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컷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9
최혁곤 지음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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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이후 한참 잊고 있었던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을 우연히 다시 잡게 된 건 2002년도의 일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 뒤로 매년 적어도 100편 이상의 이쪽 장르 책을 읽고 있는데 2006년 현재의 모습을 보면 감개가 무량할 뿐이다. 이제는 하루에도 수 권씩 쏟아져나오는 번역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에 치어 생활이 안 될 정도고, 나를 비롯한 소수의 골수 미스터리 마니아들만이 모여서 토론과 감상을 나누며 정(?)을 돈독히 하던 풍경도 어린 학생들부터 주부, 노인(?)층까지 미스터리가 일반 독자들에게 대폭 확대되면서 더이상 소수의 전유물만은 아니게 되었다. 미스터리 장르가 더 확대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사람으로서 현재의 풍요에 감동을 금할 수 없으나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런 미스터리 활황(?)에 국내 작가들의 기여가 거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아무리 많은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이 쏟아져나오고 인구에 회자되도 그것은 국내 미스터리 작가와는 무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국내 미스터리 작품들은 한정적인 지면에 단편 몇 편만이 간신히 게재되는 수준이고 그 완성도도 거르고 걸러 들어온 외국의 뛰어난 작품들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번역 미스터리의 융성과 창작 미스터리의 몰락이라는 양극화된 현실에서, 높은 수준의 완성도와 신선한 내용으로 창작 미스터리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줄 작품을 기다려온 것은 비단 본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최혁곤 작가의 <B컷>이 비록 그간의 모든 침체를 한 방에 날려줄 천의무봉의 걸작은 아니라지만 자신있게 추천할 만한 만듦새를 보이고 있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기존의 추리문단에서 나왔다는 것이 가장 반갑다. 최혁곤 작가는 김성종 작가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으로 김성종-이상우-백휴 작가 등으로 이어지는 기존 추리문단의 직계라고 볼 수 있다. 침체의 늪에 깊이 빠져 더 이상 그럴듯한 작품을 써낼 능력이 없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심심찮게 들었던 기존 추리문단에서 이 정도 작품을 내놓은 것은 한국 추리작가들의 '실력'을 무시한 독자에 대한 통쾌한 크로스카운터다.

 

그렇다면 <B컷>이 도대체 뭐길래 점잖은(?) 한 미스터리 마니아를 이렇게 흥분시켰는가? 이 작품은 한 마디로 킬러와 전직형사의 대결 구도로 요약된다. 이렇게 보면 정의로운 형사와 임무 수행에 철저한 프로 킬러의 싸움이라는 수백 번도 더 재탕된 닳고 닳은 이야기로 보일 수 있지만 작가는 다양한 에피소드와 집요하게 파고드는 내면 심리 묘사를 통해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전형성의 함정을 피해간다. 무엇보다 여러 영화와 소설을 통해 익숙해진 킬러와 전직 형사의 성격을 뒤바꿔버림으로써 신선함을 주고 있다. 예컨대 킬러는 스물셋의 젊은 여성이다. 일단 성별에서부터 차별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다음 작가는 그녀에게 안타까운 개인사(어머니의 자살과 아버지의 배신으로 외딴 뉴욕 땅에서 고아 처지가 된다)를 깔아둠으로써 동정의 여지를 만든다. 강도까지 당해 전재산을 잃고 피흘리는 부상까지 입게 된 그녀는 중국계 프로 살인청부업자 '명'을 만나고 그에게 의지하게 되며 살인기술을 배우고, 곧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살인을 하는 이유는 명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단 하나 뿐이다.

 

그동안 등장했던 킬러들과는 많이 다른 이 아가씨 킬러와 마찬가지로 흔히 정의의 수호자로 등장하곤 하는 형사의 캐릭터도 매우 새롭다. 전직형사 황재복은 비리를 저질러 형사수첩을 날렸으며, 볼품없는 외모에 축 늘어진 뱃살을 매달고 다니며 말끝마다 쌍욕을 달고 사는 천박한 성품의 소유자다. 질나쁜 마초의 대명사격인 남자로 아내와는 강간(!)을 통해 결혼했으며 그나마도 별거 중이고 어린 딸은 우울증이다. 이 위악적이고 거칠고 추례한 사내가 의문의 의뢰를 받아들여 한국에서 세 명을 살해한 정체불명의 킬러의 뒤를 쫓는다. 정상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친구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이 남자는 끊임없이 비관하며 모든 일에 허무를 느끼는데, 외부의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내면의 성격적 결함으로 파멸을 향해 치달아가는 그리스 비극에 나올 법한 인물이다. 다만 시궁창 버전의 그리스 비극이다.

 

<B컷>은 이 독창적인 두 인물이 짧은 한 꼭지씩 번갈아 등장하며, 쫓고 쫓기면서 서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결하는 스릴러다. 시종일관 흐린 하늘처럼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 끝간 데 없이 암울한 두 남녀의 처지와 심리가 가슴을 아프게 할퀸다. 취재의 흔적이 제법 느껴지는 뉴욕, 서울, 대구, 중국 항주를 오가는 스케일은 뻔한 여관방에서 질리도록 죽어나가는 종래의 한국 추리소설과는 궤를 달리하며,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각각 달리는 두 남녀가 맞닥뜨리기까지의 긴장감도 굉장히 좋다. 또한 안정감 있는 문장에 속도감을 겸비하여 지루할 새가 거의 없고, 분량도 알뜰해 늘어지는 부분도 없다. 단지 두 남녀가 대결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한 '맥거핀' 구실만을 할 것이라 예상했던 '텔로미어(뭔지는 책을 읽어보시길)'가 모든 이야기의 진상을 하나로 맞춰줄 열쇠였다는 것도 멋지다고 생각한다. 최후의 최후까지 소소한 반전들이 이어져 끝까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책을 덮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약간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무래도 최혁곤 작가가 1970년생 남자다 보니, 스물셋 처녀보다는 실제로 비슷한 또래인 거친 형사를 더 잘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물론 최혁곤 작가가 실제로 황재복 형사 같은 삶을 살아서 더 잘 그리는 것은 아니겠지만...아니라 믿는다). 여성 킬러가 아무래도 남자 형사보다는 생기가 덜하다는 점이 약간 아쉽고, 총격전이 등장하는 작품답지 않게, 그토록 오래 기대감을 조성했던 두 남녀의 격돌 장면이 평범했다는 것도 불만족스럽다. 좀더 폭발적이고 강렬했으면 어땠을까? 작가에게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과 오사와 아리마사의 <독원숭이>를 권해본다. <B컷>은 간단히 말해 무결점은 아니지만 잘 만들어진 스릴러로 수준이 굉장히 높다. 외국의 어떤 스릴러와 비교해도 과히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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