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리 성공한 작가라도, 기존의 성공작들을 답습하며 진화를 꿈꾸지 않는다면 그순간 그는 이미 문학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다 할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같이 성공에 성공을 열 번쯤 더한 작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그간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이 면모를 일신하려 노력하는 미야베 미유키의 야심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도저히 소설의 주인공으로 쓸 수 없을 듯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편집자 스기무라 사부로는 다행히(?) 재벌의 딸과 결혼함으로서 어느 정도 특별한 설정을 부여받는다. 물론 재벌의 딸이라지만 첩 소생이라 어마어마한 돈벼락을 맞거나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또래 친구들보다는 훨씬 넉넉한 살림이다. 장인의 회사인 이마다 콘체른의 사보 <아오조라(궁금해서 찾아봤는데 푸른 하늘이라는 뜻)>에서 장기를 살려 취재기자 및 편집자로 일하는 스기무라. 어느 날 하늘 같은 장인으로부터 뜻밖의 명령이 떨어진다.

 

장인의 운전기사였던 가지타 씨가 자전거에 치어 사망했는데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단다. 자전거에 부딪혀 어떻게 사람이 죽냐고 묻지는 마시길. 요즘 자전거 얼마나 좋고 빠른지 다 알지 않나. 가지타 씨의 인생을 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두 딸을 만나 편집자로서 이야기를 들어주라는 장인의 명령을 받들어 그녀들과 대면한 스기무라는 어딘지 불안한 기색이 감돌고 있는 언니 사토미로부터 숨겨진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다. 친근하고 편안한 인상의 가지타 씨에게는 어떤 말 못할 비밀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사토미가 4살 때 유괴된 적이 있었다는. 아마도 아빠의 죽음은 옛날의 원한을 갚기 위한 계획살인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토미다. 평범한 교통사고(?)일 줄 알았던 가지타 씨 사건에 웅크리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미야베 미유키의 첫번째 야심은 미스터리와 일상성의 결합이다. <누군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매일 아침 출근길에서 마주칠 수 있을 듯한 평범한 인물들이다. 애처가이자 네살배기 딸을 목숨보다 사랑하는 스기야마나 지난 날의 야심은 묻어두고 평온하고 안락하게 늙어간 가지타 씨 등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현실감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물론 스기야마의 처가인 이마다 가문은 재벌가이기에 어느 정도는 우리 현실과 괴리가 있겠지만, 이마다 회장 역시 몸이 약한 딸을 애지중지하는 등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는 미스터리의 비중 만큼이나 스기야마의 애처 행각을 비롯한 '가족간의 관계'에도 골고루 시선을 배분한다.

 

이렇게 평범한 인물들이 등장하니만큼 다루는 사건도 비교적 일상적이다. 자동차도 아니고 평범한 우리네 삶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자전거 사고라니 그야말로 일상의 냄새가 팍팍 나는 상징적인 설정이다. 사건을 조사하는 스기야마의 방법 역시 굉장히 현실적인데 별다른 조사 수단이 없는 그는 사고 현장에서 전단지를 만들어 돌린다거나 가지타 씨가 오래전 일했던 완구 회사의 사장을 찾아가 가지타 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묻는다든가 할 뿐이다. 사장 할아버지에게 좋았던 옛 시절 이야기를 듣다가 물색없이 할아버지의 지나온 인생에 감동받기도 하는 스기무라는 정말 귀여운 남자다(사실 완구 회사 사장 할아버지가 나오는 장면은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빼어나다).

 

이렇듯 소박한 사건을 소박하게 풀어가는 미스터리다 보니 결말에 이르러 약간 섭섭하기도 한데, 이 작품의 지향점이 결국 우리 삶속에서의 작은 미스터리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만약 스기무라가 아닌 민완형사나 경찰과 끈이 닿아 있는 정보빠른 탐정이라면 아마 이틀이면 풀 수 있는 사건이니까. 다만 이 책은 누가 범인인가, 어떻게 죽였는가가 중요한 작품은 아니니 미리부터 실망하지 말길 바란다. 비록 짜릿한 두뇌 회전을 시켜주지는 않지만, 스산하면서도 애잔한 결말에 책장을 다 덮고도 깊은 감흥이 남을 것임을 보증할 수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또다른 야심은 탐정 캐릭터의 창조다. 흔히 미야베 미유키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계승자로 알려져 있는데, 사회 현실의 부조리를 추리소설의 틀에 담아내 냉정히 관찰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은 그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감이 필수다. 따라서 보통 사람은 평생에  만날까말까한 살인 사건을 철마다 만나는 명탐정 캐릭터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나마 사건과 접할 기회가 많은 형사나 기자가 주인공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미야베 미유키의 그 무수한 미스터리를 통틀어도 우리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는 탐정 캐릭터는 없다. 짐작컨대 그녀는 자신만의 포와로를 만들어낼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스기야마 사부로, 이 평범한 남자가 바로 미야베 미유키가 작심하고 키우는 탐정 역으로 영광스럽게 낙점된 인물이다. 이미 스기야마 탐정! 제2탄 <이름없는 독>이 일본에서 출간되고 전작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았다니, 미야베 미유키는 또 한 번 성공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국내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 작품은 대부분 본 셈인데, <누군가>에 이르러 좀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예전처럼 멋부린 비유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편하게 읽히는 문장을 쓴다. 그래서 별 사건이 없어도 쭈욱 읽힌다. 작가의 작품 목록에서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과 가장 비일상적인 미스터리를 결합하고, 그간 시도하지 않았던 시리즈 탐정 캐릭터를 선보인 이번 작품에서는 소박한 외양에 감춰진 작가의 야심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런 모든 시도들이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보기에 별은 네 개 반을 주지만 <이름없는 독>에서 다섯 개가 채워질 수 있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p.s/ 보잘 것 없는 글을 참으로 길게 썼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간단하게 요약했다. 역시 작가의 힘이란 이런 것 같다.

 

인생에 부족함이 없거나, 또는 행복한 삶을 사는 탐정은 미스터리의 세계에는 무척 드문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평범하고 이렇다 할 장점도 없지만 일상생활은 안정되어 있고 포근한 행복 속에 사는 탐정. 이 작품은 그런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그 결과 그가 추적하는 사건은 아주 사소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 사소함 속에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 미야베 미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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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hand 2007-02-09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라인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작품임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소재와 내용을 이렇게 소화해 내는건 역시 미야베 미유키의 힘이겠지요. 만약에 비슷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기리노 나츠오가 작품을 썼다면? 하는 생각을 했더니 문득 <그로테스크>가. 하하하.
'스기야마의 애처행각'이라는 문구를 보니 제다이님의 '서지혜에 대한 사모행각'이 아울러 머리에 떠오르는군요. 하핫. =3=3=3

jedai2000 2007-02-10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작가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보니 <그로테스크>랑 사실 거의 같은 주제라는 생각이...물론 강도는 전혀 다르지만요 ^^
미야베 미유키가 특유의 선의의 결말을 내지 않고, 질투와 라이벌 의식이라는 악의를 결말로 택했다는 건 약간 놀랍더군요.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소설인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모행각'이라뇨 ㅋㅋ '스토커행각'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