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플래츠
윌리엄 랜데이 지음, 최필원 옮김 / 북앳북스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메인 주 베르세일스의 경찰서장인 벤 트루먼은 우울하다. 경찰서장이라는 높은 직함인데 왜 우울하냐고? 시골이라 마을 인구라봐야 몇 명 안 되고, 경찰서도 전 직원이 자기까지 합쳐 2명에 불과한데. 게다가 얼마 전에는 치매에 걸려 고통받던 어머니마저 음독자살했다. 이런 시골에 쳐박혀 희망없는 인생을 마감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차에 벤은 인생의 전기가 될 만한 일에 맞닥뜨린다. 대도시 보스턴의 검사 로버트 댄지거의 시체가 베르세일스에서 발견된 것이다. 발견자는 벤 트루먼 자신. 그러나 그는 보스턴 검찰국의 압력에 밀려 수사에는 참여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이때 우연히 알게 된 인물이 전직형사 켈리. 켈리는 벤에게 조목조목 수사의 요령을 알려주고, 이에 감탄한 벤은 은퇴한 노형사 켈리에게 다시 한번 수사에 대한 열정을 심어준 다음 그를 베르세일스 경찰서 부서장에 임명하고, 보스턴으로 함께 떠난다. 아이는 집을 나서야 어른이 되고, 어른은 여행을 떠나야 남자가 되기 때문에.

 

보스턴의 미션 플래츠라는 도시. 길거리 어딘가에서 묵직한 중저음의 힙합 음악이 들려올 듯한 전형적인 흑인 갱단의 동네다. 이 곳을 지배하는 세력은 해럴드 블랙스턴이라는 두목을 정점으로 뭉친 '미션 파시'라는 마약 조직. 벤은 해럴드가 10년 전, 경찰 살해 사건의 용의자였지만 무죄방면 됐고, 최근 댄지거가 수사를 재개하려 했다는 것을 밝혀낸다. 벤은 유사 아버지 같은 존재인 켈리와 그녀의 딸 캐롤라인(미션 플래츠의 검사로 재직하고 있다)의 도움을 받아 수사에 나선다. 더 나은 인생을 위하여...

 

실제 검사 출신이라는 윌리엄 랜데이의 처녀작이다. 첫 작품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해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신인상을 받았다. 이 정도 글이 되는 사람이 지금까지 왜 검사를 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오가는 이야기는 촘촘하며, 문장도 유려하고, 결말에는 충격적인 반전까지 갖췄다. 데뷔작에서 이미 제임스 엘로이 풍의 하드보일드한 분위기(사회 정의를 실시한다는 명목 하에 자행되는 경찰들의 위악적인 폭력이 특히 그렇다)와 문장력, 스콧 터로를 연상시키는 법조계의 풍경들과 반전을 보여주고 있으니 장래가 촉망된다고 할 수밖에. 그런데 사실 언급한 대가들의 느낌이 너무 강해 이제 첫 작품을 낸 신인작가만의 개성은 조금 흐릿해 보여 약간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첫 작품에서 이런 공인 받은 대가들의 느낌을 줄만큼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잘 이해하고, 능란하게 이끌어나가고 있음은 칭찬해야 마땅할 것이다.

 

<미션 플래츠>의 최대 매력은 아마도 반전일 것이다. 이런 결말을 상상할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었을 듯. 충격이라는 말로도 모자란 감이 있다. 다만 등장인물들의 행적에 관한 정보를 독자에게 사실상 제공하지 않으면서 반전을 터뜨리기에, 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뒤로 갈수록 어, 어? 어! 하게 되지만 결국 독자가 절대 미리 알아챌 수 있게끔 단서를 주지 않았기에 가능한 반전이므로 아쉬움이 제법 남는다.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 간만에 보는 탄탄한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등장인물들은 조금도 허황되지 않고, 심지어 악역에게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그럴 듯한 이유를 쥐어줌으로써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의 함정을 벗어난다. 특히 비밀을 간직한, 노련한 형사 마틴 기튼스와 피해의식에 젖어있는 훌리오 베가 전직 형사의 캐릭터 묘사가 좋은데, 개인적으로는 켈리의 매력에 포로가 되었다.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인생 선배로서, 때로는 경찰의 모든 수법에 통달한 노회한 형사로서 켈리는 벤을 교육시키고 성실하게 돕는다.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벤과 캐롤라인의 관계보다 오히려 켈리와의 우정이 훨씬 흡족하게 읽혔다.

 

장점만 가득 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분명히 매력 있고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다. 생생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과거의 사건을 둘러싼 현재의 흥미로운 공방전, 한없이 우울한 결말까지, 처녀작이라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대단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인작가 윌리엄 랜데이를 미국 미스터리 스릴러의 미래라고 불러도 과히 부족함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잘 모르겠지만, 믿을 만한 것 같아요. 부서장님께서도 그러셨잖아요. 그는 내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한 길을 택했다고 말이예요."

켈리가 신음을 토했다. 흠.

"다 털어놓을 걸 그랬어요. 그들도 경찰인데, 그들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 소리 말게. 우리는 보스턴 경찰청 소속이 아니야. 우린 우리 수사만 하면 되는 거라고. 자넨 그저 원하는 만큼만 들려주면 돼. 그들도 우리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있진 않으니까. 진정한 법 집행의 세계에 들어온 걸 환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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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로 2007-01-18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 괜찮은 스릴러인데 다소 찬밥 취급을 받은 거 같아요. 무엇보다 문장이 꽤나 매력적이었어요.

물만두 2007-01-18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까운 작품이죠.

jedai2000 2007-01-18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솔로님...꽤 괜찮죠. 아주 수준급이예요. 제2작은 미국에선 나왔는데, 우리나라 출판사에서는 시장성이 별로라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궁금한데...

물만두님...작년에 비교적 사장된 작품 중 가장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빛의 제국 도코노 이야기 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한 달 사이에 거의 5권이 나오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온다 리쿠의 작품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은 <흑과 다의 환상><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를 빼고는 국내에 나온 건 다 읽어본 셈인데, 재미있는 사람들 사이의 취향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온다 리쿠의 작품을 두고 두 작품 이상을 같이 좋아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녀 작품에 대한 선호도가 갈리더라 이거다. 어떤 작품은 좋고, 다른 작품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고, 그야말로 십인십색이다. 다른 이유로는 설명이 안 되고 그저 취향의 차이거니 해야지. 내 취향에는 <굽이치는 강가에서>가 가장 좋았고, <네버랜드><여섯 번째 사요코>는 볼 만했고, <삼월은 붉은 구렁을><밤의 피크닉>은 그저 그랬다.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도코노 일족'을 소재로 한 연작 단편집인 <빛의 제국>은 어땠냐고? 개인적으로는 <굽이치는 강가에서>와 같은 수준의 베스트고, 비미스터리 쪽에서는 최고로 꼽는다.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작품집은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며, 쉽사리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도코노 일족의 사람들은 각각 다른 이의 기억을 읽어내기도 하고, 천 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훤히 듣거나 보고, 바람처럼 날아다니기도 한다. 어디서 어떻게 왜 생겨났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그저 책을 읽고 약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 수록된 10개의 이야기들은 그 내용과 이끌어가는 방식, 주제는 다르지만 모두 은근히 도코노 일족의 그림자가 휘감겨 있다. 다소 짧은 단편들이라 이야기가 무르익기도 전에 끝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이 작품집은 전체로 파악해야 할 것 같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몸 부분부분이 구름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것처럼, <빛의 제국>에 수록된 각각의 작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도코노 일족의 빛과 어둠을, 그 머리를, 몸통을, 꼬리를 하나하나 보게 된다. 그렇게 모인 작은 부분들이 결국 하나의 전체를 이뤄 도코노 일족의 장엄한 모습을 완성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책 뒤표지에 '단편을 읽었는데, 이상하게 거대한 장편의 여운이 느껴진다'는 아마존 독자의 코멘트가 실려 있는데,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거라고 믿으며, 본인도 크게 동감한다. 근래 들어 이렇게 거대한 여운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살아가다가, 남과 다른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받고 스러져가는 도코노 일족의 모습. 그럼에도 찬란한 빛을 꿈꾸며 다시 살아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벅찬 감동을 받았다.

 

이야기들이 다 좋지만 역시 표제작인 '빛의 제국'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독자들이 행간에서 도코노 일족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도록 꾸민 단편들과는 달리 이 단편은 직접 도코노 일족에 얽힌 박해의 역사를 그린다. 태평양 전쟁 무렵 산으로 숨어 들어가 그들만의 공동체를 꾸민 도코노의 소년 소녀들과 일족의 지도자격인 두루미 선생님, 몇 명의 선생님들. 다들 상처를 안고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지만 서로를 위하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 그러나 전황이 패색으로 짙어지자 그들의 초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총칼을 들고 산으로 찾아온 군인들. 군인들의 손에 하나둘씩 죽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눈물을 줄줄 흘려버렸다. 결국 다시없는 비극으로 마무리된 이 이야기에는 아이들 중 한 명이 만든 기도문만 처연하게 떠돈다.

 

"우리는 억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실수로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빛이 드는 것처럼, 이윽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꽃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우리는 풀에 볼을 비비고, 바람에 머리칼을 나부끼며, 앨매를 따서 먹고, 별과 새벽을 꿈꾸면서 이 세상에서 살자. 그리고 언젠가 이 눈부신 빛이 태어난 곳으로 다 함께 손을 잡고 돌아가자."

 

10개의 이야기들은 어느 하나의 등장인물의 후일담이 다른 이야기에서 나오는 등 이어져 있는 것이 많으며, 도코노 일족 시리즈의 제2편 <민들레 공책>과 제3편 <엔드 게임>으로 확대되어 일종의 온다 리쿠표 '도코노 월드'를 이룬다. <빛의 제국>의 이야기들은 그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도 장편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그 소재가 흥미로우며 내용이 탄탄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총력전을 펼치는 심정으로 10개의 이야기들을 만들었다는데, 이야기 만드는 데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책장을 다 덮고 나면 눈 앞에 환한 빛으로 덮여 정확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몇 명의 도코노 사람들의 모습이 비친다. 그 빛은 따뜻한 느낌이 든다. 다시 살아가기 위해, 다시 사랑하기 위해 빛에 몸을 씻으며 돌아온 도코노 사람들, 그들을 더 알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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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성술 살인사건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시공사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에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전설 <점성술 살인사건>의 재출간 소식을 듣고 반가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미 국내에 3번이나 출간되었지만 듣기에 일정 분량의 번역이 누락된 불완전한 판본이었다고 합니다. 그나마도 진즉 절판되어 많은 분들이 헌책방 등을 애타게 찾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깔끔한 모양새와 꼼꼼한 새번역(이제 누락된 부분은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작가 시마다 소지가 직접 원고에 가필 수정한 부분을 반영했다니, 미스터리 애독자 여러분들에게는 전화위복이 된 셈입니다.

 

이 분야를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약간의 배경 설명을 드리자면, 본격 미스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코넌 도일의 홈즈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처럼 어떤 트릭을 가지고 독자와 두뇌싸움을 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예컨대 밀실에서 시체를 발견한 탐정이 여러 가지 조사를 하고 몇 가지 단서를 찾다가 끈으로 빗장을 걸어 열쇠구멍으로 빼내어 가짜 밀실을 만들어냈음을 확인하고 진실을 밝혀낸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서구에서 주로 유행했던 이 장르를 30년대쯤부터 일본에서도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나 사카구치 안고 등이 충실히 이식해 일본식 본격 미스터리를 만들어냅니다.

 

본격 미스터리는 주지하다시피 실제 현실과는 많이 유리된 두뇌의 유희만을 위한 장르가 되기 싶습니다. 그 점에 불만을 품은 마스모토 세이초, 모리무라 세이치 등의 작가는 자신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범죄의 트릭에서 현실성을 가미하고, 명탐정이라는 비현실적인 등장인물은 배제하고 실제로 범죄를 수사하는 형사나 기자 등을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이런 사실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정계와 재계와 결탁 혹은 지방도시를 지배하는 불온한 세력, 환경 문제 등의 사회적인 해악을 폭로하는 도구로 미스터리를 사용합니다. 이게 바로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아무래도 필치가 진지해질 수밖에 없고, 사회적, 문학적 가치도 높아 50년대부터 대단히 융성합니다. 그러나 매력있는 명탐정, 신기한 트릭 등의 고전적인 본격 미스터리의 즐거움은 사회파 미스터리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옛날 본격 미스터리의 맛을 되찾자, 는 흐름이 바로 신본격 미스터리입니다. 한 마디로 새로운 본격이라는 의미입니다.

 

<점성술 살인사건>은 1980년에 출간되어 신본격의 본격적인 도래를 알린 의미가 큰 작품입니다. 작가 시마다 소지는 본인의 역사적인 데뷔작을 비롯하여, 당시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아마추어 신본격 작가들을 수면 위로 끌어내 등단시킵니다. 시마다 소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야쓰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아비코 다케마루의 <미륵의 손바닥> 등을 지금 만나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미스터리 평론가로 활동하며 89년에는 <본격 미스터리 선언>까지 했다니 그야말로 신본격 미스터리의 태두라고 표현해도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일군의 신본격 작가들로부터 더 이상 참신한 신본격 미스터리가 나오지 않는 추세라 '신본격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 오고 있습니다. 이에 시마다 소지는 신본격의 거장답게 본인이 직접 총대를 메어 더욱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 안에서 시마다 소지의 역할은 이렇게 깊고도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작가의 위상이나 역할 등은 차치하고 독자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작품이 재미있어야 하겠죠. <점성술 살인사건>은 본격이니 사회파니 신본격이니 하는 장르 구분을 무시하고서라도, 해결하기 힘든 수수께끼를 명쾌하게 풀어내는 미스터리 소설 본연의 맛을 120 퍼센트 구현한 대단한 걸작입니다. 주요한 등장인물은 우울증에 걸려 입이 거칠지만 천재적인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와 '왓슨' 역을 맡은 이시오카입니다. 그들은 전후 일본을 들끓게 만들었던, 40년간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우메자와 가 점성술 살인사건'에 도전하는데, 거의 300페이지 가까이 두 사람의 대화로만 진행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사건의 해명에만 집중되며 로직과 트릭의 성찬입니다. 거의 황홀감까지 들 정도죠. 대화만 끝없이 나열된다면 지겹지 않겠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미타라이가 내뱉는 말들(특히 홈즈를 '까는' 장면)은 대단히 재치가 있으며,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아끼는 두 사람의 마음이 행간에 은근히 배어 있어 문장에 정감이 흐릅니다.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의 내용 설명은 할 수 없겠습니다. 이 작품에 사용된 트릭이 거의 천의무봉의 경지라 굉장히 유명한 일본의 모 미스터리 만화에서 표절했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국내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만화라 대부분의 미스터리 애호가들이 <점성술 살인사건>의 핵심 트릭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혹여 새로 읽으실 분들 중 그 만화를 읽은 분들에게 만화와 이 책을 연결시킬 수 있는 힌트가 될 수 있기에 일체의 내용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점성술 살인사건>을 이번 재출간을 포함하여 옛날 판본까지 3번을 읽었습니다. 트릭을 표절한 만화도 2번 보았구요. 하지만 트릭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 작품의 매력과 가치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읽을 때마다 1980년에 이런 트릭을 만들어낸 작가 시마다 소지에게 감탄하고 맙니다. 잔재주가 전혀 없는 시원한 정면 승부(가장 중요한 단서가 제시된 시점에서 두 번의 '독자에의 도전장'을 던집니다)로 서구와 일본을 통틀어 미스터리 역사상 가장 기발한 트릭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쪼록 미스터리 소설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이 작품을 읽기 바랍니다. 이 작품이 출간된 이후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가들은 더 이상 사회적인 문제를 미스터리와 결부시키기 위해 신문 등을 뒤적이지 않게 됐습니다. 더 참신하고 기발한 트릭을 개발하기 위해 고전 본격 미스터리를 연구하고, 두뇌를 짜내게 되었죠. <점성술 살인사건>은 한 장르를 탄생시키면서, 완성시킨 흔치 않은 경우입니다. 전설, 걸작, 역작...최상급이 수식이 필요한 작품입니다.

 

 

p.s/ 요즘 생활이 팍팍하다 보니 이 작품에 더욱 몰입되는군요. 이 작품의 주인공들에게는 생활인의 향기가 전혀 없습니다. 신기한 미스터리가 있다, 그럼 우리가 풀어볼까나. 단서를 찾으러 교토로 가야겠어, 그럼 가야지. 이렇듯 여유와 낭만, 즐거움이 있는 생활, 정말 판타지입니다. 어디 미스터리만 풀고, 읽고, 즐길 수 있는 그런 낙원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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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1-14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불허전이란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겠죠^^

jedai2000 2007-01-14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명불허전에 손색없는 훌륭한 작품이죠 ^^
 
여섯 번째 사요코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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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몇 년 전 흥행에 크게 성공해 4편까지 나온 <여고괴담>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학교라는 공간은 참으로 괴담이 나올 만한 여지가 많은 곳이다. 그놈의 성적이 뭔지, 그것 때문에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고, 선생들은 학생들을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하며 쥐 잡듯이 잡고...모든 학교마다 나름의 괴담이 존재하는 것도 학교 생활 자체가 이미 충분히 공포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섯 번째 사요코>는 지방의 한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무대로 한다. 그 학교에는 '사요코 전설'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좀 복잡하다. 학교 3학년생 중 한 명이 사요코가 된다. 사요코는 일 년 동안 남몰래 활동(?)하다가 졸업식 때 다음 사요코를 지명하므로, 사요코는 대를 이어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사요코가 무엇을 하느냐. 매 3년마다 학교 축제 때 연극을 공연해야 한다. 그러니까 1년,2년째의 사요코는 다음 사요코가 누가 될지 전달만 해야 하는 역할이고, 3년째 사요코가 무사히 연극을 마치면(즉 남들에게 적발되지 않고), 그 해의 대학입학률이 대풍년이라 이거다.
 
사요코 전설이 처음 시작된 지, 18년째 되는 해. 그러니까 여섯 번째 사요코가 연극을 해야 하는 해에 한 여학생이 전학을 온다. 그녀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쓰무라 사요코. 더욱더 공교로운 것은 불의의 사고로 죽어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세 번째 사요코와 이름이 같은 것이다. 역할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세 번째 사요코가 한이 남아 다시 돌아온 것일까? 과연 엄청난 미소녀인 쓰무라 사요코 주변에서는 기이한 일들이 연속해서 벌어지고, 총명하고 잘 생긴 전형적인 온다 리쿠표 남자 주인공인 슈는 학교에 감도는 사요코 전설의 실체와 쓰무라 사요코의 정체를 파악해나간다.
 
최근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는 온다 리쿠의 데뷔작이다. 그녀 작품의 원형이 될 만한 것들, 이를테면 학교라는 독특한 공간과 사려 깊은 미소년과 미소녀들, 묘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와 자연현상이나 학창시절 등에 대한 그녀만의 신선하고 섬세한 고찰 등이 모두 들어 있다. 온다 리쿠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독자들의 '공감'을 잘 얻어내서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한 후배와 대화를 하다가 본인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요일까지 학교에 나와 자율학습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너무 심한 거 아니냐며 어이없어 하는 후배에게 사실 그 자율학습이 좋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일요일날 집에 있으면 뭐하겠는가.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시덥잖은 농담따먹기를 하고, 선생님 시선을 피해 만화책을 읽고, 쉬는 시간마다 달려가 과자를 사 먹는 그런 일상들이 너무 좋았는걸. 온다 리쿠는 <여섯 번째 사요코>에서 학창 시절 친구들과 함께 하는 소중한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따금 이대로 영원히 자신의 내면에 각인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장면들이 있다. 지금이 그렇다. 언젠가 분명 이런 시간을, 이렇게 옆에서 멋대가리 없는 교복을 입고 무방비 상태의 얼굴로 이야기를 걸어오는 유키오의 목소리를 그리운 마음으로 떠올릴 순간이 올 것이다(...) 그보다 넷이서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그는 마음 한구석으로 알고 있었다. 설사 네 명이 대학생이 되어 다시 만난다 해도 두 번 다시 이런 일체감, 네 명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다는 편안함, 세상 질서의 일부가 된 듯한 충족감을 맛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누구든 학창시절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므로 작가가 담담히 털어놓는 학창시절의 이 우정에 대해 깊이 공감하게 된다. 작가와 독자와의 끈은 여기서 단단히 이어진다. 이 공감을 바탕으로 온다 리쿠는 우리 모두가 통과해왔던 지난 날의 상큼한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과연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답다. 그러나 <여섯 번째 사요코>는 고등학교 시절의 우정에 대한 찬가만은 아니다. 학교괴담을 소재로 한 작품답게 분명히 섬뜩한 공포의 순간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절정 부분인 여섯 번째 사요코의 연극 장면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전교생이 모인 강당에서 불을 끄고 펼쳐지는 연극은 개인이 아닌 집단이 조성하는 무의식적인 공포감을 자극하며, 실제로 무서운 것이 아님에도 한 명이 무서워하면 그 무서움이 전염되는 '공포의 전염'을 아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사실상의 클라이맥스로 손색이 없으며, 그동안 보아온 온다 리쿠의 작품을 통틀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데뷔작이라 그런지 약간 갈팡질팡하는 흔적이 보인다는 점인데, 아니 어쩌면 이 작가만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네버랜드>라는 작품에서도 애초 구상과 달리 쓰다보니 주제와 내용이 바뀌웠다고 하더니, <여섯 번째 사요코>에서도 그런 흔적이 보인다. <여섯 번째 사요코>에서는 사요코가 한바탕 독자들을 떨게 만드는 호러소설(연극 장면에서 이 부분은 성취된다)의 요소와 4명의 남녀 학생들이 소박한 애정과 우정을 나누는 모습, 심지어 사요코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함을 암시하는 공포스런 장면과 등장인물들의 유머러스한 말장난까지 정신없이 섞여있어 조금 혼란스럽다. 물론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모든 일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만 그간의 모든 의문이 시원하게 해소되지는 못한다. 이것(호러소설)도 저것(청춘소설)도 놓치기 싫어 이것저것을 모두 담으려 시도한 작가의 마음은 알겠다만, 각각 이것과 저것의 매력을 일정 부분 잃은 사실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질적인 두 요소의 간극이 제법 느껴져, 데뷔작다운 부족함도 약간은 눈에 띈다는 결론을 내린다.
 
 
p.s/ 그간 온다 리쿠의 작품을 거쳐간 리쿠걸(?) 중에서 쓰무라 사요코가 최강의 미소녀가 아닐까?
등장인물 중 한 명의 독백이다.
"정말 예쁘구나. 앞으로 해가 갈수록 더 예뻐지겠지만 지금은 지금대로 최고로 예뻐. 이렇게 예쁜 아이를 나 혼자 친구로 독점하다니 왠지 벌이라도 받을 것 같아."
도대체 예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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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hand 2007-01-04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 님이 p.s.로 남기신 내용, 과도한 미소녀, 미소년 들의 등장이 아마도 제게 온다 리쿠를 영 '가까이 하기엔 너무먼 당신'으로 남게 하는 이유인것 같아요. 이건 뭐 순정 만화도 아니고... 닭살 돋는 느낌이라 제겐 좀 버거워요 하하. 12월달에 나온 다섯 작품 중 제가 읽기에 제일 재밌는게 뭘까요?

jedai2000 2007-01-04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소녀가 전혀 안 나오는 <네버랜드>가 있겠네요 ^^ 남자 4명이 합숙하는 거라서요. 미스터리 심리 드라마로 나가다가 감동 청춘소설로 바뀌는 게 좀 아쉽지만 재미있고 좋은 소설입니다. 과도한 미소년, 미소녀들의 등장 때문에 소설이 좀 가벼워 보이기도 하는데, 워낙 작가가 그런 걸 즐기는 듯 해요 ^^
 
미륵의 손바닥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윤덕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아비코 다케마루의 작품이다. 올해 그렇게 많이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흥분되는 걸 보면 나를 비롯한 미스터리 마니아의 호기심은 대단한 것 같다. 우리(미스터리 마니아)는 배고픈 포식동물이다. 우린 만족을 모른다. 아무리 쏟아져도 전부 먹어치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미륵의 손바닥>을 먹어치울 텐데,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는 신본격 작가군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야쓰지 유키토의 대학 후배로 같은 교토대 미스터리 연구 동호회의 멤버라 신본격 1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작 <살육에 이르는 병> 외에도 사운드노벨의 효시가 된 <카마이타치의 밤>의 시나리오 작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미륵의 손바닥>을 낸 한스미디어 출판사는 같은 신본격 작품 중에서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로 많은 사랑을 받은 바 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이 매우 비슷하다. <벚꽃 지는..>이 판단력이 흐려진 노인에게 상품을 강매하는 '호라이 클럽'에 잠입해 조사하는 것처럼, <미륵의 손바닥>에서는 신흥 종교 교단 '구원의 손길'에 잠입하는 두 주인공이 나온다. <벚꽃 지는..>처럼 결말의 반전이 핵심이며, 그 반전이 독자에게 익숙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서 나온다는 것도 매우 비슷하다.

 

아내가 행방불명된 교사 교이치, 그는 원조교제를 하다 적발되어 아내와의 사이가 소원해졌고 어느 날 집에 들어와보니 아내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우연히 아내가 '미륵'이라는 생불을 섬기는 구원의 손길이라는 종교 단체에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 교이치. 한편 형사 에비하라는 재혼한 아내가 러브호텔에서 시체로 발견되자 경악한다. 복수심에 불타는 그는 살인범을 직접 처치할 생각으로 단독 수사에 나서다 아내의 방에서 30만엔 짜리 미륵상을 발견하고 그것이 구원의 손길 교단에서 신도들에게 판매한 것임을 알게 된다.

 

작품은 '교사'와 '형사'라는 이름으로 한 꼭지씩 병행되며 화자도 꼭지마다 교사와 형사로 바뀐다. 공통의 목적을 가진 두 남자는 필연적으로 만나서 공동 행동을 하게 되고 최종장 '미륵'에서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게 된다. 짧은 분량에 술술 읽히는 문장(문장력에는 재주가 별로 없는 작가다)이라 금세 끝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 가장 기대되는 최후의 반전을 굉장히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독자의 상식과 고정관념의 뒷통수를 때리는 기발한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독자에게 모든 단서, 등장인물들의 모든 행적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어쩔 수 없는 반칙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결말이 느닷없고, 약간 허무하다. 한마디로 미스터리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인 독자와의 '공정한' 두뇌싸움을 포기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미륵의 정체도 너무 평범한 느낌이고 수사소설로서도 그쪽 분야에 뛰어난 다카무라 가오루나 요코야마 히데오 등의 치밀함이 결여되어 있어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플롯이 나쁘지 않고, 반전도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훨씬 좋아졌을 작품이라 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대표작이라는 <살육에 이르는 병>을 보기 전까지는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에 대한 평가는 어쩔 수 없이 박해질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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