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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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어본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한여름에 '따끈따끈'이라니 더워 보일 수 있겠지만 여름에는 역시 등골이 오싹한 스릴러가 제격 아닌가. 영미 독서계의 대표 상품인 스릴러는 몇 편의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통해 드라마틱한 유행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 옛날 <007> 시대에는 모든 작가가 양복 입은 스파이를 썼으며, <양들의 침묵> 이후에는 천재 사이코 빌런이 출연하는 사이코 스릴러가 대세였다. 한 10여 년 전의 <다빈치 코드> 시대에는 더 이상 어떤 역사적 음모론도 나오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팩션들이 서점에 쫙 깔렸었고. 80-90년대의 홍콩영화처럼 소설 하나가 터지면 아류작이 쏟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상업 출판시장의 흐름인 것 같다.

제일 최근의 유행은 아무래도 <나를 찾아줘>가 만들어낸 도메스틱 스릴러 열풍일 것이다.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음모, 살인이 주요 테마인 이 장르는 특히 전 세계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독서 시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20-40대 여성들의 구미를 완전히 사로잡아 몇 년째 인기가 식지 않고 있는 듯하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해당 여성층은 밀리터리나 스파이, 액션, 사이코, 경찰물보다는 연애나 부부관계, 가정에서의 학대 등 현실적인 삶에 밀착된 얘기에 더욱 관심이 많아 보여 도메스틱 스릴러의 유행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예전 홍콩영화나 팩션이 몰락한 게 아류작의 범람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친 쏠림 현상은 확실히 이 장르에서 독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이름을 댈 순 없지만 모 작품은 내가 읽어본 2,000편 넘는 미스터리 소설 중 최악이었다(아, 실명 까고 싶다).

사실 도메스틱 스릴러에서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주로 가정, 애인,친구 등이 사악한 실체를 드러내며 반전이 완성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대가족도 아니고 요즘은 부부 한 쌍에 많아야 애 하나, 심지어 1인 가족도 나를 포함해 즐비한데 기껏 해야 서너 명의 용의자 안에서 독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을 만들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니 늘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남편, 아내, 친구, 애인이 사실은 나쁜 놈이었다, 로 끝나기 일쑤인 것이다. 다만 범인이나 반전은 뻔해도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고, 트릭이나 미스디렉션 등 추리적인 장치가 빼어나다면 그건 또 다른 얘기이긴 하다. 그런 경우라면 고만고만한 아류작 수준을 뛰어넘어 한 편의 추리 스릴러로써 충분히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홍콩영화 팬들이 <영웅본색>만큼이나 <첩혈쌍웅>을 좋아하는 것처럼.

반갑게도 <사일런트 페이션트>가 딱 그런 작품이었다. 남편을 총기로 살해하고 몇 년째 입을 닫은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려 노력하는 정신과 의사가 나오는 중심 줄거리는 뻔한 편인데 트릭에서 독자를 완전히 한 방 먹인다. 실은 일본의 신본격파가 자주 쓰는 어찌 보면 좀 평범한 트릭인데 이게 서양 스릴러에서 나오니까 닳고 닳은 추리소설 독자인 나조차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작가가 일본 추리소설을 넓게 탐독했을 리도 없으니 아마 순전히 본인의 창의력에 의해 트릭을 만들어낸 것일 텐데, 이런 류의 트릭을 처음 봤을 가능성이 높은 서양 독자들은 완벽하게 넉다운,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신인 작가의 데뷔작이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도 하다.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이런 류의 트릭은 영화화가 어렵다는 게 통설이지만 이 작품은 편집에서 잘 오려붙이면 충분히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데이비드 핀처 같은 감독이 제시카 차스테인, 벤 위쇼 혹은 에디 레드메인 진용으로 만들어내면 박스오피스도 점령하지 않을까. 실제 정신병원에서 몇 년이나 일했다는 작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쏟아부으려는 신인의 치기도 범하지 않고 깔끔하게 플롯 위주로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알케스티스'가 핵심 제제이지만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빠지지도 않는다. 오직 흥미로운 이야기로만 승부하는 이야기계의 새로운 승부사 출현이다. 앞으로의 행보가 몹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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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 - 이노우에 마기

 

 

 

 

 

 

 

 

 

 

 

 

 

 

기적의 존재를 믿는 탐정 우에오로 조. 그는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살인사건의 여러 가설을 전부 검토하고, 모든 가능성을 낱낱이 제거해 나간다. 최후의 최후까지 파헤쳐봐도 끝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결국 기적이 존재함이 증명되는 것이 아닌가! 기적으로 보이는 불가능범죄 속의 트릭을 밝혀내고, 불가해한 기적을 인간계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게 일반적인 탐정의 역할이라면 이 소설은 정반대다. 이 참신한 역발상이 제대로 먹혔다. 예전 <스트리트 파이터>나 <철권>처럼 대전게임의 형식을 빌어 기적을 믿는 탐정에게 속속 도전하는 능력자들. 그중에는 전직 검사도 있고, 프로페셔널 킬러 같은 범죄의 전문가도 있다. 그들은 현장을 분석해 다양한 물리 법칙 등을 내세워 몇 가지 그럴듯한 가설을 내놓지만 끝까지 다 들은 탐정은 오직 이렇게 말할 뿐이다.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가설들을 논리적으로 파해하는 탐정의 활약이 재미 포인트다. 즉, 도전자는 트릭을 풀려 하지만 탐정이라는 작자가 어떻게든 트릭을 미궁으로 남기려 하는 역할의 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다(보통 추리소설에서탐정의 도전자는 대개 범인으로서 트릭이 밝혀지면 끝장이다). 기발한 발상으로 한계에 달한 본격 추리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린 작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다만 한 가지 사건을 두고 여러 개의 흥미로운 가설이 세워지는 이런 추리소설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탐정의 진짜 해결 방법이 가장 강력해야 하는데 그 점이 살짝 아쉽다.

 

4위 <진실의 10미터 앞> - 요네자와 호노부

 

 

 

 

 

 

 

 

 

 

 

 

 

 

일상계 학원 미스터리로 시작해 본격 추리, 중세풍 판타지를 가미한 추리소설 등 손 대는 장르마다 성공시키고 있는 일본 추리소설계의 기린아 요네자와 호노부의 단편집이다. 전작 <왕과 서커스>에서 활약한 여성 기자가 일본의 각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취재하는 도중에 밝혀지는 사건의 진짜 얼굴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다치아리이 마치는 대단한 추리력의 소유자로 사건 관계자에게 듣는 사소한 몇 마디로도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는데 전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섯 개의 수록작 중 잡지 연재 사정상 급하게 써야 했던 '정의로운 사나이' 말고는 대부분 수준이 높고, '고이가사네 정사'와 '나이프를 잃은 추억 속에', '이름을 새기는 죽음' 같은 작품들은 최상급이다. 특히 '고이가사네 정사'는 2010년대 일본 단편 추리소설을 모두 통틀어서도 버금 가는 작품이 없어 보인다. 기자가 주인공이다 보니 취재 윤리 및 기자로서의 마음가짐 등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통찰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요네자와를 오늘의 요네자와로 만들어준 독특한 장점, 즉 책장을 다 덮고 나서도 한동안은 작가가 그린 세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문학적 여운'이 짧은 이야기들 속에서도 여전하다는 점을 확인해 더욱 반가웠다.

 

 

3위 시인장의 살인 - 이마무라 마사히로

 

 

 

 

 

 

 

 

 

 

 

 

 

 

시 쓰는 저택에서의 살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인은 살아 있는 시체, 좀비를 말하는 거였다. 대형 펜션의 1층을 점령해버린 좀비 떼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대학생들이 2층과 3층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지만 당연히(?) 연속 밀실 살인사건이 벌어져 탐정 역의 여학생과 '왓슨' 역의 남학생이 수사에 나선다는 내용이다. 산불 같은 대형 화재나 호우, 눈보라 등 주로 자연재해로 만들었던 클로즈드 서클을 좀비 떼로 만들었다는 게 독특하다. 더구나 좀비들이 단순히 등장인물들을 고립시키거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가가 부여한 좀비만의 특성들을 활용해 밀실 트릭의 주재료로 쓰였다는 점에서 흠 잡을 데 없는 본격 추리소설이다(단서로 쓰이는 좀비의 특성들은 작가가 공정하게 죄다 공개했다). 세 개의 밀실 살인은 답을 알고 나면 늘 그렇듯이 왜 내가 이 간단한 걸 몰랐을까 하면서 애꿎은 머리를 쥐어박게 되지만 간단한 만큼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답이라서 뒷맛이 좋다. 다만 추리소설을 처음 써봤다는 작가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문장력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인상비평 한 마디로 처리하는 게 아쉽긴 하다. 예를 들어 A라는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생겼다고 묘사하면 그 여자는 진짜로 신경질적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질적이다. 이는 캐릭터의 외면은 물론 내면까지도 한두 컷으로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에서 쓰는 기법이지 소설에서는 좀 더 정교한 인물 묘사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슷하게 수많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한두 장면에서 길지 않게 묘사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생생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내공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비라는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서브컬처를 적절하게 끌어와 추리소설의 영역을 한층 확장시키고, 원래 독자와 작가의 두뇌싸움이라는 유희에서 출발한 추리소설의 한바탕 놀이 정신을 무리없이 계승한 작가의 행보는 크게 주목할 만하다.

 

 

2위 <거울 속 외딴 성> - 츠지무라 미츠키

 

 

 

 

 

 

 

 

 

 

 

 

 

 

데뷔작 <차가운 학교는 멈추지 않는다>부터 학원물에서 강점을 보여왔던 츠지무라 미츠키의 학원물 완성작이 아닐까 싶다. 요즘 한국에서도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등교거부 히키코모리를 주요 제재로 삼아 등교거부 학생들의 연대와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또래들이 전부 학교에 가고 아무도 없는 텅 빈 방 안에서 두 배의 고독을 느끼는 등교거부 학생 고코로, 그런데 방 안의 거울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오고 그 거울에 손을 대보자 낯선 성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 성에는 자신과 비슷한 여러 명의 등교거부 학생들이 있고, 늑대 가면을 쓴 신비로운 소녀가 1년 동안 이 성에서 숨겨진 열쇠를 찾으면 소원을 이뤄준다고 선언한다. <나니아 연대기>스러운 전개를 기반으로 한 판타지 소설이지만 등교거부 학생들이 겪는 여러 차별과 학교에서의 왕따 등은 전혀 '판타지'가 아닌 현실이다. 오랜 취재가 선행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실감 나는 묘사에서 학교가 얼마나 병든 곳인지, 그 학교에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청소년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장르 구분을 하자면 어쩔 수 없이 판타지라고 해야겠지만 몇 가지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 미스터리들은 공정한 단서와 논리 등 충분히 '추리소설적'으로 풀어 나가므로 추리소설 랭킹에 올라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여러 설명이 필요 없는 정말 감동적인 소설이며 여러 번 눈물을 닦게 되는 강력 최루탄이기도 하다. 1위만 없었다면 단연 올해 최고의 작품!

 

 

1위 <맥파이 살인사건> - 앤서니 호로비츠

 

 

 

 

 

 

 

 

 

 

 

 

 

 

사이코 스릴러나 형사물, 요즘 대세인 도메스틱 스릴러 등에 밀려 어느새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어버린 영미 퍼즐 미스터리의 놀라운 반격이다. 오랜만에 영미에서 정통 본격 추리소설이 나온 것만 해도 반가운 판에 이 정도 완성도라니 정말이지 감탄을 넘어 감격했다. 애거서 크리스티를 모티브로 삼은 소설이지만 실제 크리스티가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주로 셜록 홈스나 007 등 기존 유명작들의 후속작을 써서 생계를 이루는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작가라고 폄하했던(글쓴이가) 앤서니 호로비츠였는데, 정작 자기만의 얘기에서 이렇게 장쾌한 한 방을 날릴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특히 아티쿠스 퓐트라는 포와로를 방불케 하는 고전적인 미스터리를 쓰는 작가가 현실에서도 살해당하면서 극 중에서의 살인과 현실에서의 살인이라는 두 가지 미스터리가 동시에 굴러가는 구성이 절묘하다. 두 사건 다 인상적인 해결 장면이 기다리고 있으며 어느 하나 완성도 면에서 빠지는 게 없다. 물론 포와로 시리즈를 고스란히 재현한 극 중에서의 살인을 독자들은 더 좋아할 것 같긴 하다만, 현실에서의 살인도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회장 매튜 프리처드(크리스티 외손자) 등 실제 인물도 등장하고 출판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편집자 출신인 글쓴이는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살해 동기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게 추리소설 애호가이자 편집자로서 나 같아도 죽였을 것 같다, 하하). 한 가지 아쉬운 건 핵심 단서 중 하나에서 편집이 조금 아쉽다는 것. 원서를 봐야겠지만 내 생각에 편집이 조금 잘못 돼서 독자들이 헷갈릴 여지가 있는 단서가 하나 있다. 물론 감상의 재미를 결정적으로 해치지는 않지만 워낙 좋은 작품에서는 자그마한 흠도 크게 보이게 마련이니까. 마침내 자기만의 세계를 일궈낸 앤서니 호로비츠의 신작을 계속 만나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호로비츠 작가님, 충성! 충성!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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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경부터 올해 3월 말까지는 생애에서 가장 심한 슬럼프였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고, 매사에 의욕이 안 생겨서 글 한 줄도 쓰기 힘들었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NBA 게임이었지만 예전에는 글을 충분히 쓰고 게임 한두 시간으로 가볍게 머리 식히는 정도였다면, 이번 슬럼프 기간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만 하면 편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작년에 나온 책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해 다른 책을 또 쓰면 뭐하나, 어차피 망할 텐데 하면서 기분이 영 끓어오르지 않은 탓도 있고 크게 의욕을 떨어뜨릴 만한 개인사도 있어 도통 집중이 힘들었다. 반년 가까이 무위도식해 통장이 거의 말라붙어가는 3월 말에 예전 친구가 생일선물로 주었던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를 무심코 읽어보았다.

 

 

 

 

 

 

 

 

 

 

 

 

 

 

<소설가의 각오 - 마루야마 겐지>

 

나도 이 에세이 말고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는데 아무래도 흔히 말하는 순문학 작가 같았다. 돈이 되는 대중문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생활비를 줄이느라 산 속에 틀어박혀서 본인이 쓰고 싶은 것만 쓴다는데 비장한 각오가 정말이지 남다르더라.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순문학이 인기가 별로 없어 겐지 님의 장편소설은 평균 2만 권 정도 팔린다는데 아내까지 있으니 역시나 일본 기준으로도 생계가 빠듯할 터이다. 모자라는 생활비는 빨리 돈을 땡길(?) 수 있는 단편으로 메꾼다지만 이것도 쓸 수 있는 절대량에는 한계가 분명해 결코 넉넉한 환경은 못 만든다. 종목은 달라도 여기서 강한 동질감이^^;; 겐지 님은 '작가는 돈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안 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작가가 돈이 너무 많으면 주저앉아서 글 쓰고 싶겠는가, 놀러다니고 싶지. 한편으로 돈이 너무 없으면 기본적인 생계가 염려되어 어떤 아이디어도 빛을 잃는다는 말에 크게 공감이 가더군. 나만 해도 큰맘먹고 책상에 앉아서 몇 줄 쓰다가도 당장 다음 달은 어떻게 버티지? 하는 생각에 골몰하기 일쑤이니까.

 

아이디어의 빛을 잃지 않고 안정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마루야마 겐지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조건인 식비, 의복비 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산에서 은둔하는 것이다. 이렇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졸라매도 모아둔 돈은 없어 아내를 위한 몇 년 간의 생계비를 제외하고 본인은 객사할 각오를 하고 있다는 얘기에 괜시리 숙연해졌다. 과연 소설가는 이 정도 각오를 가지지 못하면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것인가.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대형 추리소설가인 모리 히로시의 <작가의 수지>도 읽었다. 이 양반은 마루야마 겐지와는 대조적으로 원래 조교수였다가 돈을 좀 만들기 위해 추리소설을 썼고 19년 동안 무려 278권의 소설을 썼다. 현재는 과도한 버닝으로 창작열이 하얗게 불탔는지 은퇴 상태. 히로시 님의 얘기에도 귀 기울일 구석이 많았다. 부업이 아니라 전업이라면 한 권, 한 권의 성패에 좌절하지 말고 무조건 빨리 많이 쓰라는 것. 아무리 안 팔려도 출판사에서 기본적인 인세나 계약금 등은 나오기 마련이니까 1년에 다섯 권만 써도 최소 생계비는 되고, 그중에 운 좋게 영화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판권을 파는 작품이 하나라도 나온다면 그 해 살림은 확 피는 것이다. 하긴 1년에 10편 이상의 소설을 썼으니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히 있어 보인다.

 

 

 

 

 

 

 

 

 

 

 

 

 

 

<모리 히로시 - 작가의 수지>

 

모리 히로시는 데뷔작인 <모든 것이 F가 된다>부터 초대박을 쳤으니 지금보다 출간 페이스를 줄였더라도 충분히 떵떵거리고 잘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데뷔작이 망했더라도 1년에 열 권 이상을 써냈으니 평균적인 직장인보다는 수입이 좋았을 터. 한마디로 작가는 어떤 상황이 닥치든 닥치고 써내려가서 물량공세로 다양한 기회를 만들라는 조언이었다. 어찌 보면 두 책에서 작가가 살아가는 두 극단을 본 듯해 매우 흥미로웠다. 작가는 원래 가난한 게 숙명이니까 구도자에 가까운 자세로 욕망을 최대한 버리고 본인이 쓰고 싶은 글만 쓰든가, 어차피 책도 상품이니 독자가 좋아하는 얘기를 최대한 많이 생산해서 한 재산 일구든가. 두 얘기 중에 어느 것이 맞다고는 내가 판단할 수 없을 것 같고, 둘 다 충분히 공감이 간다. 어쨌든 두 얘기의 공통점은 일단 쓰라는 것. 반년을 펑펑 놀아버린 나에게는 가슴이 뜨끔해질 수밖에 없는 일침이었다. 

 

 

두 책을 읽고 새삼 지나버린 반년이 아쉽고 후회스러웠다. 반년이라면 장편 하나를 완성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는데ㅠ.,ㅠ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급우울해졌다. 그래서 가뜩이나 휑한 통장을 또다시 줄줄 짜서 무작정 호치민으로 떠났다(응?). 뭔가 마음을 다잡고 힘을 좀 얻기 위해서 일단 여기 아닌 어딘가로 떠난 것인데, 막상 해외로 나가니 그저 신나기만 해서 마음 다잡기보다는 단순 관광에 가까웠다^^;; 사철 푸르고 뜨거운 베트남의 공기가 어찌나 좋던지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커피 한 잔만 사려도 지갑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베트남에서는 배가 터지게 먹어도 2만 원 쓰기가 어려우니 백만장자가 된 기분으로 동(베트남 화폐)을 펑펑 뿌리고 왔다. 음식은 정말 맛있었고 달디단 커피도 내 입맛에 딱이었다. 겨우 2박3일이라는 게 눈물이 나게 아쉬었다만 쥐어짠 통장에서 흘러내린 물이 그것밖에 안 돼서ㅠ.,ㅠ

 

돌아오고 나서는 한층 담담하게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지난 반년의 방탕과 무위도식의 벌을 받아야 할 시간이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더 이상 두세 달도 버틸 여력이 없다. 이제 산으로 들어가든가, 고시원을 잡고 남은 2018년 동안 다섯 권을 쓰든가, 늙은 편집자를 써주는 곳이 있다면 취직이라도 해야 한다. 새삼 지나버린 반년과 그 시간 동안 할 수 있던 다양한 기회들이 아쉽고 후회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게임은 인생의 적, 게임을 죽이자!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는 소설에 좀 더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겐지 님이나 히로시 님처럼 치열하게 써봐야겠다는 다짐이다. 언제 상황이 좋아져서 다시 작업에 매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꾸역꾸역 다시 해봐야지. 몇 주 전에 한 신문에서 요 네스뵈 작가가 '소설을 쓰고 싶은 직장인이 시간이 없다며 투덜댈 때 나는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쓰라는 조언을 한다'는 말을 읽었는데, 혹시라도 취업을 한다면 그렇게라도 해봐야지. 아무튼 다시는 슬럼프 따위의 핑계를 대고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분위기가 넘 무거워진 듯해 깜짝 퀴즈. 두 게시판에서 다른 점을 찾아보시오.

선물은 재정 상태가 안 좋은 관계로 없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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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0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기타쿠니 고지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요즘 서점에서 꽤 많이 만나볼 수 있는 일본산 일상 미스터리 계열의 작품이다. 흔히 일상이라고 하면 날마다 반복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들의 집합을 말할 텐데, 비일상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미스터리하고 과연 합이 맞을까? 이 참신한 시도를 처음 해낸 사람이 80년대 말의 기타무라 가오루이다. 그는 데뷔작 <하늘을 나는 말>에서 평범한 여대생이 논리력과 추리력이 비범한 예능인 아재(?)와 일상 속에 숨은 미스터리들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을 써냈고, 이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서 일약 '일상 미스터리'의 창시자가 되었다. 사실 영미권에서 그나마 일상 미스터리와 비슷하다고 할 만한 코지 미스터리도 분위기는 포근할지언정 살인이나 강력 범죄가 나오지 않는 경우란 거의 없다. 하지만 일본의 일상 미스터리는 홍차가게에서 여대생들이 홍차에 설탕을 일고여덟 스푼이나 때려넣는 이유를 밝힌다거나 초등학생이 읽지도 못하는 초대형 영어사전을 들고 학교에 간다거나 하는 그야말로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소소한 사건들을 해결하기 때문에 확실히 일본에서만 존재하는 유니크한 장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작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도 이러한 일상 미스터리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 전형적인 소도시를 배경으로 별 볼일 없는 변호사(변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별 볼일이 없기가 힘들긴 하다만)와 그의 조수 격이지만 실제로는 탐정 역할을 도맡는 동생이 동네의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는 연작 단편집이다. 명색이 일상이라면서 탐정의 성격은 본격 추리소설처럼 광인에 가까운 괴짜 일색이라면 분위기가 맞지 않으니까 일상 미스터리의 탐정은 비교적 정상인(?)이나 건실한 생활인이 많다. 하지만 매일 지하철에서 만날 것 같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사건을 해결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반드시 독자들을 사로잡을 만한 개성이나 특별한 추리 기법, 독특한 분위기 등이 있어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터. 그래서 일상 미스터리의 탐정은 서점 직원이라서 서지학에 강하다거나 꽃집 주인이라서 꽃에 대해 잘 알아 그 전문지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식으로 평범함의 함정을 피해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에서의 탐정 역인 동생은 동서고금의 명언 덕후라서 사건 해결 과정 곳곳에 명언을 쏟아놓는다. 그밖에 주인공들이 기거하는 카페에 고양이가 여러 마리 있고, 수천 권의 만화책이 있는 것 또한 독자의 호감을 사고 공감대를 이끌어내기 위한 작가의 유인책(?)이 아닐까 싶다.

 

다루는 사건은 일상 미스터리답게 강력범죄는 일절 없고 소소한 편이지만 미스터리로서의 완성도는 크게 빠지지 않아 만족스러웠다. 아무리 우리네 일상 속의 가벼운 미스터리를 다루는 이야기라고 해도 추리소설은 추리소설다워야 한다. 한마디로 공정한 단서를 제공하고, 해답을 도출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치밀한 논리와 추리가 없다면 아무리 따뜻하고 편안한 이야기라도 추리소설로서는 실격이라는 말이다. 다행히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은 위에 언급한 공정한 단서와 논리의 견고성, 단숨에 정답으로 도약하는 추리의 탁월함이 만만치 않았다. 다른 일상 미스터리들과 비교해도 다소 가벼운 분위기에 별 기대없이 책장을 넘겼다가 의외로 추리 파트는 날카로워 읽는 맛이 있었다고 할까, 작가가 본격이나 하드보일드에도 손을 댄 적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 추리에 좀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그 작품들도 괜찮은 완성도를 보이지 않을까 상상이 된다. 

 

평범한 갑남을녀인 우리의 인생에서는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도 있기 마련이다. 그 반대도 물론이고. 그런데 이 소설의 무대는 착한 사람과 좋은 일들과 고운 마음씨들만 있는 희귀한 마을로 보인다. 주인공에게는 사회생활에는 매우 서툴지만 무슨 사건이든 척척 해결해주는 도라에몽(?) 같은 동생과 어렸을 때부터 별 볼일 없는 자신을 짝사랑해주는 아이돌 간호사, 룸살롱을 좋아하지만 때로 인생에 깊은 조언을 남겨주는 멘토 등 따뜻한 사람만 주변에 한가득이다. 심지어 가끔은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귀찮은 부모님도 안 계시고, 그저 응원만 해주는 이모 내외랑 산다. 꼭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담은 쇼핑백을 보는 것 같은 판타지스러운 설정이라 오히려 웃음이 나오더라. 소소한 일상의 따뜻함과 행복을 전달해주는 것만이 일상 미스터리의 미덕은 아니다.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이 있는 것처럼 때로는 이웃의 사소한 악의를 목도하고 씁쓸함을 느끼기도 하고, 욕망이나 욕정에 결국 무너지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나약함에 한숨 짓기도 하는 것도 분명한 우리의 '일상'이다. 책장을 다 덮고 나서 작가의 다음 작품에서는 일상의 다른 면도 좀 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어차피 팍팍하고 끔찍한 얘기는 뉴스에서 매일 접하는데, 가끔은 이런 대책없이 낙관적이고 따뜻함 일변도에 푹 젖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현실에 없는 어떤 곳에 가보고 싶어서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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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10월
평점 :
예약주문


 

최근에는 일본산 추리소설을 별로 보지 않았다. 특히 신간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같이 예전부터 많이 읽어왔던 작가들은 왠지 신선하지 않고, 요즘 대세라는 라이트노벨풍 미스터리는 애정이 없어 구매를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아키요시 리카코의 <성모>는 출간 전부터 기대할 만하다는 소리를 이곳저곳에서 들은 터라 나오자마자 얼른 구해 읽어보았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좀 짧기도 했지만) 내린 결론은 모처럼 나온 일본 추리소설의 수준작이라는 것이었다. 여기다 요약하기도 좀 뭣할 만큼 아주 엽기적인 사건이 연속되어 (좀 끔찍하긴 했지만) 독자의 눈을 계속 잡아끄는 효과가 확실했고, 세 명의 등장인물이 각자 자신의 시점에서 줄거리를 진행시키는 구성이라 조금 질릴 만하면 화자가 계속 바뀌니 읽으면서 지루할 새가 없었다. 특히 수준급이라는 반전은 확실히 인상적이라 이 정도면 그간의 일본 추리소설 가뭄(?)을 확실히 해갈시켜줄 물건이라는 생각이다.

 

흔히 반전이 중요한 추리소설은 줄거리를 비롯해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읽는 게 가장 재미있는 법이라서 내용 설명을 최소한으로 줄이자면, 우리나라의 일산 같이 애 키우기 좋은 신도시에서 유치원 남학생들이 연속해서 유괴되어 살해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 동네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모두 초비상 상태로 특히 난임으로 아주 어렵게(처절하리만큼 어렵게) 딸아이를 가진 한 엄마는 당연히 거의 신경쇠약 직전의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엄마가 '주인공1'이고, 남아 연쇄유괴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두 남녀 형사가 '주인공2' 격이다. 마지막으로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적당히 잘하고 검도부로 활동하며 후배들도 잘 이끌어 학교에서 인기가 아주 높은 학생이 있다. 특기인 검도로 지역 어린이들에게 검도 가르치기 봉사활동도 하는 이 쿨한 학생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는데, 특정 아동에게 살인의 충동을 느끼면 멈출 수 없다는 것. 즉, 신도시를 공포에 물들게 한 이 사건의 범인이 분명한데 이 녀석이 바로 '주인공3'이다. 한마디로 사건의 관찰자, 수사관, 범인의 삼각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모든 세계가 뒤집힌다는) 마지막 20페이지에 하나로 합쳐진다.

 

책표지에 적혀 있는 모든 세계가 뒤집힌다는 반전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책의 결정적인 홍보 포인트로 내세우는 부분이기도 해서 반전이 너무 궁금했다. 서둘러 뚜껑을 열어보니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부 두 개였다(독자에게 다가올 충격파의 비중으로만 보면 2:8 정도). 흥미롭게도 첫 번째 반전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번째 반전의 방아쇠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끝나기 60페이지 전쯤에서 나오는 첫 번째 반전이 공개되면서 자연스럽게 두 번째 반전으로 연결되는 구조인데 이런 방식은 별로 본 적이 없어 제법 신선했다. 나 같은 경우 첫 번째 반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막상 첫 번째 반전을 알게 되자 어렴풋이 최종 반전은 이렇지 않을까 짐작이 갔고, 그 짐작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이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대개 동의하겠지만 첫 번째 반전을 넣지 않고 독자들에게 범인과 관계되는 모종의 사실을 처음부터 오픈했더라면 분명 난이도가 많이 낮아졌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고심 끝에 첫 번째 반전을 넣은 다음 책이 끝나기 직전에 터뜨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순간을 최대한 지연시켰다고 생각한다. 

 

역자후기를 읽어보니 일본에서 언페어 논쟁이 있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첫 번째 반전 쪽에서 독자들이 눈치챌 만한 공정한 단서가 좀 부족해서 그렇지 않았나 싶다(단서가 아예 없지는 않다). 참고로 두 번째 반전에서는 별로 걸리는 구석이 없었다. 작가는 우타노 쇼고의 팬이라고 하는데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히트를 쳤던 모 작품의 핵심 트릭과 닮았다. 다만 우타노 쇼고의 그 작품이 무리수에 가까운 트릭이라도 대단히 교묘하게 설계해서 결국 독자들을 굴복시켰다면, <성모>는 시시콜콜 따지고 드는 닳고 닳은 추리소설 독자들의 입조차도 싹 다물게 만들 만한 교묘함이 아주 조금 부족했다고나 할까. 물론 80년대에 데뷔해 수십 편의 추리소설을 쓴 노장과 이제 서너 편을 쓴 신예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을 테고, 리카코 작가도 매우 선전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요즘 본격 추리소설을 보면 고래로 세상에 안 나온 트릭이 없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내세우면서 트릭에는 힘을 덜 기울이고, 드라마적인 완성도나 힐링 요소 등의 분위기로 때우는 경향이 많은 듯하다. 하지만 <성모>와 아키요시 리카코 작가는 본격 추리소설의 재미는 역시 세상이 뒤집히는 트릭과 반전에서 나온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밀어붙여 그럴싸한 성과를 거두었다. 신예의 인상적인 활약에 앞으로도 나를 비롯한 추리소설 팬들의 주머니가 좀 더 엷어질 것 같다는 기분 좋은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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