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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ㅣ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1
이시다 이라 지음, 김성기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지금으로부터 어언 이십여 년 전, '가요톱텐'을 김완선과 소방차가 지배하던 80년대, 공전의 히트 소설이 있었으니 그 이름 바로 [인간시장]이다. 워낙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아직까지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작가 김홍신에게 부와 명예, 그리고 한나라당 국회의원 자리까지 안겨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지금도 뭐 크게 달라진 건 없겠지만, 80년대 사회가 좀 암울했는가. 각종 사기에 연쇄살인에 범죄조직에 인신매매에 아유, 말도 마라(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꼭 격동의 80년대를 온몸으로 헤쳐나온 사람 같다. 참고로 본인은 86년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음).
이렇게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배경으로 은거한 고수에게 무술을 배워 약자를 괴롭히는 철면피들을 두 주먹으로 응징하는 '장총찬'이라는 인물의 활극이 바로 [인간시장]이다. 이 오지랖 넓은 친구가 보여주는 신기의 무술 실력과 다양한 취재를 바탕으로 그려낸 생생한 범죄의 현장, 한 거친 젊은이의 입을 빌어 작가가 푸는 전방위적인 '썰'이 인기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독자들이 가장 좋아한 부분은 장총찬의 연애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영웅은 호색이라고 숱한 여자가 장총찬을 따른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일편단심 다혜뿐. 젊음의 열기로 어떻게든 다혜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싶은 장총찬과 순결주의자 다혜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연애질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실 바로 위에서 장총찬이 일편단심이라고 했지만 굳이 다른 여자와의 잠자리를 피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과 독자의 성적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몸바쳐서 복무했던 것이다(이 시절에는 호기심 넘쳐나는 가련한 남학생들이 볼 만한 시청각 자료가 별로 없었다우).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이야기를 하면서 웬 [인간시장]이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텐데, 두 작품이 매우 비슷한 느낌이라 옛 추억을 잠깐 더듬어보았다. 이 작품의 주인공 마시마 마코토도 장총찬처럼 주먹도 좀 쓰고, 팽팽 돌아가는 머리로 작전을 짜서 악당들의 뒷통수를 치기도 하며, 분방한 성경험을 자랑하는 인물이라 이거다. 물론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마코토는 '쿨'하다는 것이다. 불의한 일들을 보면 완전 마징가처럼 흥분하는 장총찬과는 달리 이케부쿠로의 해결사 마코토는 거리에서 일어나는 온갖 환락과 폭력에 초연하다. 그가 나서는 경우는 단지 이 거리에 야쿠자의 입김이 개입할 때나 연쇄성폭행범이 활개를 칠 때 등이다. 마코토의 생각은 짐작컨대 이런 것 같다. 물론 꼬맹이 시절의 패싸움질이나 술과 신나 등으로 정신 못 차리는 것은 나쁘다. 하지만 어릴 때는 누구나 잘못을 하면서 크는 것이 아닌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한다면 되는 것이다. 다만 그런 거리의 자정작용을 방해하는 불온한 세력(돈과 이권에 개입해 꼬맹이들의 싸움질을 부추기는 야쿠자 등)들은 용서치 못하겠다는 거다.
이 작품에는 총 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마코토와 친구들이 활약하는 이케부쿠로 서구 공원(그래서 웨스트 게이트 파크)의 풍경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선명하게 느껴진다. 나오키상 수상작가 이시다 이라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으로 현재 여러 편의 후속작이 출간된 상태이며 드라마화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만화책으로도 출간됐다. 쿨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의 마코토를 제외하고도 조직원 수백 명을 자랑하는 서클 G 보이스의 리더 '얼음황제' 안도 다카시를 비롯해 그를 위협하는 R 에인절스의 '카리스마 댄서' 교이치, 은둔형 외톨이지만 고등학교 동창인 마코토를 돕는 감시 전문가 가즈노리 등 개성적인 인물이 다수 나온다. 엄밀히 말해 미스터리라고는 할 수 없고, 범죄소설로도 그닥 진지함은 없다. 마코토와 조력자들이 힘을 합쳐 이케부쿠로 거리를 지키는 활기차고 역동적인 청춘소설로 보는 게 가장 적당할 듯 싶다.
아마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좋아할 확률이 높은데, 특히 마지막 단편인 <선샤인 거리의 내전>에서 전면전으로 치닫는 두 거대 서클의 일촉즉발의 분위기와 결국 전설적인 두 리더가 맞대결로 승부를 보기까지의 과정은 아마 피끓는 남성들을 혼절 직전으로 몰아갈 것이다. 왜 학교 다닐 때도 누구와 누구가 학교의 패권을 둘러싸고 대결한다, 는 소리만 들리면 우르르 몰려가서 구경가지 않았는가. 남자에게는 아직도 주먹다짐에 목숨을 거는 짐승 같은 면이 남아 있으니까. 이 소설에는 바로 이런 원초적이고 들끓는 열기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김을 빼서 미안한데, 두 리더들은 대결하지 않는다. 거리의 평화를 지키려고 분투하는 마코토의 노력에 감동받고, 계속되는 폭력에 염증을 느낀 두 리더들이 손을 맞잡고 전쟁을 끝내버렸기 때문이다. 대책없이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한 뼘쯤은 자란 아이들의 모습에 흐뭇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거리 아이들의 성장담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