려 입고........그들 마음 속의 두런거림이 내 귀에 들려오는 듯 했다. 최악은 건널목. 아까 내린 사람들이 나란히 불 바뀌길 기다리는데, 당근 우산 없이 비 맞는 건 나 하나다. 이상하게도, 누군가 우산을 같이 쓰자고 할까봐 너무너무 두려웠다. 그런 상황이 오면 지금껏 참아왔던 쪽팔림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파란불로 바뀌자 마자 나는 쌩하니 튀어 집으로 열심히 걸었다.

예전엔 비 맞는 걸 참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억수같은 장마비 속으로 교복바람으로 뛰어 나가 훌떡 젖어 오기도 했다.(물론...순진한 친구 두엇 꼬셔서 같이 뛰어 나갔지.^^) 마지막으로 그런 짓을 한 게 대학 1학년 때였나....손에 우산을 들고도 비장하게 전철역까지 비를 맞으며 걸었다. 한 번씩 그런 짓을 하면 마음에 맺혔던 껄끄러운 어떤 것들이 시원하게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헌데, 나이 먹어보니 비맞는 것도 어렵다. 내 마음 속의 시선보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더 신경쓰게 되어 가니까. 비맞는 후련함보다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부끄러움이 10배쯤 크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으니.....앞으로는 귀찮아도, 왠만하면 우산 챙겨 다녀야겠다.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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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07-05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최후까지는 아니네요.
서울에서 대학다닐 때, 제가 아무리 비를 맞고 있어도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이 우산을 씌워준 적이 없었습니다. (제 얼굴이 무깁니다 ㅠㅠ)
졸업 후, 광주(제 고향)의 모 대학에서 도강을 했는데(학교다닐 때나 열심히 하지), 강의 끝나고 비오는 캠퍼스를 걷고 있자니, 젊은 총각이 우산을 씌워주더만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친절에 너무 고마워서 전화번호 물어볼 뻔했습니다.

미완성 2004-07-05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산을 씌워준 총각.....분명히 진/우맘님께 반해서 그런 걸껍니다...
님의 미모는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서 얼마나 싱싱한 생명력을 발하는 것인지...!
그 총각은 님께 우산을 안겨드리고 싶었으나
옆에 있는 처녀의 주먹이 두려워 꾹 참았을 거예요.
하지만..하지만 하얀 치마는............아, 그걸 제가 봤어야 했는데..!

바람꽃 2004-07-05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너무 잘 잃어버려서 우산 갖고 다닐 엄두를 못낸답니다. 그래서 비오는 날은 안 나가던가, 챙겨줄 사람을 대동하고만 나가지요. 어제도 딸 덕분에 무사히 보낼 수 있었지요.

sooninara 2004-07-05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최후는 아니구만...내우산 주고 올것을..나는 홍대역에서 전철타고 일호선 갈아타고..성대역앞으로 울남편 불러서 자가용타고 친정으로 갔지롱^^ 남편하고 아이들이 친정에서 기다렸거든...
골프우산 커플...행복을 나도 빌어주어야겠네..그리고 ...아무리봐도 귀차니스트라기 보다는 아줌마정신때문이 아닌감? 집에 있는 우산이 몇갠데..돈주고 또 사냐..^^ 나도 그런 생각때문에 우산 살려면 살이 떨려서..

sooninara 2004-07-05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리플 쓰는 5분사이에..다른분들 리플이 줄줄이..역시 인기 서재구만..
그리고..하얀 짧은 치마에 럭셔리셔츠까지..진우맘의 그날 패션은 외간남정네의 가슴을 콩당거리게 할만했구만..(남편이 보면 안될까나?^^)그리고 전지현스타~일의 긴생머리라니..
흑흑..총각 나중에 여친하고 안싸웠을라나 몰러

가을산 2004-07-05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는 안걸리셨나요? ^^
저도 잠간 맞는 것은 우산을 펴지 않고 그냥 맞기도 하는데,
우산 있는데 맞는것과 없이 맞는건 기분이 천지차이일 것 같네요.

다연엉가 2004-07-0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게시리 또 다들 멋진 재회를 했구먼... 난 귀여운 시충이들 입에 먹을 것 넣어주고 있는사이에...으매 부러워라...잉잉잉..
비가 쫙 왔으면 진우밥의 옷이 다 달라붙었을 건데....(억...이 무슨 생각, 난 녀자인디^^)

비가 와도 집에 우산이 있어서 그냥 맞고 오는 나는 지금은 남 눈치 안보고 엄청 용감해졌당께 ㅋㅋㅋㅋ

2004-07-05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4-07-05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것보다 더 창피한 일은 비 맞고 다니다가 미끄러져 넘어졌을때, 그것도 치마입고 벌러덩... 최악이지요. 전 그 담부터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 절대 안 나가요...

파란여우 2004-07-05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삼화고속...신촌에서 놀다가 늦으면 타곤 내려왔던 건데...여행길에서 서울역앞에서도
타고 내려왔던..그 삼화고속..지금은 어째 좋은 차로 좀 교체 되었나 몰라유...그나저나 님도 저처럼 귀차니주의자 이시군요..반갑습니다.^^

마냐 2004-07-0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정말 귀차니스트가 아니라 아줌마 정신이 쫌 더 크지 않았을까..제 경우에 비춰 보건대, 그렇다는 얘깁니다.

진/우맘 2004-07-05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여하간, 수니성님 때문에....아줌마 정신 안 들키려고 그리 애를 썼건만...들켰당.TT
파란여우님> 요즘은 차 좋아요. 냉난방 빵빵하고!
물만두님> 역시...사건사고에 있어서는 만두님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속삭이신분> 별 말씀을!!!
책울성님> 허억....그 정도는 아니었슴다!!!
가을산님> 다행스럽게도 멀쩡합니다.^^
수니성님> 아직 제 실물을 못 보신 분들께....그런 환상 심어 주셨다간 나중에 돌 맞는 수가....잘 들어가셨죠? 전화 할까, 했다가 털님 신경쓰여 그냥 관뒀어요.
바람꽃님> 제가 우산 안 들고다니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겁니다.^^ 꼭 두고 다녀서...
멍든사과님> 저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 보답할 방안을 찾았으니, 몇 분만 기다리셔요!!!
호랑녀님> 물어보시지!!!

ceylontea 2004-07-05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모임의 열기가 남아있어 감기도 비껴갔나 봅니다..

반딧불,, 2004-07-05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전 난데없이..영화의 장면이 떠오를까요?
조인성이랑...손예진이 윗옷 같이 쓰고 달려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