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1
이시다 이라 지음, 김성기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지금으로부터 어언 이십여 년 전, '가요톱텐'을 김완선과 소방차가 지배하던 80년대, 공전의 히트 소설이 있었으니 그 이름 바로 [인간시장]이다. 워낙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아직까지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작가 김홍신에게 부와 명예, 그리고 한나라당 국회의원 자리까지 안겨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지금도 뭐 크게 달라진 건 없겠지만, 80년대 사회가 좀 암울했는가. 각종 사기에 연쇄살인에 범죄조직에 인신매매에 아유, 말도 마라(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꼭 격동의 80년대를 온몸으로 헤쳐나온 사람 같다. 참고로 본인은 86년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음).

 

이렇게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배경으로 은거한 고수에게 무술을 배워 약자를 괴롭히는 철면피들을 두 주먹으로 응징하는 '장총찬'이라는 인물의 활극이 바로 [인간시장]이다. 이 오지랖 넓은 친구가 보여주는 신기의 무술 실력과 다양한 취재를 바탕으로 그려낸 생생한 범죄의 현장, 한 거친 젊은이의 입을 빌어 작가가 푸는 전방위적인 '썰'이 인기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독자들이 가장 좋아한 부분은 장총찬의 연애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영웅은 호색이라고 숱한 여자가 장총찬을 따른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일편단심 다혜뿐. 젊음의 열기로 어떻게든 다혜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싶은 장총찬과 순결주의자 다혜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연애질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실 바로 위에서 장총찬이 일편단심이라고 했지만 굳이 다른 여자와의 잠자리를 피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과 독자의 성적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몸바쳐서 복무했던 것이다(이 시절에는 호기심 넘쳐나는 가련한 남학생들이 볼 만한 시청각 자료가 별로 없었다우).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이야기를 하면서 웬 [인간시장]이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텐데, 두 작품이 매우 비슷한 느낌이라 옛 추억을 잠깐 더듬어보았다. 이 작품의 주인공 마시마 마코토도 장총찬처럼 주먹도 좀 쓰고, 팽팽 돌아가는 머리로 작전을 짜서 악당들의 뒷통수를 치기도 하며, 분방한 성경험을 자랑하는 인물이라 이거다. 물론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마코토는 '쿨'하다는 것이다. 불의한 일들을 보면 완전 마징가처럼 흥분하는 장총찬과는 달리 이케부쿠로의 해결사 마코토는 거리에서 일어나는 온갖 환락과 폭력에 초연하다. 그가 나서는 경우는 단지 이 거리에 야쿠자의 입김이 개입할 때나 연쇄성폭행범이 활개를 칠 때 등이다. 마코토의 생각은 짐작컨대 이런 것 같다. 물론 꼬맹이 시절의 패싸움질이나 술과 신나 등으로 정신 못 차리는 것은 나쁘다. 하지만 어릴 때는 누구나 잘못을 하면서 크는 것이 아닌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한다면 되는 것이다. 다만 그런 거리의 자정작용을 방해하는 불온한 세력(돈과 이권에 개입해 꼬맹이들의 싸움질을 부추기는 야쿠자 등)들은 용서치 못하겠다는 거다.

 

이 작품에는 총 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마코토와 친구들이 활약하는 이케부쿠로 서구 공원(그래서 웨스트 게이트 파크)의 풍경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선명하게 느껴진다. 나오키상 수상작가 이시다 이라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으로 현재 여러 편의 후속작이 출간된 상태이며 드라마화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만화책으로도 출간됐다. 쿨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의 마코토를 제외하고도 조직원 수백 명을 자랑하는 서클 G 보이스의 리더 '얼음황제' 안도 다카시를 비롯해 그를 위협하는 R 에인절스의 '카리스마 댄서' 교이치, 은둔형 외톨이지만 고등학교 동창인 마코토를 돕는 감시 전문가 가즈노리 등 개성적인 인물이 다수 나온다. 엄밀히 말해 미스터리라고는 할 수 없고, 범죄소설로도 그닥 진지함은 없다. 마코토와 조력자들이 힘을 합쳐 이케부쿠로 거리를 지키는 활기차고 역동적인 청춘소설로 보는 게 가장 적당할 듯 싶다. 

 

아마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좋아할 확률이 높은데, 특히 마지막 단편인 <선샤인 거리의 내전>에서 전면전으로 치닫는 두 거대 서클의 일촉즉발의 분위기와 결국 전설적인 두 리더가 맞대결로 승부를 보기까지의 과정은 아마 피끓는 남성들을 혼절 직전으로 몰아갈 것이다. 왜 학교 다닐 때도 누구와 누구가 학교의 패권을 둘러싸고 대결한다, 는 소리만 들리면 우르르 몰려가서 구경가지 않았는가. 남자에게는 아직도 주먹다짐에 목숨을 거는 짐승 같은 면이 남아 있으니까. 이 소설에는 바로 이런 원초적이고 들끓는 열기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김을 빼서 미안한데, 두 리더들은 대결하지 않는다. 거리의 평화를 지키려고 분투하는 마코토의 노력에 감동받고, 계속되는 폭력에 염증을 느낀 두 리더들이 손을 맞잡고 전쟁을 끝내버렸기 때문이다. 대책없이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한 뼘쯤은 자란 아이들의 모습에 흐뭇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거리 아이들의 성장담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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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모중석 스릴러 클럽 6
딘 쿤츠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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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을 보면 등장인물 중 반드시 한 명 이상은 이혼남녀이다. 그 나라에 살지도 않으면서 이런 말 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미국에서 이혼은 흠 잡힐 일이 아닌, 어떻게 보면 잠깐 살아보고 아니면 바로 갈라서는 그런 편의주의적인 발상으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 사회에서 이런 이혼 선호(?) 사상을 약간 달라지게 만든 건 역시 2000년의 9.11테러 사건 이후가 아닐런지. 지금도 기억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당시 희생자 중 남편들이 아내에게 남기는 마지막 사랑의 말이 기사화되어 진정한 결혼과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우리 딸 에미도 정말 사랑해. 우리 딸 에미 잘 돌봐 줘. 당신이 남은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하든 꼭 행복해야 돼. 나는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그 결정을 존중할꺼야. 그리고 그 결정이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할꺼야.
(NBC 보도:유나이티드 에어라인 93기에 타고 있던 승객 제르미 글릭이 추락 직전 부인 리즈베스에게 마지막으로 한 전화내용)


 죽을 걸 알면서도, 또는 죽어 가면서도 한 번 두 번 쉴새없이 불러보고 싶은 아내의 이름. 이런 걸 보면 역시 피는 안 통해도 사랑과 정이 통하는 살붙이가 최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딘 쿤츠의 <남편>은 9.11 이후 누구도 함부로 믿지 못하게 된 미국 사회의 불안증을 가장 작고 소박하지만, 한편으로는 단단하고 소중한 부부 관계로의 회귀를 통해 극복해나갈 것을 역설하는 소설로, 아내를 납치당한 평범한 정원사 밋치가 온갖 어려움과 생명의 위기를 겪어가면서도 아내 홀리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비교적 단선적인 플롯임에도 불구하고 밋치 부부의 사랑과 믿음이 제법 가슴을 울려 모름지기 남편이라면 이 정도는 되야지, 혹은 부부 간의 사랑은 이래야 해 하면서 크게 몰입하며 읽었다. 이 이야기에 이렇게 몰입이 되는 걸 보니 본인도 장가갈 때가 된 모양이긴 한데...

 

딘 쿤츠는 우리에게 낯 익으면서도 낯선 이름이다. 미국에서는 <왓처스> 등의 호러소설을 통해 80-90년대를 통틀어 스티븐 킹의 라이벌로 이름을 떨쳤고, 우리나라에도 제법 많은 수의 작품들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유독 국내에서는 별다른 이유없이 스티븐 킹의 아류 정도의 대접을 받은 것이 사실인데, 조악한 표지에 싸 보이는 모양새로 멋없이 책을 낸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남편>을 포함해 3편 정도의 딘 쿤츠 작품을 읽었는데, 여기서 누구의 우열을 말하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고 간단히 말해 킹은 킹이고 쿤츠는 쿤츠다. 둘 다 훌륭한 작가고 확실한 페이지 터너들이다. 다만 스티븐 킹의 작품은 세부 묘사나 심리 묘사에서 좀더 문학적인 취향이 있고, 딘 쿤츠는 추격이나 모험, 반전 등 정통적인 서스펜스 스릴러의 요소에 더 충실한 것 같다는 이야기만 해둔다.

 

<남편>은 정공법으로 스릴과 서스펜스를 취한다. 사건의 전모는 비교적 초반부에 전부 밝혀지고, 그 뒤로는 밋치가 처한 여러 가지 위기들을 하나씩 타개해나가는 모험담으로 진행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사악한 자의 정체가 밝혀질 때가 제일 놀랍고, 작가 딘 쿤츠가 가장 공들여 묘사한 두 명의 프로 킬러와 사막에서 총 한 자루로 대결하는 장면의 긴장감은 그야말로 훌륭하다. 또한 아내 홀리에게 접근하는 납치범의 사이코적인 행태에도 소름이 끼친다(그 사이코는 어떤 물리적 위해도 가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말로 아내 홀리와 독자를 질리게 만든다). 이런 일에 경험이 전혀 없는 밋치는 계속 꼬여가기만 하는 상황이 거의 악몽처럼 느껴진다. 밋치가 이 악몽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아내의 손을 잡을 수 있을지 끝까지 관심을 잃지 말고 지켜보기 바란다.

 

약간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품에서 끊임없이 남편과 아내, 즉 부부의 사랑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환기시키는 바람에 속도감이 약간 느려진 것과 결말이 약간 시시하다는 것 정도랄까. 유행처럼 번진 반전강박증이나 요동치고 널뛰는 플롯을 배제한 요즘 보기 드문 정통 스릴러라는 것에 주목하면서 책을 읽으면 훨씬 재미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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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9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구입했어요..;;

oldhand 2006-12-29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가갈 때가 된 모양이긴 한데" --> 이것만 눈에 확 들어옵니다. 핫핫.

jedai2000 2006-12-2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군님...재미나게 보시기 바랍니다 ^^

올드핸드님...그러게요 ^^ 좀 있으면 서른인데 슬슬 준비를 해야할 것 같아요 ^^

아영엄마 2006-12-30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제다이님은 아직 서른이 안되셨군요~. - 음음.. 저는 아직 마흔이 안 됐어요. (-.-)>

jedai2000 2006-12-30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스물아홉이 됩니다. ^^ 어이쿠 완전 큰 누님이신걸요 ^^
 
네버랜드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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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유서 깊은 남자 고등학교의 기숙사. 겨울방학을 맞아 북적대던 학생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 적막만이 감돈다. 집에 갈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네 명의 남학생만이 남아 무덤같이 고요한 기숙사를 지킨다. 남고생 네 명이 선생님과 부모님의 감시가 없는 공간에 있으니 탈선의 온상이 될 것은 당연지사. 네 학생은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의 일주일간을 정종과 맥주, 위스키, 담배로 화려하게 불사른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0년이 넘었건만 이 친구들처럼 대놓고 술, 담배를 하지 못하는 본인 같은 사람에게는 그들의 일주일이 정말 꿈과 희망과 환상의 나라가 아닐까. 부러운 녀석들 같으니라구.

 

아무튼 이 네 명은 매일 밤마다 한 명씩 감춰두었던 비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일종의 '칠일야화'라고 봐도 괜찮을 것이다. 텅 빈 기숙사에서는 병으로 죽은 남학생의 유령도 출몰하고, 네 명 중 한 명은 죽은 엄마의 환영에 고통받기도 하며, 다른 한 소년은 빨간 손톱의 여인의 기억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렇듯 작품의 시작은 아주 오싹하다. 어떤 공포소설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음산하다. 비바람이 몹시 치던 날,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와 바람소리, 이리저리 비틀대는 나무들, 검은 하늘을 뚫고 로비에서는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깬다. 서른 번도 넘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온다 리쿠가 공들여 조성한 음산한 분위기에 빨려들어가듯 책장을 넘기고 말았다. 호러에도 일가견이 있는 작가라고 하더니 과연 특출나다.

 

그런데 작가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처음에는 긴박감 넘치는 심리 드라마를 쓰고 싶었는데, 자신의 엉터리 같은 성격으로 인하여 결국 훈훈한 이야기로 매조지되고 말았다고 하더니 정말로 뒤로 갈수록 네 친구의 우정과 마음씀씀이에 깊은 감동을 받고 만다. 도입부의 음산하고 긴박감 넘치는 분위기가 아쉽긴 하지만 역시 <네버랜드>에는 이게 맞는 것 같다. 보석같이 반짝이는 청춘의 떨림과 함께라면 무엇도 해나갈 수 있는 마법 같은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작가 온다 리쿠는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니 혹은 '노스탤지어의 전령사'니 하는 멋부린 칭찬을 듣고 있는데 그녀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문장에 담겨진 아련한 지난 날의 한순간을 보노라면 정말 가슴이 먹먹해져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대청소를 하는 친구들. 그중의 한 명이 회상에 잠긴다. 부모님과 더불어 대청소를 했던 순간을. 청소 도중 우연히 발견하게 된 잊고 있었던 장난감을 만지고 노느라 청소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을 때의 엄마의 불호령. 다시 갈 수도 없고, 다시 느껴볼 수 없는 순간이다. 작가는 도처에서 이런 향수어린 옛 풍경을 꺼내들어 옛날을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독자들의 가슴을 온통 흔들어놓는다. 책장을 덮고 바로 담배 한대를 꺼내물었을 정도로 감정의 진폭이 컸다. 아름답지만 이미 잊고 있었던, 기억할 만한 순간을 속속 우리의 기억에서 불러내는 그녀의 능력은 과연 마법사에 손색이 없겠다.

 

몇 명의 소년소녀(주로 미소녀들이지만)가 합숙을 하며 지난 날의 비밀을 캐는 이야기인 <굽이치는 강가에서>와 네 명의 남자친구들이 같은 과정을 통해 비밀을 털어놓는 <네버랜드>는 상당히 비슷한 느낌이다. 미스터리적인 맛이나 달음질쳐가는 긴박감, 모든 진상이 밝혀질 때의 강렬한 에너지는 <굽이치는 강가에서>가 한 수 위지만, 훈훈하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감동 면에선 <네버랜드>가 더 나은 것 같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읽고 나면 쉬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이미지들을 제공하고 있고, 뛰어난 이야기꾼인 온다 리쿠가 적절히 안배한 이야기들이 촘촘히 묶여져 있다. 온다 리쿠는 아름다운 이야기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있고, 무슨 이야기든 미스터리적인 취향을 가미시키는 걸 잊지 않는다. 기억할 만한 이야기꾼이며 현재 가장 돋보이는 일본작가 중 한 사람이다. 반드시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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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컷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9
최혁곤 지음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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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이후 한참 잊고 있었던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을 우연히 다시 잡게 된 건 2002년도의 일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 뒤로 매년 적어도 100편 이상의 이쪽 장르 책을 읽고 있는데 2006년 현재의 모습을 보면 감개가 무량할 뿐이다. 이제는 하루에도 수 권씩 쏟아져나오는 번역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에 치어 생활이 안 될 정도고, 나를 비롯한 소수의 골수 미스터리 마니아들만이 모여서 토론과 감상을 나누며 정(?)을 돈독히 하던 풍경도 어린 학생들부터 주부, 노인(?)층까지 미스터리가 일반 독자들에게 대폭 확대되면서 더이상 소수의 전유물만은 아니게 되었다. 미스터리 장르가 더 확대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사람으로서 현재의 풍요에 감동을 금할 수 없으나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런 미스터리 활황(?)에 국내 작가들의 기여가 거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아무리 많은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이 쏟아져나오고 인구에 회자되도 그것은 국내 미스터리 작가와는 무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국내 미스터리 작품들은 한정적인 지면에 단편 몇 편만이 간신히 게재되는 수준이고 그 완성도도 거르고 걸러 들어온 외국의 뛰어난 작품들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번역 미스터리의 융성과 창작 미스터리의 몰락이라는 양극화된 현실에서, 높은 수준의 완성도와 신선한 내용으로 창작 미스터리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줄 작품을 기다려온 것은 비단 본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최혁곤 작가의 <B컷>이 비록 그간의 모든 침체를 한 방에 날려줄 천의무봉의 걸작은 아니라지만 자신있게 추천할 만한 만듦새를 보이고 있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기존의 추리문단에서 나왔다는 것이 가장 반갑다. 최혁곤 작가는 김성종 작가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으로 김성종-이상우-백휴 작가 등으로 이어지는 기존 추리문단의 직계라고 볼 수 있다. 침체의 늪에 깊이 빠져 더 이상 그럴듯한 작품을 써낼 능력이 없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심심찮게 들었던 기존 추리문단에서 이 정도 작품을 내놓은 것은 한국 추리작가들의 '실력'을 무시한 독자에 대한 통쾌한 크로스카운터다.

 

그렇다면 <B컷>이 도대체 뭐길래 점잖은(?) 한 미스터리 마니아를 이렇게 흥분시켰는가? 이 작품은 한 마디로 킬러와 전직형사의 대결 구도로 요약된다. 이렇게 보면 정의로운 형사와 임무 수행에 철저한 프로 킬러의 싸움이라는 수백 번도 더 재탕된 닳고 닳은 이야기로 보일 수 있지만 작가는 다양한 에피소드와 집요하게 파고드는 내면 심리 묘사를 통해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전형성의 함정을 피해간다. 무엇보다 여러 영화와 소설을 통해 익숙해진 킬러와 전직 형사의 성격을 뒤바꿔버림으로써 신선함을 주고 있다. 예컨대 킬러는 스물셋의 젊은 여성이다. 일단 성별에서부터 차별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다음 작가는 그녀에게 안타까운 개인사(어머니의 자살과 아버지의 배신으로 외딴 뉴욕 땅에서 고아 처지가 된다)를 깔아둠으로써 동정의 여지를 만든다. 강도까지 당해 전재산을 잃고 피흘리는 부상까지 입게 된 그녀는 중국계 프로 살인청부업자 '명'을 만나고 그에게 의지하게 되며 살인기술을 배우고, 곧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살인을 하는 이유는 명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단 하나 뿐이다.

 

그동안 등장했던 킬러들과는 많이 다른 이 아가씨 킬러와 마찬가지로 흔히 정의의 수호자로 등장하곤 하는 형사의 캐릭터도 매우 새롭다. 전직형사 황재복은 비리를 저질러 형사수첩을 날렸으며, 볼품없는 외모에 축 늘어진 뱃살을 매달고 다니며 말끝마다 쌍욕을 달고 사는 천박한 성품의 소유자다. 질나쁜 마초의 대명사격인 남자로 아내와는 강간(!)을 통해 결혼했으며 그나마도 별거 중이고 어린 딸은 우울증이다. 이 위악적이고 거칠고 추례한 사내가 의문의 의뢰를 받아들여 한국에서 세 명을 살해한 정체불명의 킬러의 뒤를 쫓는다. 정상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친구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이 남자는 끊임없이 비관하며 모든 일에 허무를 느끼는데, 외부의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내면의 성격적 결함으로 파멸을 향해 치달아가는 그리스 비극에 나올 법한 인물이다. 다만 시궁창 버전의 그리스 비극이다.

 

<B컷>은 이 독창적인 두 인물이 짧은 한 꼭지씩 번갈아 등장하며, 쫓고 쫓기면서 서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결하는 스릴러다. 시종일관 흐린 하늘처럼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끝간 데 없이 암울한 두 남녀의 처지와 심리가 가슴을 아프게 할퀸다. 취재의 흔적이 제법 느껴지는 뉴욕, 서울, 대구, 중국 항주를 오가는 스케일은 뻔한 여관방에서 질리도록 죽어나가는 종래의 한국 추리소설과는 궤를 달리하며,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각각 달리는 두 남녀가 맞닥뜨리기까지의 긴장감도 굉장히 좋다. 또한 안정감 있는 문장에 속도감을 겸비하여 지루할 새가 거의 없고, 분량도 알뜰해 늘어지는 부분도 없다. 단지 두 남녀가 대결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한 '맥거핀' 구실만을 할 것이라 예상했던 '텔로미어(뭔지는 책을 읽어보시길)'가 모든 이야기의 진상을 하나로 맞춰줄 열쇠였다는 것도 멋지다고 생각한다. 최후의 최후까지 소소한 반전들이 이어져 끝까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책을 덮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약간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최혁곤 작가가 1970년생 남자다 보니, 스물셋 처녀보다는 실제로 비슷한 또래인 거친 형사를 더 잘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물론 최혁곤 작가가 실제로 황재복 형사 같은 삶을 살아서 더 잘 그리는 것은 아니겠지만...아니라 믿는다). 여성 킬러가 아무래도 남자 형사보다는 생기가 덜하다는 점이 약간 아쉽고, 총격전이 등장하는 작품답지 않게, 그토록 오래 기대감을 조성했던 두 남녀의 격돌 장면이 평범했다는 것도 불만족스럽다. 좀더 폭발적이고 강렬했으면 어땠을까? 작가에게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과 오사와 아리마사의 <독원숭이>를 권해본다. <B컷>은 간단히 말해 무결점은 아니지만 잘 만들어진 스릴러로 수준이 굉장히 높다. 외국의 어떤 스릴러와 비교해도 과히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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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사도의 편지 1 뫼비우스 서재
미셸 브누아 지음, 이혜정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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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사도의 편지>는 종교와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음모를 추적하는 프랑스산 팩션 스릴러다. 이 장르에서 워낙 큰 성공을 거둔 <다빈치 코드>가 있기에 재작년부터 대유행을 타고 있는데, 세상이 하수상하다 보니 사람들이 역사를 액면 그대로 믿지를 못해 그 이면에 무언가 음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팩션 스릴러가 쏟아지는데 어떤 음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빈치 코드>의 성공에 기대려는 음모? 아니면 <다빈치 코드>만은 못한 작품들을 쏟아내 물타기를 하려는 음모? 으음...나까지 음모이론에 빠지고 만 것인가.

 

이 작품을 쓴 작가 미셀 브누아의 이력이 참으로 특이한데 원래 수도원에서 20년간 공부하던 사제란다. 어느날 크게 깨달았는지, 수도원을 뛰쳐나와 가톨릭의 역사와 유래를 파헤치는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일단 이 사람이 수도사 출신인데 현재는 그 길을 걷지 않은 데서 독자들은 야, 이 사람이 뭔가 단단히 믿음에 상처를 입었구나, 그간의 믿음이 흔들릴 대단한 어떤 비밀을 알고 있나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성직자 출신 작가가 수도원을 나오면서까지 쓴 이야기는 어떤 것일지 들여다보자.

 

이 작품은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가 한 꼭지씩 병행된다. 먼저 현재는, 가톨릭에 기반해 발전을 영위해온 서양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만큼 중요한 편지의 비밀을 알자마자 살해된 안드레이 신부가 등장한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제자격인 닐 신부는 안드레이 신부가 남긴 메모를 바탕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결국 진실에 닿게 된다. 다음 과거는 '최후의 만찬' 당일의 이야기부터 중세 성당 기사단까지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스케치한다. 최후의 만찬 당시 예수의 제자는 12명으로 흔히 알고 있지만 이 책에 따르면 가장 사랑받는 제자가 따로 있었단다. 그 13번째 사도는 권력욕으로 점철된 나머지 사도들과는 달리 예수의 참모습을 간직하고 그 진짜 얼굴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한다. 당연히 닐 신부와 13번째 사도는 각각 탄압을 받게 된다.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간의 모든 질서가 송두리째 파괴되고 교회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니까. 온갖 위험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수호하는 과거와 현재의 두 사람이 멋들어지게 겹친다. 이 작품의 최대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미스터리/스릴러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작품이라면 긴박한 위험에서 비롯되는 스릴과 여러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그럴 듯한 추리를 해야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작가 미셀 브누아가 전문적인 스릴러 소설가는 아니다보니 이런 점에서는 많이 아쉽다. 단서는 대부분 우연에 의해 발견되고, 진실의 추적자 닐 신부를 향한 죽은 안드레이 신부의 안배는 너무 완벽해 사실 별로 고생도 하지 않고 대부분의 정보가 닐 신부의 손에 들어온다. 두 명의 킬러를 비롯해 어마어마한 단체들이 닐 신부를 추적하지만, 그는 초반부에 잠깐 생명의 위험을 겪을 뿐 그다지 위급한 상황에 처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인물들의 행동도 지적 두뇌회전을 강조하는 이런 류의 소설에서 필수적인 '그럴싸함'이 빠져 있다. 왜 이 인물이 여기서 이렇게 행동하는 거지, 하는 의문이 계속 피어올라, 논리성과 정합성 면에서도 점수를 줄 수 없다. 사소한 예를 들어보자.

 

"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방안을 서성거리던 그는 사제들이 옷장으로 사용되는 선반 위에 귀한 종이를 올려놓은 뒤 복도로 나갔다. 설마 몇 분 간 자리를 비운 사이 누가 그의 방을 방문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닐은 잰걸음으로 자신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성서학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는 평소 자주 사용하는 첫 번째 서가에서 콥트어-영어 어원학 사전을 찾아냈다. 사전을 들고 <유령>에 기입하자마자 얼른 방으로 돌아왔다. 심장이 심하게 고동쳤다. 그 중요한 종이는 그가 놓았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저녁 예배를 알리는 첫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그는 사전을 책상 위에 놓고 수도복의 안주머니에 복사본을 집어넣은 후 교회로 내려갔다..."

 

이 장면을 보면 그 '귀한 종이'를 처음부터 수도복 안주머니에 넣을 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좋은 방법이 있는데 굳이 떨면서 선반 위에 종이를 올려놓을 필요가 있나. 사소한 것이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면 집중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팩션 스릴러로서 치밀함과 긴장감이 상당히 부족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알려지지 않은 종교사를 많이 공부한 사람답게 과거의 이야기는 몰입감이 제법이다. 야심가 베드로와 가련한 유다, 성인에 가까운 13번째 사도 등 인물의 면면은 기존 역사와 상당히 다르면서도 웬지 그럴 법하다는 믿음을 주며, 그 말 많고 탈 많은 13번째 사도의 편지가 로마와 마호메트, 성당 기사단 시대를 거쳐 이스라엘 전쟁의 와중에서 바티칸으로 흘러가는 과정은 드라마틱하기 이를 데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 묘사된 현대 바티칸의 높은 사제들이 자행하는 온갖 악행에 대한 묘사도 좋았다. 2000년 넘게 교회의 수장으로 자리하면서 얻은 부와 권력, 그걸 놓치고 싶지 않은 건 인지상정이겠기에 계략과 폭력을 앞세워 진실을 묻어두는 그들의 모습은 제법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마디로 이 작품은 짜릿한 팩션 스릴러로서는 실격이지만, 흥미로운 역사 종교소설 혹은 종교 비판소설로는 어느 정도 성취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취향에 따라 잡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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