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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성술 살인사건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시공사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에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전설 <점성술 살인사건>의 재출간 소식을 듣고 반가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미 국내에 3번이나 출간되었지만 듣기에 일정 분량의 번역이 누락된 불완전한 판본이었다고 합니다. 그나마도 진즉 절판되어 많은 분들이 헌책방 등을 애타게 찾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깔끔한 모양새와 꼼꼼한 새번역(이제 누락된 부분은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작가 시마다 소지가 직접 원고에 가필 수정한 부분을 반영했다니, 미스터리 애독자 여러분들에게는 전화위복이 된 셈입니다.
이 분야를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약간의 배경 설명을 드리자면, 본격 미스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읽어보았을 코넌 도일의 홈즈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처럼 어떤 트릭을 가지고 독자와 두뇌싸움을 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예컨대 밀실에서 시체를 발견한 탐정이 여러 가지 조사를 하고 몇 가지 단서를 찾다가 끈으로 빗장을 걸어 열쇠구멍으로 빼내어 가짜 밀실을 만들어냈음을 확인하고 진실을 밝혀낸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서구에서 주로 유행했던 이 장르를 30년대쯤부터 일본에서도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나 사카구치 안고 등이 충실히 이식해 일본식 본격 미스터리를 만들어냅니다.
본격 미스터리는 주지하다시피 실제 현실과는 많이 유리된 두뇌의 유희만을 위한 장르가 되기 싶습니다. 그 점에 불만을 품은 마스모토 세이초, 모리무라 세이치 등의 작가는 자신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범죄의 트릭에서 현실성을 가미하고, 명탐정이라는 비현실적인 등장인물은 배제하고 실제로 범죄를 수사하는 형사나 기자 등을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이런 사실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정계와 재계와 결탁 혹은 지방도시를 지배하는 불온한 세력, 환경 문제 등의 사회적인 해악을 폭로하는 도구로 미스터리를 사용합니다. 이게 바로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아무래도 필치가 진지해질 수밖에 없고, 사회적, 문학적 가치도 높아 50년대부터 대단히 융성합니다. 그러나 매력있는 명탐정, 신기한 트릭 등의 고전적인 본격 미스터리의 즐거움은 사회파 미스터리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옛날 본격 미스터리의 맛을 되찾자, 는 흐름이 바로 신본격 미스터리입니다. 한 마디로 새로운 본격이라는 의미입니다.
<점성술 살인사건>은 1980년에 출간되어 신본격의 본격적인 도래를 알린 의미가 큰 작품입니다. 작가 시마다 소지는 본인의 역사적인 데뷔작을 비롯하여, 당시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아마추어 신본격 작가들을 수면 위로 끌어내 등단시킵니다. 시마다 소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야쓰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아비코 다케마루의 <미륵의 손바닥> 등을 지금 만나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미스터리 평론가로 활동하며 89년에는 <본격 미스터리 선언>까지 했다니 그야말로 신본격 미스터리의 태두라고 표현해도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일군의 신본격 작가들로부터 더 이상 참신한 신본격 미스터리가 나오지 않는 추세라 '신본격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 오고 있습니다. 이에 시마다 소지는 신본격의 거장답게 본인이 직접 총대를 메어 더욱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 안에서 시마다 소지의 역할은 이렇게 깊고도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작가의 위상이나 역할 등은 차치하고 독자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작품이 재미있어야 하겠죠. <점성술 살인사건>은 본격이니 사회파니 신본격이니 하는 장르 구분을 무시하고서라도, 해결하기 힘든 수수께끼를 명쾌하게 풀어내는 미스터리 소설 본연의 맛을 120 퍼센트 구현한 대단한 걸작입니다. 주요한 등장인물은 우울증에 걸려 입이 거칠지만 천재적인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와 '왓슨' 역을 맡은 이시오카입니다. 그들은 전후 일본을 들끓게 만들었던, 40년간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우메자와 가 점성술 살인사건'에 도전하는데, 거의 300페이지 가까이 두 사람의 대화로만 진행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사건의 해명에만 집중되며 로직과 트릭의 성찬입니다. 거의 황홀감까지 들 정도죠. 대화만 끝없이 나열된다면 지겹지 않겠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미타라이가 내뱉는 말들(특히 홈즈를 '까는' 장면)은 대단히 재치가 있으며,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아끼는 두 사람의 마음이 행간에 은근히 배어 있어 문장에 정감이 흐릅니다.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의 내용 설명은 할 수 없겠습니다. 이 작품에 사용된 트릭이 거의 천의무봉의 경지라 굉장히 유명한 일본의 모 미스터리 만화에서 표절했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국내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만화라 대부분의 미스터리 애호가들이 <점성술 살인사건>의 핵심 트릭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혹여 새로 읽으실 분들 중 그 만화를 읽은 분들에게 만화와 이 책을 연결시킬 수 있는 힌트가 될 수 있기에 일체의 내용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점성술 살인사건>을 이번 재출간을 포함하여 옛날 판본까지 3번을 읽었습니다. 트릭을 표절한 만화도 2번 보았구요. 하지만 트릭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 작품의 매력과 가치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읽을 때마다 1980년에 이런 트릭을 만들어낸 작가 시마다 소지에게 감탄하고 맙니다. 잔재주가 전혀 없는 시원한 정면 승부(가장 중요한 단서가 제시된 시점에서 두 번의 '독자에의 도전장'을 던집니다)로 서구와 일본을 통틀어 미스터리 역사상 가장 기발한 트릭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쪼록 미스터리 소설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이 작품을 읽기 바랍니다. 이 작품이 출간된 이후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가들은 더 이상 사회적인 문제를 미스터리와 결부시키기 위해 신문 등을 뒤적이지 않게 됐습니다. 더 참신하고 기발한 트릭을 개발하기 위해 고전 본격 미스터리를 연구하고, 두뇌를 짜내게 되었죠. <점성술 살인사건>은 한 장르를 탄생시키면서, 완성시킨 흔치 않은 경우입니다. 전설, 걸작, 역작...최상급이 수식이 필요한 작품입니다.
p.s/ 요즘 생활이 팍팍하다 보니 이 작품에 더욱 몰입되는군요. 이 작품의 주인공들에게는 생활인의 향기가 전혀 없습니다. 신기한 미스터리가 있다, 그럼 우리가 풀어볼까나. 단서를 찾으러 교토로 가야겠어, 그럼 가야지. 이렇듯 여유와 낭만, 즐거움이 있는 생활, 정말 판타지입니다. 어디 미스터리만 풀고, 읽고, 즐길 수 있는 그런 낙원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