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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ㅣ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미스터리 소설하면 보통 여름에 많이 읽는다는 인식이 있어서인지 대체로 여름에 꽤 많은 책들이 나왔었는데 요즘엔 겨울에도 못지 않게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스터리 시장이 그만큼 확대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막상 판매량을 보면 아직 대중성이 좀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올 겨울에는 비교적 최근의 일본 미스터리 소설들이 많이 출간되는게 특징적이다. 현재 최고의 일본 미스터리 여류 소설가 두 사람,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와 기리노 나츠오의 <그로테스크>를 비롯해 국내에는 다소 낯선 우타노 쇼고의 뛰어난 작품인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뿐만 아니라 유머 미스터리 대가 아카가와 지로의 <세 자매 탐정단>시리즈까지 일본 미스터리 팬들로서는 푸짐한 잔칫상을 앞에 두고 뭐부터 골라 먹을까 하는 선택의 문제만 남은 것이다.
오늘 소개할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 역시 출간된 지 열흘이 갓 지난 따끈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일본 추리작가 신인들의 등용문인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했으며 100만부를 돌파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고 한다. 본인이 읽어보니 과연, 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줄만 한 작품이었다.
사소한 시비 끝에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준이치는 1년8개월 만에 가석방된다. 기쁜 마음도 잠시, 집에 가보니 피해자 가족과의 합의 때문에 집은 풍비박산이 나 있다. 좋은 집 다 넘어가고, 동생은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괴롭힘을 당하다 못해 학교까지 때려 쳤다. 전과자인 그에게 느껴지는 세상의 차가운 시선은 그를 힘들게만 한다.
그런 준이치에게 다가온 한 남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난고. 준이치의 수감 당시, 간수부장이었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형무소에서 간수로 일하면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아내와는 별거중이고 이혼을 준비중이다. 난고에게 아픈 상처가 있었기에, 가족을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고는 2명의 사형수의 사형에 직접 관여했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형수의 목에 밧줄을 걸었고, 모든 걸 초월한 또다른 사형수의 사형도 지휘한 바 있다. 비록 사형수라지만 자신의 손으로 두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사람을 죽여 사형수가 된 사람들과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신이 뭐가 다를까 번민하는 난고...
난고는 간수를 그만둘 결심을 하고 마지막으로 그간의 죄(?)를 속죄하려 한다. 사형수 사카키바라의 무죄를 증명해주려 하는 것이다. 사카키바라는 7년전 벌어졌던, 노부부를 도끼로 때려 죽이고 돈을 훔쳐간 살인 사건 현장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살해된 노부부 집 앞 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나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사카키바라. 경찰이 조사를 해보니 사카키바라의 몸에 노부부의 피가 묻어 있으며, 도둑맞은 돈도 감춰져 있었다. 당연히 사카키바라가 의심을 받지만 기막힌 일이 벌어진다. 여기가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데, 사카키바라는 오토바이 교통 사고 때문에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이다. 이래서야 경찰의 의심을 풀어줄 수 없다. 사카키바라는 사형 언도를 받고 만다.
사카키바라의 사형 3개월 전, 그는 문득 사건 당일, 계단에 얽힌 기억이 떠오른다. 어디에선가 자신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음을 기억해낸 것이다. 사건의 유일한 단서는 계단 뿐...사형 제도에 반대하는 익명의 독지가가 내건 상금을 받기 위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준이치가 나서고, 합법적이든 아니든, 사람을 죽였으니 이제는 사람을 살려야겠다는 인도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난고가 팀을 이뤄 사카키바라 사건을 조사한다...
기막힌 이야기다. 3개월이라는 시간상의 데드라인이 주는 압박감과 긴장감도 좋고, 필연적으로 사건 조사에 나서야만 하는 난고와 준이치 두 사람의 사정도 그럴싸하게 전개된다. 서먹했지만 점점 서로를 위하게 되는 두 파트너의 팀웍이 끝까지 계속되는 걸 지켜보는 것도 흐뭇하다.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는 신인작가답지 않게 묵직한 주제의 육중한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무엇보다 사형 제도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자료 조사를 한 흔적이 보인다. 형행 제도란 사형수의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인가, 아니면 감옥에서 성격을 교정해내 제대로 된 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교화의 수단인가 라는 오래되고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현행 일본 사형 제도의 모순까지 다양한 주제를 선 보인다. 일례로, 개전의 정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수가 죄를 뉘우치는 기색이 역력할 때, 사형 사면령을 내리는 것인데 우리 중 누가 그 사형수가 진심으로 죄를 뉘우쳤는지 판단할 수 있겠는가. 작품에서 사카키바라는 사건 자체의 기억이 없으므로 죄를 뉘우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개전의 정을 받지 못한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만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약력을 읽어보면 원래 영화와 드라마 각본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는 영상적인 기법이 많이 차용된다. 사형수 사키카바라의 데드라인이 줄어드는 과정과 난고,준이치 팀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이 교대로 반복되는데, 영화로 치면 교차편집이다. 이외에도 선명한 이미지를 주는데 작가는 주력하고 있다.
클라이맥스 장면 난고가 사건의 진범을 알게 될 때 그는 미스터리 소설에서 흔히 보듯이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범인을 도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범인의 모습에서 어떤 단서를 보고 직감적으로 느낀다. 만약 그 장면이 영화처럼 영상으로 보여진다면, 영상이라는 강력한 힘 때문에 보는 사람들 역시 범인과 그 단서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활자로 봤을 때는, 그 정도 단서에 부합되는 사람을 진범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미스터리 소설 특성상 내용을 빼고 설명을 하려니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데 읽어보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살짝 감이 올 것이다. 작가가 영상 쪽 일을 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상적 글쓰기가 된 건지,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쓴 건지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는 살짝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신인 작가답지 않은 완숙함으로 최고의 즐거움과 아울러 깊이 생각할거리도 던져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오래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가설들이 등장하고 또 부서지는 재미도 쏠쏠하고, 난고와 준이치 두 주인공의 행적에도 미스터리 요소가 있어 주인공까지 120% 믿지 못하게 만드는 역량도 제법이다. 결말은 한 편의 영화 같다.
모처럼 재능있는 작가가 탄생했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작품 뒤에는 부록으로 에도가와 란포상 심사 과정을 미야베 미유키가 적은 내용이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당시 심사 위원은 미야베 미유키, 기타가타 겐조, 기타무라 가오루, 오오사카 고우, 아카가와 지로 였는데 만장일치였다고 한다. 재능있는 후배이자, 이제 라이벌이 된 다카노 가즈아키에 대한 애정이 함빡 담긴 심사평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