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랜드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유서 깊은 남자 고등학교의 기숙사. 겨울방학을 맞아 북적대던 학생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 적막만이 감돈다. 집에 갈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네 명의 남학생만이 남아 무덤같이 고요한 기숙사를 지킨다. 남고생 네 명이 선생님과 부모님의 감시가 없는 공간에 있으니 탈선의 온상이 될 것은 당연지사. 네 학생은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의 일주일간을 정종과 맥주, 위스키, 담배로 화려하게 불사른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0년이 넘었건만 이 친구들처럼 대놓고 술, 담배를 하지 못하는 본인 같은 사람에게는 그들의 일주일이 정말 꿈과 희망과 환상의 나라가 아닐까. 부러운 녀석들 같으니라구.

 

아무튼 이 네 명은 매일 밤마다 한 명씩 감춰두었던 비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일종의 '칠일야화'라고 봐도 괜찮을 것이다. 텅 빈 기숙사에서는 병으로 죽은 남학생의 유령도 출몰하고, 네 명 중 한 명은 죽은 엄마의 환영에 고통받기도 하며, 다른 한 소년은 빨간 손톱의 여인의 기억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렇듯 작품의 시작은 아주 오싹하다. 어떤 공포소설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음산하다. 비바람이 몹시 치던 날,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와 바람소리, 이리저리 비틀대는 나무들, 검은 하늘을 뚫고 로비에서는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깬다. 서른 번도 넘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온다 리쿠가 공들여 조성한 음산한 분위기에 빨려들어가듯 책장을 넘기고 말았다. 호러에도 일가견이 있는 작가라고 하더니 과연 특출나다.

 

그런데 작가후기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처음에는 긴박감 넘치는 심리 드라마를 쓰고 싶었는데, 자신의 엉터리 같은 성격으로 인하여 결국 훈훈한 이야기로 매조지되고 말았다고 하더니 정말로 뒤로 갈수록 네 친구의 우정과 마음씀씀이에 깊은 감동을 받고 만다. 도입부의 음산하고 긴박감 넘치는 분위기가 아쉽긴 하지만 역시 <네버랜드>에는 이게 맞는 것 같다. 보석같이 반짝이는 청춘의 떨림과 함께라면 무엇도 해나갈 수 있는 마법 같은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작가 온다 리쿠는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니 혹은 '노스탤지어의 전령사'니 하는 멋부린 칭찬을 듣고 있는데 그녀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문장에 담겨진 아련한 지난 날의 한순간을 보노라면 정말 가슴이 먹먹해져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대청소를 하는 친구들. 그중의 한 명이 회상에 잠긴다. 부모님과 더불어 대청소를 했던 순간을. 청소 도중 우연히 발견하게 된 잊고 있었던 장난감을 만지고 노느라 청소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을 때의 엄마의 불호령. 다시 갈 수도 없고, 다시 느껴볼 수 없는 순간이다. 작가는 도처에서 이런 향수어린 옛 풍경을 꺼내들어 옛날을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독자들의 가슴을 온통 흔들어놓는다. 책장을 덮고 바로 담배 한대를 꺼내물었을 정도로 감정의 진폭이 컸다. 아름답지만 이미 잊고 있었던, 기억할 만한 순간을 속속 우리의 기억에서 불러내는 그녀의 능력은 과연 마법사에 손색이 없겠다.

 

몇 명의 소년소녀(주로 미소녀들이지만)가 합숙을 하며 지난 날의 비밀을 캐는 이야기인 <굽이치는 강가에서>와 네 명의 남자친구들이 같은 과정을 통해 비밀을 털어놓는 <네버랜드>는 상당히 비슷한 느낌이다. 미스터리적인 맛이나 달음질쳐가는 긴박감, 모든 진상이 밝혀질 때의 강렬한 에너지는 <굽이치는 강가에서>가 한 수 위지만, 훈훈하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감동 면에선 <네버랜드>가 더 나은 것 같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읽고 나면 쉬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이미지들을 제공하고 있고, 뛰어난 이야기꾼인 온다 리쿠가 적절히 안배한 이야기들이 촘촘히 묶여져 있다. 온다 리쿠는 아름다운 이야기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있고, 무슨 이야기든 미스터리적인 취향을 가미시키는 걸 잊지 않는다. 기억할 만한 이야기꾼이며 현재 가장 돋보이는 일본작가 중 한 사람이다. 반드시 읽어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