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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조국
로버트 해리스 지음, 김홍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여지껏 지구 상에 존재했던 무수한 인물 중에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고, 입에 올리기조차 웬지 혐오스러운 그런 사람은 누가 있을까. 후보(?)는 여러 명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일이 등을 다툴 이름은 아마도 아돌프 히틀러가 아닐까 싶다. 2차대전의 원흉으로 수천만의 생명을 앗아가고, 그 와중에 죄없는 수백만의 유태인까지 학살한 히틀러라면 과연 불쾌감을 절로 자아내는 역사 속의 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다들 알다시피 히틀러는 독일의 패전이 거의 확실시된 1945년 4월 30일에 벙커에서 애인과 함께 권총자살했다.
<당신들의 조국>은 2차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하고, 히틀러가 아직도 살아남아 철권 통치를 하고 있다면? 이라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된다. 아직까지도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는 민간인들, 참전용사들, 유태인 피해자들이 생존해 지난 날의 악몽을 떠올리는 마당에 참으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 로버트 해리스는 이런 기발한 뼈대 위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제3제국에 튼튼한 살을 붙여 한 편의 인상적인 가상 역사소설을 창조해내었다. 일단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흥미로운데 더해 디테일까지 세심하니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간만에 진지하게 몰입해서 볼 만한 좋은 소설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가상 역사소설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만, 어둡고 암울한 사회를, 한 고독한 인물이 누비며 숨겨진 진실을 찾는 한 편의 느와르 소설로도 가치가 있다. 느와르 소설이란 전후에 주로 나타난 문예 사조로 전후의 혼탁하고 어두운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비정하고 냉혹한 인물들의 범죄를 주로 그린다. 이 작품에서의 독일 제국은 1964년 현재도 전시 체제로 시민의 자유는 억압된 채 전체주의의 이념 아래서 살아간다. 곳곳에 게슈타포의 감시의 눈이 번뜩이고 있으며, 모든 정보는 통제되고 있다. 여전히 전쟁 중인 독일 제국에서 발견된 한 구의 시체에서 나아가 제국의 실권자들이 연루된 거대한 음모가 밝혀지는 이 작품은 우수에 찬 주인공의 상념과 대사, 기계처럼 냉정하게 묘사되는 폭력 장면, 우울한 결말까지 완벽한 느와르 소설임을 증명한다.
주인공 크사비어 마르크는 고독한 인물이다. 왜냐면 그는 모두 깊이 잠들어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깨어 있기 때문이다. 전 유럽을 거의 병탄하다시피 한 독일 제국의 번영 속에 무언가 음험한 악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그는 전체주의 치하에서 꼭두각시가 되어야만 하는 소시민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다. 열렬한 나치주의자인 아내는 그런 그를 못마땅해 하며 이혼했고, 열 살이지만 하겐크로이츠가 새겨진 칼을 애지중지하는 아들 필리는 소년 나치친위대로 아빠가 다른 친구 아빠들처럼 나치당의 활동에 열광하지 않고 미온적인 것이 불만족스럽기만 하다. 독일이라는 국가와 국민 속에 잠복해 있는 악을 본능적인 후각으로 감지하고 있는 그는 가족들에게도 버림받고, 일터인 경찰계에서도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도입부에서 크사비어 마르크는 새벽에 동료 대신 호숫가에서 발견된 노인의 시체를 조사하다 그가 전직 나치의 고위 간부임을 알게 된다. 이 장면은 시종일관 내리는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데, 독일 사회의 축축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비로 상징해 표현하는, 한마디로 끝내주는 분위기다. 요즘은 이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글을 쓰는 작가를 좀처럼 만나볼 수 없어, 더욱 인상적이었다. 마르크는 노인의 주변을 맴돌다 제2, 제3의 피해자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우연히 알게 된 미국 기자 샬롯과 함께 그는 진실을 찾는 긴 여정을 시작하고, 결국 독일 제국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했던 비밀과 대면하게 된다.
결말에서 스파이소설의 걸작,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가 연상되는 작품으로 픽션의 한계를 넘어 유명한 반제 회의 등 역사적인 사실을 충분히 담아냄으로써 여러모로 묵직하고 진지한 소설로 완성되었다. 이외에도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영미권에서 리버풀 출신의 정신 나간 밴드가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든가,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이든가 하는 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역사를 살짝 비튼 재기 넘치는 장면들도 잔재미를 준다. 무겁고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지배적인 소설이라 가벼움을 선호하는 요즘 독자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진지하게 곱씹어볼 만한 소설을 찾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물론 미스터리나 느와르, 스파이소설로서의 재미도 빠지진 않는다. 개인적으로 한 편의 소설을 볼 때 장점 하나를 찾으면 단점도 하나 지적하는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버릇이 있는데, 솔직히 단점을 찾기가 거의 힘든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