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 그날의 안경...

 

 

 3년전 쯤의 일이다. 친구들과 녹차밭으로 유명한 전라남도 김보성군(-_-;;; 죄송합니다. 보성군입니다.)을 놀러 가기로 했다. 동기지만 재수해서 한살이 더 많은 L형이 마침 자가용 SM5가 있어 운전을 담당했다. 운전자 L형까지 네 명이 타고 가는데, 뒤에 앉은 내가 느끼기에 뭔가 이상했다.

 

가만히 보니 룸미러에 비친 L형의 얼굴에 안경이 씌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L형은 눈이 좋아 안경을 쓰지 않는다. 차에 타고 있던 4명 모두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나는 원래 쓰는데 그날은 자느라 벗고 있었다.)

 

안경을 아무도 쓰고 있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의 안경이 잘못 비춰진 것도 아니다. 내가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모두 룸미러를 확인했는데, 모두 보았다. L형의 안경을...다들 놀라워했다. 겁이 많은 필자는 소름이 오싹 돋기 시작하는데, 시니컬하기로 유명한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특유의 심드렁한 말투로...

 

"그거 참 흥미롭네. 이래서 사람들이 귀신이 있다고 하는 거구나. 이렇게 다들 헛것을 보니 말야.."

그 말을 시작으로 우리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타고 있었더라면 비명을 빽 질렀을 것이고, 한 명의 비명이 전염되어 극도의 공포를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친구가 비명은 고사하고 진지하게 토론을 주도하니 우리들은 무서울 새가 없었던 것이다...-_-;;;

 

"집단 최면일 수도 있어..."

"빛의 난반사가 아닐까.."

그날의 토론은 가는내내 계속됐다..-_-;;; 룸미러에 비친 안경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보성에 도착하는 동안 그 안경은 한시도 사라지지 않았다...

 

 

 

두 번째 이야기...분신사바

 

   이 이야기는 작년에 일어난 일이다. 친구들과 공원 숲 벤치에 앉아 캔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깜깜한 밤에 사람도 없어 분위기도 좋았다. 어쩌다 분신사바 이야기가 나왔다. 필자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 궁금해했었다.

 

 이번 기회에 한번 해보자 싶어 역시 한번도 경험이 없던 친구와 해보기로 했다. 종이를 꺼내 반으로 나눠 <예>와 <아니오>를 적었다. 친구와 손을 잡고 시작할 준비를 모두 갖추었다. 주문은 친구가 외웠는데 그 녀석 목소리가 완전 주술사다.

 

 정말 내가 귀신이라도 나오고 싶을 정도로 장엄하게 주문을 외우는 게 아닌가..

 

 

내가 물었다.

"오셨으면 <예>로 가세요..."

그런데 정말로 나와 친구 둘 다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예>쪽으로 볼펜이 스르르 밀려가는 게 아닌가. 처음 접한 나와 친구는 눈을 번쩍 뜨고 볼펜을 놓쳤다. 정말로 움직이니 당황한 것이다. 

 

한번 더 해 봤는데 역시 또 볼펜이 <예>쪽으로 움직였다. 이거 진짜 되는구나 싶어 친구에게 말했다.

"야! 이거 진짜 된다. 이번에는 진지하게 물어보자. 올해는 여자친구 생길 수 있는지..-_-;;"

 

친구와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분신사바를 시작했다.

"오셨으면 <예>로 가세요." 했다.

그런데 볼펜이 아까와는 반대인 <아니오>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나와 친구는 싱거워져서 눈을 떴다. 그럼 그렇지. 될 리가 있나...

 

그런데 친구들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시선을 내려 종이를 보니 볼펜은 <예>쪽에 가 있었다. 나와 친구가 눈을 감고 분신사마를 하고 있을 때, 다른 친구들이 밑에서 종이를 슬슬 움직여 <예>와 <아니오>를 반대로 바꿔 놨던 것이다. 결국 귀신은 왔고 <예>로 움직여 그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 ....궁극의 공포

 

친구가 면허증을 땄던 2000년도의 일이다. 친구는 초보임에도 아버지의 카니발 자가용을 끌며 기분을 냈다. 그는 말했다.

"야! 오늘 좋은 데 가자. 내가 운전할게..."

 

나는 그 친구의 차를 탔다. 음악을 틀고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어디 가지?"

"일단 고속도로 타자!"

 

고속도로로 진입한 순간, 친구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뒤가 안보여~~"

"야! 왜 그래애애애애애(긴박감을 강조하기 위한 에코 처리)!!!"

 

친구는 뒤가 안 보인다고 난리였다. 백 미러를 보니 정말 뒤가 안보였다. 알고 보니 그 친구가 백미러를 펼쳐 놓지 않은 것이었다..-_-;;; 카니발 자동차는 아시다시피 버튼을 눌러야 백미러가 펼쳐진다. 백미러도 안 펼치고(그러니까 뒤도 전혀 확인 안하고) 고속도로까지 온 것이다...-_-;;;

 

고속도로 한 복판에서 다른 차가 뒤에 어떻게 접근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달릴 뻔 했던 것이다...그날이 내 생애 가장 궁극적인 공포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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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병술년이 시작된 지도 어언 9일이나 지났다. 작년 말, 직장을 그만둔 후로 내리 20일 가까이 거의 매일 새벽에 들어오며 환락에 빠져 지냈다. 작년 한 해에 대한 차분한 정리도 못 하고, 다가오는 올 한 해의 다짐도 못 하며 정신없이 지내온 것 같다. 깊이 반성하고, 앞으로는 그간 계획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달성하며 열심히 살아야겠다.

 

병술년은 개의 해라고 하더라. 개는 가장 가까운 인간의 친구라 그런지,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도 개는 좀 귀여워하는 편이다. 모처럼 좋아하는 동물인 개의 해이니 더 설레는 것 같다. 올해는 꼭 원하는 일을 다 이뤄보리라...

 

그나저나 자꾸 개 이야기를 하니까 옛날에 있었던 일 생각이 난다. 때는 97년, 대학교 신입생 때다.

그때는 상당히 열악한 환경에서 맨날 술만 마셨던 것 같다. 돈도 없어 칼슘이 가득 든 새우깡,오징어 땅콩을 안주삼아 대학교 공원 벤치에서 두꺼비(소주)만 사냥했던 것 같다. 상당히 동물 친화적인 술자리였다..-_-;;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어느 정도의 면적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자그마한 숲이 있다. 숲에는 벤치가 여러 곳 놓여 있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쾌적했다. 물론 나무가 대부분 소나무라 술 마시다 보면 송충이가 후두둑 떨어지곤 하기도...어떤 선배는 후드티 모자에 송충이가 떨어진 걸 모르고 집에 갔다가 그것을 발견하곤 냉큼 죽이려 하다가 문득 송충이에 애정을 느껴 열심히 길렀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믿지 마라...

 

여튼 새벽 4시경, 친구K와 J,또다른 J와 함께 벤치에 앉아 술을 마셨다. 사방은 어둡고 몇 개의 가로등만이 불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 K가 근처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더니 말을 했다.

"야, 저기 봐라. 저기 강아지 있다."

 

우리는 그 친구가 가르키는 곳을 봤는데, 거기엔 검은 형체의 뭔가가 있었다. 내가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 강아지 맞아?"

친구 K는 동물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녀석이라 예전에 집에서 강아지와 고양이를 비롯한 수많은 동물을 기른 적이 있었다. 

"내가 동물 박사잖아. 저기 보라고, 꼬리를 말고 머리를 두 앞다리 사이에 집어넣고 있잖아. 저거 강아지가 잘 때 늘 저 포즈로 자는거야."

일동.

"그렇구나.."

 

자칭 동물 박사라는데 누가 이견을 달 수 있으랴...그런데 검은 형체는 날렵하게 다가오더니 준엄하게 한마디 했다.

"야옹~ 야아옹!"

 

그렇다.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자신의 정체성이 의심받는 순간이 다가오자 직접 입을 열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낸 것이다. 이 이야기를 '고양이의 증명'이라 부르자...

 

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모두 개의 해, 병술년 최고로 보내시기 바라요~!

(이 이야기에 적당한 교훈이나 감동을 주기 힘들자 뜬금없는 마무리로 맺는 저자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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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1-09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요~

jedai2000 2006-01-09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전차남 - 에르메스와 사랑에 빠진 전차남 이야기
나카노 히토리 지음, 정유리 옮김 / 서울문화사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2004년 일본을 뜨겁게 달군 <전차남> 열풍이 한국에도 찾아 왔습니다. 일본에서 <전차남>은 책도 100만부가 넘게 팔리고 영화, 드라마를 비롯한 온갖 매체로 재생산되면서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과연 <전차남>은 어떤 작품이기에 전일본을 뒤집어 놓을 수 있었을까요?

 

우선 <전차남>은 소설 형식의 책은 아닙니다. 인터넷 사이트의 게시판에 올라온 내용들이 순서대로 나열될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모티콘으로 도배된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이 생각나는 형태입니다. 그러나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이 순수 창작이라면, 이 작품은 실화라는 데 그 매력이 있습니다.

(실화인지 아닌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실화로 가정하겠습니다.)

 

일본에서도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기묘한 오타쿠들이 모여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로 독자적인 공간을 꾸려 나가는 '투채널'이란 사이트가 있습니다. (웬지 '디시 인사이드'가 생각나는군요. ^^;;)

'투채널'에는 애니메이션이나 음란 영화를 비롯해 심지어 자살 사이트까지 있을 정도로 폐쇄적이고 음침한 공간인데, 그곳에 <독남毒男이 뒤에서 총 맞는 게시판-위생병 불러>라는 게시판이 있습니다. 애인하나 없는 독소같은 남자라는 뜻의 독남毒男과 외로운 남자라는 뜻의 독남獨男이 중의적으로 쓰인 게시판입니다.

 

한 마디로 솔로부대원들의 집결지라 이겁니다. 저도 여기 가입해야겠네요..T.T

그런데 이곳에 독남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 한 방의 폭탄이 떨어집니다. 어느날, 전차남이라는 아이디의 한 남자가 자신의 사연을 적습니다. 지하철에서 술에 취해 여자들에게 못되게 굴던 아저씨를 우여곡절끝에 자신이 물리치게 됐는데, 그중 한 아가씨가 감사의 표시로 찻잔 선물 세트를 보내왔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전차남은 전형적인 오타쿠로 아키하바라를 내 집처럼 드나들고, 19금 에니메이션을 즐기며, 외모는 촌스럽기 서울역에 그지없고, 단 한 번도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초절정 독남이었던 것입니다.

 

전차남은 여자의 친절에 당황합니다. 물론 어여뻤던 그 여자에게 끌린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쑥맥인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합니다. 독남들은 전차남에게 조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그 찻잔의 상표가 뭐냐고 묻자, 전차남은 에르메스라고 답합니다. 여자의 별명은 이제 에르메스가 되었습니다. 독남들은 전차남과 에르메스의 사랑을 맺어주기 위해 온갖 조언과 격려와 꾸짖음을 다합니다. 전차남 역시, 기존의 찌질한 인생에서 벗어나 점점 자기 주관과 용기를 가진 진정한 매력남으로 거듭나구요. 전차남의 성장에 놀란 독남 중 한 사람은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뭔가 이 여유는? 이것이, 이것이 그때의 그 전차남이란 말인가!!?

우리는 이 어처구니없는 괴물을 세상에 내보내게 된 거란 말인가아아아아!!"

 

전화하는 것도, 손을 잡는 것도 우물쭈물 망설이기만 하던 전차남이 에르메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눈부신 용기를 발휘하자 독남들은 감동하기 시작합니다.

 

"설사 에르메스랑 잘 안 된다고 하더라도 전차는 이미 毒이 아니예요.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요. 전차."

 

사랑을 하면서 점점 성장해 나가는 전차남의 멋진 모습과 모든 게 서툰 그를 따뜻하게 배려해주는 상냥한 에르메스의 연애담도 즐겁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가장 큰 감동은 추운 겨울도 녹일 듯한 독남들의 따뜻함입니다. 정말 이 책을 읽다 보면 성선설을 믿게 됩니다.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전차남의 성공을 기원하며 하나로 굳게 뭉친 그들의 모습은 더이상 인터넷 폐인이 아닌, 아름다운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심지어 그들 자신들도 의아해합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된 거지, 하고 말예요. ^^;;

 

전차남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마침내 사랑을 고백하러 간다며 새벽 일찍 게시판에 글을 남깁니다. 독남들은 초조한 마음을 안고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전차남은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게시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과연 잘 될까, 잘 안 되서 전차남이 상처받지나 않을까 초조가 극에 달합니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전차남을 응원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는 36시간이 넘도록 게시판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회사에서도 10초에 한 번씩 리로드를 합니다. 저도 전차남을 열렬히 응원했습니다. 저는 버스에서 책을 읽으면 멀미가 나는 체질이라 읽지 않는데, 버스 바닥에 토하는 한이 있어도 전차남을 응원하겠다, 이런 각오로 책을 잡았습니다. 사람 마음이란 다 똑같은가 봅니다. 열정을 가진 누군가가 진심으로 잘 되길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전차남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고 돌아오고, 그 순간부터 작품의 진정한 하이라이트가 터집니다. 거의 20페이지 가까이 독남들의 축하글들이 쏟아지는데 진심으로 감동적입니다. 공들여 준비한 온갖 이모티콘과 감동적인 축하 메시지들, 독남들의 진심이 느껴져 너무너무 흐뭇한 독서였습니다. 책으로 읽어도 이 정도인데, 그 당시 직접 그 순간을 함께한 독남들은 얼마나 황홀했을까요..^^;;

 

그러곤 대망의 마지막 장...전차남은 이제 커플이 됐으니 커플게시판으로 가야 합니다. 전차남 게시판 글도 이제 100개만 더 올라오면 종료입니다. 그런데 독남들과 전차남 모두 서로에게 정이 잔뜩 들어 헤어지는 걸 안타까워 합니다.

 

"전차 빨리 가~ 간신히 붙잡은 에르메스의 손을 놓지 마. 뒤돌아볼 것 없어.

두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 그게 바로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줘."

 

"으아, 이제 100개 밖에 안 남았어. 정말로 눈물나기 시작했는데.

어쩌지? 이렇게 아쉬운 것도, 눈물나는 것도, 축하하고픈 것도 처음인데."

 

"우리들을 친구라고...

고마워요."

 

"꺼이꺼이, 어째서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떠나는 것이 이렇게 슬프다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작품은 끝이 납니다. 피와 살이 아닌, 전기와 회선에 불과한 차가운 인터넷 공간이지만 진심이 통한다면 세상 무엇보다 뜨거운 만남이 될 수도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말입니다. 인터넷에 얽힌 이런저런 사회 문제도 많지만, 그래도 이런 흐뭇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음에 인터넷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번쯤 사랑에 빠지고 싶게끔 만드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와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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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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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소설하면 보통 여름에 많이 읽는다는 인식이 있어서인지 대체로 여름에 꽤 많은 책들이 나왔었는데 요즘엔 겨울에도 못지 않게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스터리 시장이 그만큼 확대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막상 판매량을 보면 아직 대중성이 좀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올 겨울에는 비교적 최근의 일본 미스터리 소설들이 많이 출간되는게 특징적이다. 현재 최고의 일본 미스터리 여류 소설가 두 사람,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와 기리노 나츠오의 <그로테스크>를 비롯해 국내에는 다소 낯선 우타노 쇼고의 뛰어난 작품인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뿐만 아니라 유머 미스터리 대가 아카가와 지로의 <세 자매 탐정단>시리즈까지 일본 미스터리 팬들로서는 푸짐한 잔칫상을 앞에 두고 뭐부터 골라 먹을까 하는 선택의 문제만 남은 것이다.



오늘 소개할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 역시 출간된 지 열흘이 갓 지난 따끈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일본 추리작가 신인들의 등용문인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했으며 100만부를 돌파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고 한다. 본인이 읽어보니 과연, 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줄만 한 작품이었다.



사소한 시비 끝에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준이치는 1년8개월 만에 가석방된다. 기쁜 마음도 잠시, 집에 가보니 피해자 가족과의 합의 때문에 집은 풍비박산이 나 있다. 좋은 집 다 넘어가고, 동생은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괴롭힘을 당하다 못해 학교까지 때려 쳤다. 전과자인 그에게 느껴지는 세상의 차가운 시선은 그를 힘들게만 한다.



그런 준이치에게 다가온 한 남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난고. 준이치의 수감 당시, 간수부장이었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형무소에서 간수로 일하면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아내와는 별거중이고 이혼을 준비중이다. 난고에게 아픈 상처가 있었기에, 가족을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고는 2명의 사형수의 사형에 직접 관여했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형수의 목에 밧줄을 걸었고, 모든 걸 초월한 또다른 사형수의 사형도 지휘한 바 있다. 비록 사형수라지만 자신의 손으로 두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사람을 죽여 사형수가 된 사람들과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신이 뭐가 다를까 번민하는 난고...



난고는 간수를 그만둘 결심을 하고 마지막으로 그간의 죄(?)를 속죄하려 한다. 사형수 사카키바라의 무죄를 증명해주려 하는 것이다. 사카키바라는 7년전 벌어졌던, 노부부를 도끼로 때려 죽이고 돈을 훔쳐간 살인 사건 현장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살해된 노부부 집 앞 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나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사카키바라. 경찰이 조사를 해보니 사카키바라의 몸에 노부부의 피가 묻어 있으며, 도둑맞은 돈도 감춰져 있었다. 당연히 사카키바라가 의심을 받지만 기막힌 일이 벌어진다. 여기가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데, 사카키바라는 오토바이 교통 사고 때문에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이다. 이래서야 경찰의 의심을 풀어줄 수 없다. 사카키바라는 사형 언도를 받고 만다.



사카키바라의 사형 3개월 전, 그는 문득 사건 당일, 계단에 얽힌 기억이 떠오른다. 어디에선가 자신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음을 기억해낸 것이다. 사건의 유일한 단서는 계단 뿐...사형 제도에 반대하는 익명의 독지가가 내건 상금을 받기 위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준이치가 나서고, 합법적이든 아니든, 사람을 죽였으니 이제는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인도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난고가 팀을 이뤄 사카키바라 사건을 조사한다...



기막힌 이야기다. 3개월이라는 시간상의 데드라인이 주는 압박감과 긴장감도 좋고, 필연적으로 사건 조사에 나서야만 하는 난고와 준이치 두 사람의 사정도 그럴싸하게 전개된다. 서먹했지만 점점 서로를 위하게 되는 두 파트너의 팀웍이 끝까지 계속되는 걸 지켜보는 것도 흐뭇하다.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는 신인작가답지 않게 묵직한 주제의 육중한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무엇보다 사형 제도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자료 조사를 한 흔적이 보인다. 형행 제도란 사형수의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인가, 아니면 감옥에서 성격을 교정해내 제대로 된 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교화의 수단인가 라는 오래되고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현행 일본 사형 제도의 모순까지 다양한 주제를 선 보인다. 일례로, 개전의 정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수가 죄를 뉘우치는 기색이 역력할 때, 사형 사면령을 내리는 것인데 우리 중 누가 그 사형수가 진심으로 죄를 뉘우쳤는지 판단할 수 있겠는가. 작품에서 사카키바라는 사건 자체의 기억이 없으므로 죄를 뉘우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개전의 정을 받지 못한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만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약력을 읽어보면 원래 영화와 드라마 각본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는 영상적인 기법이 많이 차용된다. 사형수 사키카바라의 데드라인이 줄어드는 과정과 난고,준이치 팀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이 교대로 반복되는데, 영화로 치면 교차편집이다. 이외에도 선명한 이미지를 주는데 작가는 주력하고 있다.



클라이맥스 장면 난고가 사건의 진범을 알게 될 때 그는 미스터리 소설에서 흔히 보듯이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범인을 도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범인의 모습에서 어떤 단서를 보고 직감적으로 느낀다. 만약 그 장면이 영화처럼 영상으로 보여진다면, 영상이라는 강력한 힘 때문에 보는 사람들 역시 범인과 그 단서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활자로 봤을 때는, 그 정도 단서에 부합되는 사람을 진범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미스터리 소설 특성상 내용을 빼고 설명을 하려니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데 읽어보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살짝 감이 올 것이다. 작가가 영상 쪽 일을 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상적 글쓰기가 된 건지,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쓴 건지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는 살짝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신인 작가답지 않은 완숙함으로 최고의 즐거움과 아울러 깊이 생각할거리도 던져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오래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가설들이 등장하고 또 부서지는 재미도 쏠쏠하고, 난고와 준이치 두 주인공의 행적에도 미스터리 요소가 있어 주인공까지 120% 믿지 못하게 만드는 역량도 제법이다. 결말은 한 편의 영화 같다.



모처럼 재능있는 작가가 탄생했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작품 뒤에는 부록으로 에도가와 란포상 심사 과정을 미야베 미유키가 적은 내용이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당시 심사 위원은 미야베 미유키, 기타가타 겐조, 기타무라 가오루, 오오사카 고우, 아카가와 지로 였는데 만장일치였다고 한다. 재능있는 후배이자, 이제 라이벌이 된 다카노 가즈아키에 대한 애정이 함빡 담긴 심사평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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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05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올해도 꽤 많은 미스터리를 읽었는데 세어 보지 않아서 정확한 권수는 잘 모르겠네요. 아마도 올해 읽은 마지막 책이 될 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소개할 수 있어 기쁩니다. 간단히 말해 2005년 출간된 최고의 미스터리 소설 중 한 편입니다.



작가 소개를 보니 우타노 쇼고는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일본 추리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시마다 소지의 추천을 받아 88년에 데뷔했다고 하는데 아야쓰지 유키토, 노리즈키 린타로 등과 함께 신본격 작가 1세대에 위치한다고 하네요. 단 한 편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신본격의 대표 선수인 아야쓰지 유키토 보다도 트릭의 구성이나 문장이 더 좋게 느껴집니다.



대단히 시적인 제목의 이 작품은 무엇보다 반전이 대단합니다. 독후감을 쓰기 대단히 어려운데, 혹시 반전의 힌트를 노출할까봐 말예요. 그러나 정말 나는 속지 않을거야, 다짐하고 꼼꼼히 읽으셔도 절대로 맞출 수 없을 겁니다. 그만큼 대단한 반전입니다. 결말에서 밝혀지는 진상은, 영화 <식스 센스>처럼 그 동안 보았던 모든 내용이 완전히 새롭게 느껴지게 만들 만큼 충격적입니다. 독자들은 아마 결말을 보고 난 다음, 저처럼 바로 첫장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곤 다시 차근차근 읽으면서 내가 무엇을 놓쳤나, 어디가 수상했나를 복기해 볼 것입니다. 그런 짜릿한 재미가 있는 책입니다.



활기 넘치는 나루세라는 남자, 그는 세상 경험을 쌓기 위해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뛰며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후배에게 부탁을 받고 노인을 대상으로 사기 행각을 벌이는 '호라이 클럽'이라는 불법 회사를 조사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회 문제가 되었던, 노인들을 강당에 몰아 넣고 조잡한 물건들을 강매하는 것 말예요. 나루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탐정 생활을 한 적도 있었거든요. 나루세의 탐정 생활 때 조사했던 사건도 회상 형식으로 중간중간 등장하는데, 그 사건 역시 재미있습니다. 처참하게 배가 갈린 채 죽어 있는 야쿠자를 누가 죽였는지 알아내는 사건이지요.

한편 다시 현재로 돌아와 나루세는 지하철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여자를 구출하고 그녀와 교제를 하게 됩니다. 사쿠라(벚꽃)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와의 미묘한 관계가 나루세의 탐정 활동과 더불어 진행됩니다.



이상이 대강의 내용인데 요약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반전(!)의 조그만 힌트라도 노출하면 안되기 때문에요..이 작품은 그냥 읽어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빵, 커다란 충격을 느끼시면 됩니다. 작가는 독자를 속이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는데, 워낙 작품 전체를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 큰 반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약간 억지스런 설정이나 반칙성 트릭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도 미스터리 애독자라면 정말 시원하게 속았구나, 하고 껄껄 웃으며 넘어가 줄 수 있는 애교스런 억지와 반칙이라고 생각합니다.



감히 말씀드려 반드시 읽어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반전이 가장 커다란 즐거움이지만, 작품에 묘사된 노인 문제에 관한 시선을 보면 가볍기만 한 작품만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2005년에 읽은 최고작 중 하나입니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셔서 읽으셔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별점: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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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12-31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상 최고의 반전이라니...
상당히 땡기게 만드시는군요..^^

jedai2000 2006-01-0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상 최고의 반전은 살짝 오바긴 하지만 정말 괜찮은 작품입니다. 근래 보기 드문 충격적인 반전이기도 하구요. 물론 제가 적었듯이 살짝 억지+약간 반칙성 트릭도 있지만요. 정말 재미있습니다. 꼭 읽어보세요.

거친아이 2006-01-01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땡깁니다. 일단 보관함에 넣었어요^^

jedai2000 2006-01-02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문하세요. 기막힌 재미 보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