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조국
로버트 해리스 지음, 김홍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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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지껏 지구 상에 존재했던 무수한 인물 중에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고, 입에 올리기조차 웬지 혐오스러운 그런 사람은 누가 있을까. 후보(?)는 여러 명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일이 등을 다툴 이름은 아마도 아돌프 히틀러가 아닐까 싶다. 2차대전의 원흉으로 수천만의 생명을 앗아가고, 그 와중에 죄없는 수백만의 유태인까지 학살한 히틀러라면 과연 불쾌감을 절로 자아내는 역사 속의 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다들 알다시피 히틀러는 독일의 패전이 거의 확실시된 1945년 4월 30일에 벙커에서 애인과 함께 권총자살했다.

 

<당신들의 조국>은 2차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하고, 히틀러가 아직도 살아남아 철권 통치를 하고 있다면? 이라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된다. 아직까지도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는 민간인들, 참전용사들, 유태인 피해자들이 생존해 지난 날의 악몽을 떠올리는 마당에 참으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 로버트 해리스는 이런 기발한 뼈대 위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제3제국에 튼튼한 살을 붙여 한 편의 인상적인 가상 역사소설을 창조해내었다. 일단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흥미로운데 더해 디테일까지 세심하니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간만에 진지하게 몰입해서 볼 만한 좋은 소설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가상 역사소설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만, 어둡고 암울한 사회를, 한 고독한 인물이 누비며 숨겨진 진실을 찾는 한 편의 느와르 소설로도 가치가 있다. 느와르 소설이란 전후에 주로 나타난 문예 사조로 전후의 혼탁하고 어두운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비정하고 냉혹한 인물들의 범죄를 주로 그린다. 이 작품에서의 독일 제국은 1964년 현재도 전시 체제로 시민의 자유는 억압된 채 전체주의의 이념 아래서 살아간다. 곳곳에 게슈타포의 감시의 눈이 번뜩이고 있으며, 모든 정보는 통제되고 있다. 여전히 전쟁 중인 독일 제국에서 발견된 한 구의 시체에서 나아가 제국의 실권자들이 연루된 거대한 음모가 밝혀지는 이 작품은 우수에 찬 주인공의 상념과 대사, 기계처럼 냉정하게 묘사되는 폭력 장면, 우울한 결말까지 완벽한 느와르 소설임을 증명한다.

 

주인공 크사비어 마르크는 고독한 인물이다. 왜냐면 그는 모두 깊이 잠들어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깨어 있기 때문이다. 전 유럽을 거의 병탄하다시피 한 독일 제국의 번영 속에 무언가 음험한 악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그는 전체주의 치하에서 꼭두각시가 되어야만 하는 소시민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다. 열렬한 나치주의자인 아내는 그런 그를 못마땅해 하며 이혼했고, 열 살이지만 하겐크로이츠가 새겨진 칼을 애지중지하는 아들 필리는 소년 나치친위대로 아빠가 다른 친구 아빠들처럼 나치당의 활동에 열광하지 않고 미온적인 것이 불만족스럽기만 하다. 독일이라는 국가와 국민 속에 잠복해 있는 악을 본능적인 후각으로 감지하고 있는 그는 가족들에게도 버림받고, 일터인 경찰계에서도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도입부에서 크사비어 마르크는 새벽에 동료 대신 호숫가에서 발견된 노인의 시체를 조사하다 그가 전직 나치의 고위 간부임을 알게 된다. 이 장면은 시종일관 내리는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데, 독일 사회의 축축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비로 상징해 표현하는, 한마디로 끝내주는 분위기다. 요즘은 이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글을 쓰는 작가를 좀처럼 만나볼 수 없어, 더욱 인상적이었다. 마르크는 노인의 주변을 맴돌다 제2, 제3의 피해자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우연히 알게 된 미국 기자 샬롯과 함께 그는 진실을 찾는 긴 여정을 시작하고, 결국 독일 제국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했던 비밀과 대면하게 된다.  

 

결말에서 스파이소설의 걸작,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가 연상되는 작품으로 픽션의 한계를 넘어 유명한 반제 회의 등 역사적인 사실을 충분히 담아냄으로써 여러모로 묵직하고 진지한 소설로 완성되었다. 이외에도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영미권에서 리버풀 출신의 정신 나간 밴드가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든가,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이든가 하는 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역사를 살짝 비튼 재기 넘치는 장면들도 잔재미를 준다. 무겁고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지배적인 소설이라 가벼움을 선호하는 요즘 독자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진지하게 곱씹어볼 만한 소설을 찾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물론 미스터리나 느와르, 스파이소설로서의 재미도 빠지진 않는다. 개인적으로 한 편의 소설을 볼 때 장점 하나를 찾으면 단점도 하나 지적하는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버릇이 있는데, 솔직히 단점을 찾기가 거의 힘든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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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2-15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간 진부한 면이 없지 않은데 그것마저 매력으로 보이니 정말 좋은 작가를 만났습니다^^

jedai2000 2007-02-15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대에 유행했던 장르소설의 요소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 약간 상투적이지만, 매력적으로 배합해냈다고 생각합니다. ^^

bongbong 2007-08-10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부분은 감동 그 자체임다... 한편의 영화를 본듯한 느낌..눈물쬐끔 나려하네요ㅠㅠ

jedai2000 2007-08-10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감동적이죠. 이 작가의 <이니그마>는 아직 못 봤는데 어서 봐야겠어요. <시티즌 빈스>라는 작품도 새디님에게 잘 맞을 것 같은데 추천드립니다. 꼭 읽어보세요 ^^

bongbong 2007-08-10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 보았어요...
애드가상 수상작이라 무지 기대하면성^^
자극적 소설에 기들여진 탓에 첫부분은 몸에 받지 않는 음식을 먹는듯한 기분이었는데..
책장을 다 넘기고 하면 그 특별한 감동은 읽어본 사람만이 느끼게 되겠죠^^권하고 싶은 책이예요~~


jedai2000 2007-08-10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덧글이 두 개 올라갔네요 ^^

새디님은 정말 저랑 취향도 비슷하고 읽은 책도 비슷하군요. 이제는 약간 놀라울 정도네요 ^^ 저도 아주 특별한 감동을 느꼈던 책이라 소개드린 건데 뭐 이미 보셨다니 ^^ 다음에도 좋은 책을 발견하면 꼭 알려드릴게요 ^^

bongbong 2007-08-10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알려주세요~~^^

jedai2000 2007-08-11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기대하세요 ^^
 
누군가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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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무리 성공한 작가라도, 기존의 성공작들을 답습하며 진화를 꿈꾸지 않는다면 그순간 그는 이미 문학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다 할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같이 성공에 성공을 열 번쯤 더한 작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그간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이 면모를 일신하려 노력하는 미야베 미유키의 야심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도저히 소설의 주인공으로 쓸 수 없을 듯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편집자 스기무라 사부로는 다행히(?) 재벌의 딸과 결혼함으로서 어느 정도 특별한 설정을 부여받는다. 물론 재벌의 딸이라지만 첩 소생이라 어마어마한 돈벼락을 맞거나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또래 친구들보다는 훨씬 넉넉한 살림이다. 장인의 회사인 이마다 콘체른의 사보 <아오조라(궁금해서 찾아봤는데 푸른 하늘이라는 뜻)>에서 장기를 살려 취재기자 및 편집자로 일하는 스기무라. 어느 날 하늘 같은 장인으로부터 뜻밖의 명령이 떨어진다.

 

장인의 운전기사였던 가지타 씨가 자전거에 치어 사망했는데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단다. 자전거에 부딪혀 어떻게 사람이 죽냐고 묻지는 마시길. 요즘 자전거 얼마나 좋고 빠른지 다 알지 않나. 가지타 씨의 인생을 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두 딸을 만나 편집자로서 이야기를 들어주라는 장인의 명령을 받들어 그녀들과 대면한 스기무라는 어딘지 불안한 기색이 감돌고 있는 언니 사토미로부터 숨겨진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다. 친근하고 편안한 인상의 가지타 씨에게는 어떤 말 못할 비밀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사토미가 4살 때 유괴된 적이 있었다는. 아마도 아빠의 죽음은 옛날의 원한을 갚기 위한 계획살인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토미다. 평범한 교통사고(?)일 줄 알았던 가지타 씨 사건에 웅크리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미야베 미유키의 첫번째 야심은 미스터리와 일상성의 결합이다. <누군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매일 아침 출근길에서 마주칠 수 있을 듯한 평범한 인물들이다. 애처가이자 네살배기 딸을 목숨보다 사랑하는 스기야마나 지난 날의 야심은 묻어두고 평온하고 안락하게 늙어간 가지타 씨 등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현실감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물론 스기야마의 처가인 이마다 가문은 재벌가이기에 어느 정도는 우리 현실과 괴리가 있겠지만, 이마다 회장 역시 몸이 약한 딸을 애지중지하는 등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는 미스터리의 비중 만큼이나 스기야마의 애처 행각을 비롯한 '가족간의 관계'에도 골고루 시선을 배분한다.

 

이렇게 평범한 인물들이 등장하니만큼 다루는 사건도 비교적 일상적이다. 자동차도 아니고 평범한 우리네 삶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자전거 사고라니 그야말로 일상의 냄새가 팍팍 나는 상징적인 설정이다. 사건을 조사하는 스기야마의 방법 역시 굉장히 현실적인데 별다른 조사 수단이 없는 그는 사고 현장에서 전단지를 만들어 돌린다거나 가지타 씨가 오래전 일했던 완구 회사의 사장을 찾아가 가지타 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묻는다든가 할 뿐이다. 사장 할아버지에게 좋았던 옛 시절 이야기를 듣다가 물색없이 할아버지의 지나온 인생에 감동받기도 하는 스기무라는 정말 귀여운 남자다(사실 완구 회사 사장 할아버지가 나오는 장면은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빼어나다).

 

이렇듯 소박한 사건을 소박하게 풀어가는 미스터리다 보니 결말에 이르러 약간 섭섭하기도 한데, 이 작품의 지향점이 결국 우리 삶속에서의 작은 미스터리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만약 스기무라가 아닌 민완형사나 경찰과 끈이 닿아 있는 정보빠른 탐정이라면 아마 이틀이면 풀 수 있는 사건이니까. 다만 이 책은 누가 범인인가, 어떻게 죽였는가가 중요한 작품은 아니니 미리부터 실망하지 말길 바란다. 비록 짜릿한 두뇌 회전을 시켜주지는 않지만, 스산하면서도 애잔한 결말에 책장을 다 덮고도 깊은 감흥이 남을 것임을 보증할 수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또다른 야심은 탐정 캐릭터의 창조다. 흔히 미야베 미유키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계승자로 알려져 있는데, 사회 현실의 부조리를 추리소설의 틀에 담아내 냉정히 관찰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은 그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감이 필수다. 따라서 보통 사람은 평생에  만날까말까한 살인 사건을 철마다 만나는 명탐정 캐릭터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나마 사건과 접할 기회가 많은 형사나 기자가 주인공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미야베 미유키의 그 무수한 미스터리를 통틀어도 우리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는 탐정 캐릭터는 없다. 짐작컨대 그녀는 자신만의 포와로를 만들어낼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스기야마 사부로, 이 평범한 남자가 바로 미야베 미유키가 작심하고 키우는 탐정 역으로 영광스럽게 낙점된 인물이다. 이미 스기야마 탐정! 제2탄 <이름없는 독>이 일본에서 출간되고 전작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았다니, 미야베 미유키는 또 한 번 성공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국내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 작품은 대부분 본 셈인데, <누군가>에 이르러 좀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예전처럼 멋부린 비유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편하게 읽히는 문장을 쓴다. 그래서 별 사건이 없어도 쭈욱 읽힌다. 작가의 작품 목록에서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과 가장 비일상적인 미스터리를 결합하고, 그간 시도하지 않았던 시리즈 탐정 캐릭터를 선보인 이번 작품에서는 소박한 외양에 감춰진 작가의 야심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런 모든 시도들이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보기에 별은 네 개 반을 주지만 <이름없는 독>에서 다섯 개가 채워질 수 있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p.s/ 보잘 것 없는 글을 참으로 길게 썼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간단하게 요약했다. 역시 작가의 힘이란 이런 것 같다.

 

인생에 부족함이 없거나, 또는 행복한 삶을 사는 탐정은 미스터리의 세계에는 무척 드문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평범하고 이렇다 할 장점도 없지만 일상생활은 안정되어 있고 포근한 행복 속에 사는 탐정. 이 작품은 그런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그 결과 그가 추적하는 사건은 아주 사소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 사소함 속에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 미야베 미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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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hand 2007-02-09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라인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작품임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소재와 내용을 이렇게 소화해 내는건 역시 미야베 미유키의 힘이겠지요. 만약에 비슷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기리노 나츠오가 작품을 썼다면? 하는 생각을 했더니 문득 <그로테스크>가. 하하하.
'스기야마의 애처행각'이라는 문구를 보니 제다이님의 '서지혜에 대한 사모행각'이 아울러 머리에 떠오르는군요. 하핫. =3=3=3

jedai2000 2007-02-10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작가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보니 <그로테스크>랑 사실 거의 같은 주제라는 생각이...물론 강도는 전혀 다르지만요 ^^
미야베 미유키가 특유의 선의의 결말을 내지 않고, 질투와 라이벌 의식이라는 악의를 결말로 택했다는 건 약간 놀랍더군요.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소설인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모행각'이라뇨 ㅋㅋ '스토커행각'이죠 ^^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1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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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대중문화계에 의사나 병원을 둘러싼 이야기가 열풍입니다. 한국 대중문화계의 최대 생산자인 드라마로는 <외과의사 봉달희>도 있고, 전설적인 일본 소설을 리메이크한 <하얀 거탑>도 있네요. 넓게 보면 미국 드라마로는 아주 오래된 <이알ER>도 있고, 한 번도 보지는 못 했지만 <하우스>니 <그레이 아나토미>니 하는 작품들도 높은 인기를 끌고 있구요. 일본 만화책으로는 <닥터 노구치>나 <닥터 코토 진료소> <블랙 잭>, 소설로는 예전에 많은 인기를 끌었던 로빈 쿡 류의 메디컬 스릴러나 <닥터 지바고> <닥터스> <공중그네> 등등도 두서없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병원과 의사 이야기는 왜 이렇게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무래도 병원이라는 공간이 생명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곳이다보니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서겠죠. 자신의 모든 역량과 의지를 걸고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는 감동적인 인술을 그릴 수도 있겠고, 개인적인 영달과 이득을 위해 부정한 일을 꾀하는 병원 내부자의 음모를 파헤치는 스릴러로 만들 수도 있고, 고도로 전문화된 의술을 가진 전문가 집단 내부에서 싹트는 사랑 이야기로 꾸밀 수도 있겠습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거의 24시간 내내 집단으로 거주하며 합법적으로 사람 몸에 칼을 대며 피를 보는 비일상적인 병원이라는 공간과 의사라는 집단은 이야기 만드는 사람에게는 이만큼 활용폭이 넓은 소재가 또 없습니다.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은 메디컬 미스터리라고 할까요. 수술 중에 벌어진 원인 불명의 연쇄 사망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입니다. 제목에 나오는 '바티스타 수술'은 질병으로 비대해진 심장을 일정 부분 도려내어 변성된 부분을 제거하고 제 기능을 수행하게 만드는 높은 의학 수준이 필요한 수술입니다. 도조대학 의학부의 에이스 기류와 그가 직접 선정한 6명의 보조자들은 영광스럽게도 '글로리어스 세븐'이라 불리며 26회 연속 바티스타 수술 성공의 위업을 달성합니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수치죠. 그런데 최근 세 차례 원인 불명의 연속 수술 실패로 3명의 환자가 사망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단순한 불운, 혹은 의료 사고, 아니면 누군가의 악의가 개입된 연쇄살인? 비교적 현명한 병원장은 대학병원 내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한량 신경내과 의사 다구치에게 조사를 의뢰합니다. 이 다구치 선생은 피보기가 두려워 내과를 지망했고, 공부와는 담을 쌓은 사람인지라 졸업도 간신히 하고 지금은 '부정수호외래'라는 한직에서, 불평꾼 환자들이 병원에서 쌓인 불만을 털어놓는 걸 들어주며 소일합니다. 남들 위에 서고 싶은 생각도, 별다른 의학적 야심도 없는 그냥 하루하루 때우면 장땡인 사람인데 어쩌다 이런 큰 임무를...다구치 선생처럼 살고 싶은 제가 다 안타까워집니다.

 

조사 중에도 살인은 계속되며 다구치 선생의 힘으로는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후생노동성의 공무원(이자 의사 면허증이 있는) 시라토리가 파견됩니다. 홈즈였던 다구치는 사실 왓슨이었고, 진짜 홈즈역은 시라토리였던 것입니다. 이 시라토리는 홈즈 못지않은 괴짜로 말도 안 되는 논리와 어거지, 우기기 대왕으로 다구치와 바티스타 팀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별명은 로지컬 몬스터랍니다. 제 보기엔 전혀 논리적이지 않던걸요. 하지만 시라토리는 바티스타 팀 외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던 수술실(밀실) 살인의 이미 범인을 알고 있다며 자신만만하니 묘한 노릇이죠?

 

전체적으로 상쾌하고 시원한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소설입니다. 작가 가이도 다케루는 제4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상'에 동작품으로 만장일치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는데, 참고로 제1회 대상작은 국내 출간된 <4일간의 기적>입니다. 작가는 출신 학교, 배경 등이 모두 베일에 가려져 있는데, 현직 의사랍니다.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도 작가가 현직 의사다 보니 대학병원 내부의 알력과 정치 게임, 수술실과 수술 과정의 리얼한 묘사, 의료 현장에서의 부조리 등을 매우 현실감 넘치게 그린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가이도 다케루는 진지한 필치와는 인연이 없는 작가, 시종일관 재치있고, 귀여운 문장들로 경쾌하게 메디컬 미스터리를 이끌어갑니다. 처음 바티스타 팀을 소개할 때 구구절절히 등장인물들 입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장식했던 신문지상의 기사를 인용하여 박력있게 소개하는 장면이나 다구치 선생의 머릿속에서 뇌까리는 끊임없는 투덜거림, 패시브 페이즈니 액티브 페이즈니 하는 시라토리의 압도적인 수사 기법 등을 풀어놓는 작가의 글솜씨도 신인치고는 제법입니다. 물론 신인이라서 부족한 점도 일부 눈에 띕니다. 예컨대 사건의 진상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고 시라토리가 사건의 트릭과 범인을 깨닫는 이유가 나중에 별로 설명이 없다는 것은 약간 불만이고, 때로 너무 오버해서 약간 페이스를 잃은 느낌이 나는 대목이 있고, 낯선 의학 용어들을 지나치게 사용하는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병원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지바고 과가 아닌 이라부 과의 의사들이 맹활약하며 웃음과 재미, 감동을 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나게,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소설로 일독해도 크게 후회할 만한 작품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구치, 시라토리 콤비가 나오는 시리즈가 일본에서 이미 2편 더 나왔다니 마저 소개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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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7-01-2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재미있어 보입니다. 한동안 미스터리 소설을 못 읽었는데, 요걸로 다시 테이프를 끊어야겠네요.

jedai2000 2007-01-29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아주 재미납니다. 미스터리성보다는 캐릭터성이 강한데, 한 마디로 즐길 수 있는 소설이예요. ^^

프레이야 2007-02-09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받은 책인데, 아주 재미나 보이네요. 님의 리뷰를 보니 더욱,,,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jedai2000 2007-02-09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사합니다. ^^
아주 재미나요. 시종일관 킬킬거리며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부족한 면이 많은 글인데 번번이 좋은 선물을 주는 알라딘에도 감사하고, 축하해주신 배혜경님께도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

아영엄마 2007-02-12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제다이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이제서야 봤네요. ^^)

jedai2000 2007-02-13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사합니다. 정말 운좋게 뽑혀버렸어요. ^^
 
대답은 필요 없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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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약력을 설명하기도 귀찮은 한일 양국의 인기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집이다. '미야베 월드'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작품 여러 편을 순차적으로 소개하는 시리즈의 제3작인데, 예쁜 표지와 꼼꼼한 번역, 성실한 편집으로 만족감을 주는, 추천할 만한 시리즈라 생각한다. 일본에서의 전설적인 명성과는 무관하게 한국에서는 <화차> 한 권만을 겨우 만나볼 수 있었던 몇 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로 많은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이 작년에 쏟아져 나왔는데, 다작이지만 뭘 써도 평균 이상은 해내는 작가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그녀의 인기가 국내에서 더 지속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해본다.

 

<대답은 필요없어>는 처음 소개되는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집이라 개인적으로는 꽤 궁금했다. 왜 장편 잘 쓰는 작가가 꼭 단편도 잘 쓰리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시기적으로 1992년 발표라는 비교적 초기작에 가까워 어느 정도는 불안감도 있었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미야베 미유키는 미야베 미유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장편을 쓰는 이도 미야베 미유키, 단편을 쓰는 이도 미야베 미유키인데, 명필이 붓을 가리겠는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잘 읽히는 안정적인 느낌의 단편들이었다.

 

주제로는 주로 화려한 외양으로 번쩍번쩍하지만 내면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도시 생활의 고독과, 또 그 차가운 고독을 뛰어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누군가에게 버림받거나, 마음을 터놓을 이 하나 없이 쓸쓸히 홀로 살아가거나 하는 이들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이 고독한 인간군상들이 소리없이 외치는 절규를 안타깝고 허망하게 그러나 약간의 희망도 섞어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6편의 단편 제목 모두가 구어체 문장이다. 예컨대 '대답은 필요없어' '말없이 있어줘' '배신하지 마' '들리세요' 등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의지가 절절히 느껴지지 않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았다.

 

책 말미에는 미스터리 평론가 차키 노리오라는 사람의 아주 쉽게 쓴 해설이 실려 있다(내용도 쉽지만, 참 해설 쉽게 날로 먹는구나 하는 이중적인 의미다). 그의 말에 따르면 92년도에 1월부터 9월까지 본서를 비롯해 국내에도 소개된 <화차> <용은 잠들다> 등의 여섯 작품을 연이어 발표해 일본 열도를 일약 진동시켰다는데,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하다. 엄청난 다작이면서도, 완성도에 전혀 흠잡을 데가 없는, 아니 일본 미스터리 사상 손꼽히는 작품들을 쏟아냈다는 것이 아닌가. 

 

짐작컨대 이 시기 미야베 미유키는 신용카드 빚을 매개로, 경제적 약자를 철저히 짓밟는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를 심도깊게 비판한 대표작 <화차>를 준비하면서 많은 조사를 했던 듯하다. 여기 실린 '배신하지 마'는 특히 <화차>의 원형이라 불릴 정도로 유사한 구석이 많은데 카드 빚더미에 오른 여자가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노형사가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다. 과연 <화차>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표제작 '대답은 필요없어'는 은행 현금카드의 구조적 문제점을 이용해 은행을 터는 이야기다. 당시 작가가 은행과 신용카드사 등의 금융회사 취재에 집중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대답은 필요없어'는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로 결말을 맺고 있어 쓰는 작품에 따라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는 그녀의 능력을 증명한다.

 

읽으면서 가장 만족했던 작품은 '들리세요'. 이사간 집에서 밤마다 나타나는 유령에 기겁하는 초등학생 소년이 주인공이다. 코지풍으로 귀엽게 전개되다 뜻밖에 안타까운 사람과 사람 사이(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일지라도)의 소통 부재를 확인하게 되는 결말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비교적 적은 분량의 단편들이므로 구구절절히 내용을 소개해 독서의 재미를 빼앗는 짓은 할 수 없고, 이 정도로만 소개를 마치겠다. 단편에서도 여전한 미야베 미유키의 따스한 작풍과 이야기 창조력, 결말의 애잔함 등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요, 아무래도 장편에 비해 어느 정도는 힘이 떨어진다는 것과 전체적으로 무난하고 깔끔해 이거다 하고 탁 튀는 한 작품이 없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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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7-08-10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괜찮은 단편집이죠...아!!!둘시네아로 오세요!!!!!

jedai2000 2007-08-1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기 단편집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높이 평가할 구석이 많은데 의외로 묻혀서 놀랐습니다.
 
편지 - 랜덤하우스 히가시노 게이고 문학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가난한 엄마, 가난한 형, 가난한 동생으로 이뤄진 가난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지긋지긋한 악령 같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형제에게 공부로 성공할 것을 종용합니다만, 형 츠요시는 공부를 그다지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점점 나쁜 길로 빠지고, 방황하며 고교생활을 보냅니다. 어느 날, 과로에 지친 엄마가 쓰러졌고 다시 일어서지 못합니다. 츠요시는 크게 반성하며 학교를 그만두고 엄마의 소원이었던, 동생 나오키를 대학에 보내는 것을 이뤄주기 위해 이삿짐을 나릅니다. 그러기를 몇 년, 허리를 다친 츠요시는 이삿짐 센터에서 쫓겨나고 돈이 궁해집니다. 어떻게든 나오키의 대학 입학금 마련을 위해 그는 예전에 이삿짐을 날라주었던 부유한 노파의 집을 털러 갑니다.

 

무사히 돈을 훔치고 나오던 차에 동생이 좋아하는 군밤을 들고 나가려고 식당으로 가다가 마침 집에서 자고 있던 (집에는 없는 줄 알았던) 노파가 깨어나고, 소리를 지르는 노파를 츠요시는 우발적으로 살해합니다. 곧 체포된 츠요시는 15년 형을 받고, 나오키의 가시밭길 같은 인생이 펼쳐집니다. 세상의 지탄을 받는 살인자의 동생으로 온갖 차별과 좌절을 경험하는 나오키. 형 츠요시는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보내며 동생과의 교감을 기대하지만, 형 때문에 사랑하는 음악과 애인, 무수한 기회들을 날려 버리고, 단 하나 남은 소중한 가족까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고립되는 걸 목격한 나오키는 형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한 번 태어난 이상 절대로 끊어질 수 없는 관계가 바로 가족일 것입니다. 미워도 예뻐도 함께 나아가야 할 가족인데, 그 구성원 중 한 명이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면, 더구나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욕하는 살인자라면 그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편지>는 내 가족 중 한 사람이 범죄자라면? 이라는 가정 하에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아프게 그리고 있습니다. 뻔한 이야기도 다양하고 현실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재미있게 푸는 법을 아는 당대의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답게 한 번 책을 손에 들면 쉽사리 놓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형의 범죄로 인해 앨범 녹음 직전인 밴드에서 탈퇴당하고, 사랑하는 여자의 부자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며 이 돈을 줄테니 제발 떨어져다오, 하는 제의를 받는 등의 대목은 70년대 드라마를 연상시켜 다소 통속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기대하는 재미는 그런 통속적이고 다소 뻔한 이야기의 곡절을 흥미진진하게 쭉 따라가다 결말에 이르러 펑펑 울려주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저도 한 50 페이지 정도 남았을 때부터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울 준비는 되어 있다, 고나 할까요. 그러나 제가 기대했던 눈물은 흐르지 않았습니다. <편지>는 결단코 뻔한 신파 감동소설이 아닙니다. 결말에서 나오키는 단지 목이 메어서 노래를 하지 못할 뿐입니다. 단지 목이 메어서 노래를 하지 못할 뿐이지 울지는 않습니다. 단지 목이 메어서...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오직 살인이라는 범죄와 그 범죄가 낳은 아픔에 관해 독자들과 함께 여러 가지 생각을 함께 해볼 것을 제의할 뿐입니다. 특별한 정답은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긴 절대로 정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죠. 무엇보다 츠요시가 저지른 죄로 인해 그 자신이 제일 먼저 고통을 받습니다. 15년간 바깥 세상의 공기를 맛볼 수 없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회한으로 인해 살아 있어도 산 목숨이 아닐 것입니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사랑하는 어머니(노파는 당연히 누군가의 어머니, 할머니입니다)를 잃었습니다. 나오키는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들을 포기했고, 지금도 포기 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누구도 살 수 없고, 필연적으로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츠요시가 범한 살인이라는 범죄는 피해자가 품고 있던 여러 관계를 단절시켰고, 그 죄값으로 츠요시가 맺고 있던 유일한 관계인 동생과의 관계도 단절됩니다. 물론 나오키도 형과의 관계로 인해 소중한 많은 관계들을 잃어야만 했죠. 살인은 이처럼 무서운 범죄입니다. 관련된 모든 이들의 관계를 낱낱이 파괴하니까요.

 

어디에도 해답은 없습니다. 츠요시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편지를 피해자 가족에게 매달 보내지만 피해자 가족은 오히려 고통이 커집니다. 그날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고, 또 그렇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보내오는 츠요시를 아직 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가 너무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오히려 자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츠요시에게 매달 편지가 오지 않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우리에게 사죄하지도 않다니 천하의 악인이로구나, 하고 괴로울 것입니다. 이래도 괴롭고, 저래도 괴로우니 도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문제죠. 동생 나오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으로 인해 숱한 괴로움을 당하고, 그 화가 어린 딸에게까지 미치자 형과의 관계를 단절하지만 잘한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니까 차별하는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할지, 내 가족인 형의 일이니 그리고 날 위해 저지른 일이니 빌고 또 빌며 차별을 감내해야 할지 뭐가 맞는 길인지 도통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무한히 섞여 돌아가는 카오스처럼 끝없는 혼돈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도달한 지점은 거기까지입니다. 나오키의 선택과 츠요시의 회한에 대해서는 읽는 분들 나름대로 각자의 생각을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옮긴이의 말'에 실린 것처럼 원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기는 열린 결말이고, 족집게 과외는 바보만을 양산할 뿐이니까요. 사실 이 긴 글보다는 서점에 가셔서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는 게 훨씬 낫겠습니다. <편지>라는 작품에 대한 장단점이 모두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니까요. 여성 심리 묘사는 게이고가 자신없는 부분이니 건너뛰고, 작가 자신도 결말을 어떻게 내야할지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한 등장인물(나오키가 일하는 회사 사장)의 입을 빌어 피해자와 가해자 가족이 받는 고통과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역시 종종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기야 누구도 명쾌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니까요.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소설은 하나의 범죄를 둘러싼 여러 아픔을 성공적으로 그려낸 소설이라는 것, 그리고 죄가 낳은 필연적인 고통과 죄로 인한 안타까운 차별 같은 공감가는 주제에 대해 한 번쯤 깊이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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